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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114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2) 글: 장명양(張明揚) 당나라는 '태상황'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모두 4명의 태상황이 출현한다. 만일 이전 북조의 '태상황'은 모두 난세에 나타난 괴이한 산물이라면, 당나라의 몇명 '태상황'은 모두 성세지군이고, '정관지치'와 '개원성세'라는 두 번의 태평성대에 걸쳐 있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중흥시대도 있다. 그러나 황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잔혹함은 도검이 난무하던 난세에 전혀 못지 않았다. 단지 태평성세시대의 권력쟁탈모델은 더욱 음성적이고 더욱 미묘하며 더욱 힘겨루기식이었다는 것뿐이다. 황권은 곡중구(曲中求)해야지 직중취(直中取)해서는 안된다. 이연(李淵) vs 이세민(李世民)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었던 이연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9년후인 626년, 그도 핍박받아 '태상황'이.. 2023. 5. 1.
이원길(李元吉)은 왜 이세민(李世民)의 편이 아닌 이건성(李建成)의 편에 섰을까? 글: 역사전록(歷史典錄)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다. 장남 이건성, 차남 이세민, 삼남 이현패(李玄覇, 요절), 사남 이원길. 이연이 진양(晋陽)에서 거병했을 때, 이원길은 겨우 15살이어서, 무리를 따라 관중으로 가지 않고, 진양에 남아 있으면서 후방을 지켰다. 이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 대당정권을 건립한다. 이원길은 제왕(齊王)에 봉해지고, 병주총관(幷州總管)에 임명된다. 다만, 이원길은 형편없었다. 군벌 유무주(劉武周)가 공격해 들어오자 놀라서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후 그는 둘째형 이세민을 따라서 왕세충(王世充)을 포위공격하고, 두건덕(竇建德)과 싸우며, 유흑달(劉黑闥)을 소탕해쏙, 서원랑(徐圓朗)을 격퇴시키면서 적지 않은 전공을 세우고, 자신의 세력을 배양했다. 천.. 2022. 5. 12.
양주(揚州) 수양제묘(隋煬帝墓) 글: 시정정(時婷婷) 2022년 5월 5일 양주(揚州, 양저우)시 문화재보호부서에 따르면, 수양제유지공원(隋煬帝遺址公園)을 10월에 대외공개하여, 400여건의 수양제와 관련된 문화재를 관광객들에게 관람하도록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수양제는 최소 3번 이장되었는데, 지금 그 비밀이 풀리고 있다. 주나라때부터 시작하여, 한나라때, 수당송때, 명청때 3차례에 걸쳐 전성기를 맞이했던 강소성의 양주는 중국고대의 문화맥락이 농축되어 있다. 3000여년의 역사에서 양주는 정식으로 도성(都城)이 된 적은 엇지만, 수,당시기에는 중요한 도시로서 짙은 인상을 남겼다. 이 모든 것은 수양제 양광(楊廣)과 관련이 있다. 이 유명하지만 논쟁이 많은 제왕은 대운하를 만들었고, 과거제도를 시작한다. 그리고 호화사치와 음탕을 일삼고.. 2022. 5. 6.
중남해의 신축지몽(辛丑之夢)과 당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 글: 사전(謝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공19대전에 내부에서 열람되는 문건에서, 시진핑과 그의 지낭(智囊)들은 중국에서 '정관지치'를 실현할 계획을 내놓았다. 중공의 풍촉잔년(風燭殘年)인 때, 성당(盛唐)의 미몽(美夢)을 꾸다니 정말 황당무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5년간, 중남해의 과두들은 롤러코스트를 탄 것같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트럼프의 강유병제(剛柔幷濟)의 강력한 힘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작년 미국이 인류역사상 최대의 정치체제도전을 겪은 후, 중공음 마치 강심제라고 맞은 것처럼 다시 살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게 된 것같다. 이에 상응하여 5년전의 '정관지치'가 돌연 그다지 멀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고,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같다. 그러나 중남해는 너무 빨.. 2021. 4. 2.
정난지역(靖難之役)후 주체(朱棣)는 왜 5번이나 몽골정벌에 직접 나섰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정난지역이후, 주체는 성공적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으로부터 황제위를 빼앗는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를 '영락대제(永樂大帝)'로 칭송한다. 주체의 주요 공적을 나열해 보자면, 북경천도, 영락대전편수, 정화하서양, 안남수복, 오정막북(五征漠北)이 있다. 특히 5차례에 걸쳐 막북을 친정(親征)한 것은, 후세의 찬양을 받는다. 자고이래 제왕이 직접 정벌에 나서는 일도 많지 않지만, 주체는 역사상 최초로 직접 장성이북을 친정한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주원장이 원왕조를 쫓아낸 후, 몽골통치자의 잔여세력은 완전시 소멸되지 않고, 새외(塞外)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립한다.. 2020. 10. 31.
역사상의 "태종(太宗)": 모두 "내로부정(來路不正)"한 황제들이다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 수천년의 왕조사에서 묘호(廟號)는 아주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묘호"와 "시호(諡號)"는 모두 어느 정도에서 황제일생의 공과시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의 황제는 시호의 수가 늘어나서, 자손들이 조상을 위하여 시호를 정할 때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묘호'는 '시호'를 대체하여 황제에 대한 개관정론(蓋官定論)의 중요한 근거이다. 가장 원시적인 묘호는 상(商)나라때 건립된다. 당시에는 단지, "태(太)", "고(高)", "세(世)", "중(中)"의 4종이었다. 그리고, "조유공이종유덕(祖有功而宗有德)", 조는 공이 있는 황제에게, 종은 덕이 있는 황제에게 붙인다는 기준으로 조종의 묘호를 정했다. 나중에 왕조가.. 2020.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