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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성7

서안사변(西安事變)때 각 세력의 입장은...? 글: 안득(安得) 금년(2018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82주년기념일이다. 1936년 12월 12일, 중국 동북군장수 장학량(張學良), 서북군장수 양호성(楊虎城)은 서안에서 '병간(兵諫)'을 일으킨다. 당시 중국최고지도자인 장개석과 그의 수행인원들을 억류하였다. 일시에 남경국민정부, 국민당지방실.. 2018. 12. 15.
소련은 왜 서안사변에 반대했는가? 글: 지효민(智效民) 2013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77주년기념일이다. 77년전에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이 장개석을 구금한 후, 연안에는 무대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공개재판을 통하여 장개석을 처형할 생각이었다. 다만, 왜그런지 2,3일후, 연안측에서는 장학량에게 장개석을 풀어주.. 2013. 11. 29.
양호성(楊虎城) 일가피살의 내막 출처: 봉황망역사 1949년 8월, 귀양(貴陽) 검령산(黔靈山) 아래의 기린동(麒麟洞)의 한 은밀한 사합원에서 머리카락이 절반은 하얗게 변한 전 국민당서북군장령이자 '서안사변'의 발기인중 한명인 양호성 장군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린 딸을 안고, 노인의 걸음걸이로 집안으로 가서 한켠의 .. 2013. 8. 5.
민국시대의 파벌 글: 녕녕(寧寧) 민국시대를 얘기하자면, 파벌을 얘기해야 하지 않으면 민국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파벌을 얘기하자면, 육영정(陸榮廷)을 얘기하지 않으면, 파벌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육영정이 광서(廣西)를 십년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민국의 파벌이 난립한 배경과 관련이 있.. 2013. 8. 5.
장개석의 결의형제 대계도(戴季陶)는 왜 자살했는가? 글: 녕녕(寧寧) 1949년 2월 12일 새벽, 대계도는 홀로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창밖은 칠흑같은 어둠이었고, 한밤의 차가운 기운이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추위도 마음 속의 추위보다는 못했다. 평진, 회해전투에서 일패도지하여 이때 해방군은 이미 장강북쪽까지 내려왔다. 비록.. 2013. 6. 26.
군통삼검객(軍統三劍客)의 최후 글: 당사문원 심취(沈醉), 서원거(徐元擧) 및 주양호(周養浩) 세 사람은 국민당 군통국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간부들이다. 그들의 직무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하며 모두 대립(戴笠)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군통 '삼검객'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는다. "군.. 2012.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