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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의 유산분할

by 중은우시 2007. 3. 28.

글: 부국용(傅國涌)

 

1916년 6월 6일, 원세개(위안스카이)는 모든 백성들의 욕을 먹는 와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은 아주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고향인 하남성 창덕의 묘지는 200무(1무는 200평이므로 4만평)이상이고, 시신은 전용열차로 운구되었으며, 직접 장례비만도 50여만은원(銀圓)에 달하였다.

 

수도호손산(樹倒散, 나무가 쓰러지면 나무에 붙어살던 원숭이도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원세개가 남겨준 재산은 다리에 장애가 있지만 야심이 적지 않았던 장남 원극정(袁克定)의 주재하에 자녀와 처첩들에게 두 번에 걸쳐서 분배되었다.

 

제1차재산분배때 원극정과 그의 생모가 분배받은 숫자는 지금까지도 비밀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된 기록은 남아 있다. 6명의 이태태(姨太太, 첩)들에게는 1인당 은원6만위안, 황금30냥씩을 분배했다. 17명의 아들들에게는 1인당 은원8만위안, 황금 40냥, 각종 주식 7만위안씩을 분배했다. 13명의 딸에게는 1인당 은원1만위안으로 나중에 시집갈 때 가지고 갈 것으로 하였다. 이것을 다 합치면 은원185만위안, 황금860냥, 주식 119만위안이다.

 

제2차재산분배때 나눈 것은 북경과 천진의 부동산이었다. "극(克)"자배(원세개의 아들들)의 아들들은 모두 1인당 은원249만위안씩 합계 은원3984만위안을 나누어주었다. 원극정은 장남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원세개가 프랑스은행에 맡긴 200만프랑, 대량의 전답, 가옥, 골동, 문화재, 주보, 자화(字畵)등을 독식했는데, 그 가치는 엄청났다. 어떤 사람이 고증한 바에 의하면, 그가 독점한 재산의 총가치는 다른 자녀와 처첩들에게 나누어준 모든 금은주식을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라고 본다.

 

영화부귀전두공(榮華富貴轉頭空)

만금산진불부래(萬金散盡不復來)

 

영화부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억만금은 흩어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노구교사변이 발생했을 때는 원세개의 재산을 분배한지 20여년이 지난 때였고, 원극정은 이미 60여세가 되었을 때였다. 당시 북양정부의 원세개 밑에서 "용호구(龍虎狗)"의 삼걸(三傑)중에서 왕사진과 풍국장은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단기서마저도 노산에서 죽었은 상태였다

 

북경을 함락시킨 후, 일본인은 왕극민으로 하여금 친일정부를 조직하게 하였고, 높은 직위로 원극정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고 이미 이순의 나이가 된 원극정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신문에 성명을 발표해서, 자기는 이미 병이 깊고, 어떠한 일에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손님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원극정은 이미 생활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었고, 이화원에 집을 빌려서 살았다. 장백구가 가끔 그의 집을 다녀올 때, 물고기나 고기는 없고, 그저 와와두에 소금절인 야채를 얻어서 먹을 뿐이었다. 그래도 기품이라든지 식사때 가슴에 냅킨을 대는 것등은 예전에 황태자시절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