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릉17 한무제(漢武帝)는 왜 막내아들 유불릉(劉弗陵)을 황위후계자로 삼았을까? 글: 팔점종사기(八點鐘史記)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 기원전156년 7월 14일 - 기원전87년 3월 29일)은 서한(西漢)의 제7대 황제이다. 한무제는 16세때 등극하여, 중앙에는 중조(中朝)를 설치하여 황권을 공고히 했으며, 지방에는 13주의 자사(刺史)를 두어 제후왕과 지방고위관료에 대한 감찰을 강화했다; 찰거제(察擧制)를 채택하여 인재를 설발하고; 문화적으로 동중서(董重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확립하여, 유가사상을 국가의 통치사상으로 삼는다. 군사적으로는 외적을 물리쳐 영토를 확장하고 국위를 선양했다. 동으로 조선을 병합하고, 남으로 백월을 점령했으며, 서로는 대완을 정벌하고, 북으로 흉노를 격파했다. 이렇게 한나라의 기본적인 영토를 확립하고, 한무.. 2023. 6. 28. 한무제는 왜 유불릉(劉弗陵)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유불릉의 생모는 조첩여(趙婕妤)이다. 구익부인(鉤弋夫人)이라고도 불리고, 권부인(拳夫人)이라고도 불린다. 한번은 한무제가 사냥을 갔는데, 하간국(河澗國)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한무제의 곁에 있던 방사가 현지에 기녀자(奇女子)가 있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미신을 믿어, 사람을 보내어 찾게 했더니, 금방 한 여자를 찾아낸다. 그 여자가 바로 구익부인이다. 여자는 아주 기괴했다. 두 손을 꽉 쥐고 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펴고자 해도 펴지지 않았다. 한무제는 호기심이 발작하여, 직접 말에서 내려, 그 여자의 주먹을 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의 자하선자가 자청보검을 뽑는 사람은 하늘이 골라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마침 지존보가 자청보검을 뽑아서, 그 후에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 2020. 10. 8. 곽광 vs 상홍양: 한무제의 두 탁고대신은 왜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그때는 염철회의 대변론 후의 다음 해였다. 즉 한소제 원봉원년(기원전80년) 구월, 잘나가던 상홍양(桑弘羊)은 시종 자신의 경력과 공로가 모두 곽광(霍光)보다 위라고 여긴다. 그런데, 정치적인 지위는 곽광보다 낮은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 2019. 10. 10. 구익부인(鉤弋夫人): 한무제의 수수께끼같은 후궁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기원전87년 이월 십이일, 한무제는 병이 위중해졌다. 나이 겨우 8살의 유불릉(劉弗陵)을 황태자에 앉힌다. 태자를 세운 다음 날, 한무제는 사망하고, 유불릉이 황위를 승계하며 생모인 구익부인 조씨를 황태후로 추존한다. 사서에는 이 황태후 구익부인의 기록이 .. 2019. 1. 5. 상관황후(上官皇后): 중국역사상 유일한 민며느리 황후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민며느리(童養媳)는 가난한 집안의 계집아이를 어린나이로 장래 남편이 될 사람의 집에 보내는 것이다. 거기서 장래의 시집에서 일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되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나라황실에 민며느리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한소제(漢昭帝) .. 2018. 7. 19. 한무제는 왜 구익부인을 죽여야 했을까? 글: 동호소주(東湖少主) 무릇 업적을 세운 제왕들은 큰 재주도 지녔지만 큰 재앙도 만들어낸다. 이런 인물이 역사상 드물지 않다. 그 걸출한 대표인물은 바로 진시황과 한무제이다. 이 두 사람은 정치적 풍격이 아주 비슷할 뿐아니라, 개인적인 취향도 거의 비슷했다. 일생동안 장생불로.. 2018. 1. 9.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