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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국21

아직도 대만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글: 시화(施化) 한동안 중문여론권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화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대만'이다. 인상 속에서 인기검색어 1위가 아니더라도면 2위에는 올라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서방은 어떻게 대만을 핑계로 삼아 중국을 포위탄압하는지, 대만독립분자들이 어떻게 창궐하며, 미국아버지의 군사역량을 빌어 호가호위하는지, 대만의 신생대(新生代)는 대륙과 점점 멀러지고 있는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대만을 무력으로 해결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든지, 시진핑 신정권이 손을 쓸 것인지 아닌지, 대만해협전쟁은 언제 시작할 것인지. 등등.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현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청년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수십년동안, 중국대륙에서 대만 이슈의 열기는 식은 적이 없었다. 초.. 2023. 5. 9.
타이완군대의 "군기(軍妓)" 제도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49년 국민당군대가 대만으로 패퇴한 후, 십여만명을 금문(金門)의 각 섬에 배치한다. 섬에 주둔한 군대는 소수의 고위장교들이 가족을 데리고 있는 외에 절대다수의 관병들은 '홀몸'이었다. 하루종일 진지를 집으로 삼고, 총포와 함께 지낸다. 1998년 5월 23일 타이페이에서 출판된 의 글에 따르면, 군대측은 '관병생활을 조정하고, 그들의 심령을 달래기 위해" 1950년초부터 "군락원(軍樂園)"제도(즉 戰地妓院)의 설치를 기획한다. 그리고 '군락원'은 부대의 주둔필요에 따라, 영내 혹은 군영부근에 주둔부대를 따라 설립한다; 그리고 부대주둔지가 이전되면 함께 이전되거나 취소된다. 1952년, 타이완군대측은 정식으로 2022. 9. 6.
“소면호(笑面虎)" 모인봉(毛人鳳) 글: 심사기담(尋史奇談) 그는 일찌기 국민당 특무의 "1호인물"이었다. 그의 성공의 길에는 여자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다. 성공하기 전에 그는 은인자중하며 오랫동안 후덕하고 착실한 사람처런 행동하여, 모든 사람이 그에게 속았었다. 그가 고위직에 오르자 그는 칼을 빼들었고, 심지어 그를 여러해동안 따랐단 부하들조차도 액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명리를 추구하여, 적을 많이 만들었고, 심지어 '태자야'를 끌어내릴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말년은 한없이 처량했고, 모두가 그를 떠난다. 병이 위중했을 때 민간의 비방을 썼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국민당의 특무두목 "소면호" 모인봉이다. 모인봉의 성공에는 한 여자를 언급해야 한다. 그 여자는 바로 그의 처인 향영심(向影心)이다. .. 2022. 7. 18.
장개석이 손자 3명을 후계자로 양성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실패하였는가? 글: 우인연화(愚人煙火) 장경국(蔣經國)의 부인 장방량(蔣方良)은 모두 4명의 자식을 낳았다. 각각 장효문(蔣孝文, 장남), 장효장(蔣孝章, 장녀), 장효무(蔣孝武, 차남), 장효용(蔣孝勇, 막내아들)로 3남1녀이다. 이 세 아들에 대하여 장경국은 일기에서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효문은 멍청.. 2019. 5. 4.
장경국(蔣經國)은 어떻게 장개석(蔣介石)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는가? 글: 삼창(森彰) 역사의 철칙에 따르면, 어떤 독재정권도 권력자가 병사한 후, 권력승계문제를 놓고 반드시 투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은 장개석이 병사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대만으로 간 후에 장경국의 장개석의 지지하에 신속히 정보조직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것은 단.. 2018. 12. 18.
장경국(蔣經國)의 사망원인 글: 노리람사(老李覽史) 1988년 1월 13일 오후 3시 50분, 장경국이 타이페이시 칠해관저(七海官邸)에서 사망하니, 향년 78세이다. 장경국은 말년에 병을 많이 알았고, 주로 당뇨병이 날로 악화되어 시망막이 모호해지고, 신장에 염증이 생기고, 두 다리의 살이 썩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나중.. 2018. 1. 15.
장개석은 어떻게 성도(成都)에서 대만(臺灣)으로 도망갔는가? ㅠ상,글: 왕풍(王豊) 장개석이 처음 사천에 온 것은 1935년 3월 2일이다. 그가 사천에 간 목적은 첫째가 독군(督軍)이다. "공비토벌" 전선을 시찰하기 위함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사천성정부가 사천을 건설하는 것을 돕고, 사천동포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 2015. 11. 2.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 글: 구양박문(歐陽博文) 대만 <연합보(聯合報)>의 보도에 따르면,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는 31명의 장개석의 신변에서 일했던 시종인원들을 인터뷰하여, 근 60만자에 이르는 구술역사를 완성했다. 대만당국의 '유엔퇴출'시 장개석이 분노하여 압설모를 집어던지고 화가나서 .. 2014. 10. 24.
장경국은 왜 장씨후손을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는가? 글: 도함(陶涵) 장경국은 8월 타임지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장씨집안후손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장경국은 장효무, 장효용 형제가 국민당 '중앙위원' 경선에 참가할 뜻이 있음을 알게 되자, 비서장 마수례(馬樹禮)를 시켜 제지하게 한다. 장경국의.. 2014. 4. 4.
위정성(兪正聲)의 형 위창성(兪强聲)의 1985년 미국망명내막 작자: 미상 현임 전국정협주석, 중앙정치국상위 위정성의 형은 위창성이며, 198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위창성은 강청(江靑)의 첫번째 남편인 유계위(兪啓威, 위치웨이)의 큰아들이다. 유계위는 혁명연대에 황경(黃敬, 황징)이라는 가명을 썼고, 신중국성립후 초대 텐진시장을 지낸다. 문.. 2013.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