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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황후8

상관완아(上官婉兒)의 묘지명(墓誌銘): 드러난 역사의 진실 글: 오붕(吳鵬) 2022년 4월 28일, 당나라의 상관완아묘지명이 섬서고고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일반대중에게 전시되기 시작했다. "건괵재상(巾幗宰相)"이라고 불리던 상관완아의 신세내력은 수수께끼로 휩싸여 있으나, 재주와 학문은 남자들에 못지 않았고,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의 조부인 상관의(上官儀)는 무측천을 축출하려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녀는 무측천의 심복이 된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이당황실의 편에 섰으나, 오히려 당시 임치왕(臨淄王)이던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에게 피살당한다. 전통적인 정사와 세상에 전해져 내려오는 야사에서 상관완아의 본모습은 가려져 있었다. 새로 출토된 묘지명은 아마도 상관완아에 대한 이미지를 역사에 가깝게 환원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성참정의 역사적 진전을 이루었고, .. 2022. 5. 24.
한무제때 "무고지화(巫蠱之禍)"의 막후인물은 누구일까? 작자: 미상 무고(巫蠱)의 통상적인 해석은 한 무리의 독충(毒蟲)을 하나의 그릇에 넣고[고(蠱)라는 글자 자체가 벌레를 놓아두는 그릇(皿)이라는 뜻이다], 독충이 서로를 잡아먹게 한 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한 마리의 독충을 '고'라고 부르는데, 그 독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무고술의 구체적인 방법은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의 위에 저주할 사람의 이름, 생진팔자등을 쓰고 마법과 저주를 한 다음 고를 저주받을 사람이 거처한 곳 혹은 근처에 풀어주고, 이를 통해 저주받는 사람의 영혼을 통제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 그럼 2천여년전에 발생했던 무고지화가 어떻게 서막을 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92년, 한무제 유철(劉徹)은 건장궁(建章宮)에서 한 남자가 검을 차고 용화문(龍華門)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2021. 1. 14.
우림군(羽林軍): 당나라 궁중정변의 결정적 요소 글: 엽서도(獵書徒) 우림군은 중국고대에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오래된 황제의 금군(禁軍)이다. 처음 나타난 것은 서한(西漢)시기이다. '우림'이라는 것은 "위국우익(爲國羽翼), 여림지성(如林之盛)"(나라를 위한 날개가 되어, 숲처럼 무성하라)의 의미라고 한다. 당고조때 당나라는 궁성의 이북에 주둔하며 황제와 황실을 보위하는 것을 주요 직책으로 하는 황제의 사병을 창설했다. 즉, 북위금군(北衛禁軍)인데, 국가의 군대인 남아부병(南衙府兵)에 상대되는 것이다. 그후 당태종, 당고종 양대에 걸쳐 계속 변화하며, 최종적으로 '북위금군'에서 정예부대가 독립하게 되는데, '좌우우림군'이라 명명된다. 우림군은 황제의 개인적 호위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황실과 궁정의 안전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또한 황제.. 2020. 5. 4.
무혜비(武惠妃): 당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황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무측천은 당나라때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말년에 손자 이융기(李隆基)의 정변으로 하야하게 된다. 당중종이 죽은 후, 이융기는 정변을 기획하여 위황후(韋皇后)를 주살한다. 역사에서 "당륭정변(唐隆政變)"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등.. 2018. 10. 19.
당나라의 명재상 요숭(姚崇)은 어떻게 정적에 대처했는가? 글: 소풍(小楓) 당시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재상은 큰 수수께끼이다. 생각해보라. 깊은 저택에 앉아서, 호풍환우의 능력을 지니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누가 그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 있겠는가? 요숭은 바로 이런 재상이었다. 그는 650년에 태어났고, 섬주 섬석(지.. 2012. 6. 10.
신룡정변(神龍政變): 무측천의 최후의 나날 (II) 5 소위 "남총(男寵)"은 바로 면수(面首)이며, 자신의 몸을 가지고 권세를 가진 여자를 기쁘게 하는 남자를 말한다. 무측천도 정상적인 생리적 욕구가 있고, 거대한 심리적 압력을 받았다. 복잡한 정무를 처리한 후에는 그녀도 안위가 필요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어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무측천은 권.. 2008. 10. 8.
한무제의 후계자 기원전94년, 한무제가 총애하는 구익부인(钩弋夫人)이 아들을 낳았다. 무제는 매우 예뻐했다. 비록 그는 이전에 이미 다섯 명의 자식이 있고, 황위계승자 즉 태자도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지만, 이 황제는 늙어서 자식을 얻었을 뿐아니라, 이 아이가 아끼는 후궁의 소생이며, 게다가 구익부.. 2007. 4. 2.
무측천의 뒤를 이어 황제자리를 꿈꾸던 여인들 무측천(武則天)은 당태종 이세민의 재인(才人, 후궁중 낮은 등급)이었고, 이세민의 아들인 당고종 이치(李治)의 황후였으며, 중국을 수십년통치한 "측천대황제(則天大皇帝)"였다. 그녀는 중국에서 유일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황제였다. 무측천은 총명하고 영리하였으며, 속이 깊고 음험하고 독랄하였.. 2006.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