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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7

기형적인 지방채(地方債) 양발불(梁發芾) 최근 들어, 어떤 매체는 은행의 내부소식통과 애널리스트의 말을 인용하여, 중국정부가 이미 국내은행에 지방정부의 대출에 대하여 대규모의 롤오버를 지시했다고 한다. 일찌기 관련계획을 들은 것을 소개하는 사람에 따르면, "어느 상황하에서, 기한이 도래하면 .. 2012. 2. 19.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왜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의 적수가 되지 못했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위안스카이는 재능있는 인물이다. 이는 당대는 물론 후세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쩐 인재였는가? 내재(內才)인가 외재(外才)인가? 그가 일본인과 겨룬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일본과 중국이 처음으로 겨룬 것은 조선문.. 2011. 5. 27.
원세개의 유산분할 글: 부국용(傅國涌) 1916년 6월 6일, 원세개(위안스카이)는 모든 백성들의 욕을 먹는 와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은 아주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고향인 하남성 창덕의 묘지는 200무(1무는 200평이므로 4만평)이상이고, 시신은 전용열차로 운구되었으며, 직접 장례비만도 50여만은원(銀圓)에 .. 2007. 3. 28.
서세창(徐世昌) : 관운이 형통했던 풍운아 서세창은 청나라때는 군기대신으로 신하로서 최고의 직위에 까지 오르고, 원세개가 집권하였을 때는 국무경(國務卿)에 올랐으며, 민국시대 북양정부에서는 대총통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직을 차지하였는데, 그의 정치적인 특색을 보면 이렇다. 정치적인 업적은 거의 없다. .. 2006. 11. 9.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의 글씨 2006. 2. 6.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부인과 자손들 위안스카이는 1859년(청나라 광서 9년)에 하남성 항성현(項城縣)에서 태어났나.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서출이었으므로 모친의 장례문제로 배다른 형과 불화가 발생하여, 하남성 창덕부(彰德府, 현재의 안양시) 원상촌(洹上村)으로 옮겨서 살았고, 죽은 후에도 여기에 묻혔다. 위안스카이는 1처9첩을 두.. 2005. 11. 9.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의 사망원인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이후, 은거하고 있던 창덕(彰德)의 고향에서 다시 나와, 섭정왕 재풍으로 하여금 양위하도록 하고, 그 스스로 청왕조의 국무총리대신이 되어 남북의화후에는 손중산을 대신하여 민국의 임시대총통을 맡았다. 1년후에는 정식 대총통이 되.. 2005.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