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13 장거정(張居正): "개혁" 원저: 정념기(程念祺) (2019년 12월) 경제관찰보 발췌요약본 명효종(明孝宗) 통치시기에 대학사 이동양(李東陽)은 상소문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민간의 상황을 군현이 모르고 있고, 군현의 상황을 조정이 모르고 있고, 조정의 상황을 황제가 모르고 있다. 명나라의 '절대황권'하에서 전체 관료계통에서 정보획득방식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여려 제도상의 폐혜를 개혁하려는 것은 여러가지 정보부족으로 인한 곤란을 겪기 마련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황제 본인이 정보에서 차단되어 있어 개혁의 발동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인종(明仁宗), 명선종(明宣宗)이래 명나라의 '조종법제'가 이미 여러 헛점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적폐가 계속 누적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다만.. 2020. 8. 21. 가정제(嘉政帝)는 왜 엄숭(嚴嵩)을 중용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 2020. 6. 30. 전겸익(錢謙益)으로 본 동림당의 변신; 신앙집단에서 이익집단으로 글: 정만군(程萬軍) 숭정2년, 즉 1629년 숭정제 주유검은 전면적으로 동림당인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대명정계에 동림당의 잔여인원들은 다시 중용된다. 다시 나온 동림당인들은 중망(衆望)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동림당인은 이미 옛날의 독림당이 아니었다. 왜 그런가? 다시 조정.. 2019. 1. 14. 동림당(東林黨) 분석: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글: 고금지모(古今智謀) 황제가 조정대권을 과감하게 환관에게 넘겨주는데 대하여 가장 불만이 컸던 것은 문관집단이다. 문관집단의 이런 생각은 좋게 보면 그들의 모두 성현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인생이상을 지니고 있으며, '군주를 요순으로 만들겠다'는 .. 2019. 1. 13. 장거정(張居正)과 이태후(李太后)는 무슨 관계였을까? 글: 군령여산(軍令如山)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과 이태후에 관한 것인데, 장거정이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과거합격자중 꼴찌의 이름이 애자수(艾自修)인 것을 보고는 이런 대련을 만들어 조롱했다고 한다: "애자수(艾自修, 자수물수(自修勿修), 백면서생배호방(白面.. 2018. 3. 1. 장거정(張居正)의 사인(死因)은? 글: 정만군(程萬軍) 1582년 7월 9일, 대명의 수보(首輔)이자 일대정치강자인 장거정이 돌연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58세이다. 58은 고대인들의 수명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많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장거정은 왜 돌연 사망하게 되었을까? 장거정의 죽음에 관하여, 정사의 기재는 아주 간.. 2018. 1. 14.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