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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망8

장헌충(張獻忠)의 양자 4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초근일일(草根一一) 고대의 많은 제왕들은 양자를 거두기 좋아했다. 예를 들어, 이극용(李克用), 주원장(朱元璋)등이 그러했다. 명나라말기 농민정권인 대서정권(大西政權)의 장헌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4명의 양자를 거두었는데, 나중에 이 4명이 운명은 모두 달랐다. 첫째, 진왕(秦王), 의왕(義王) 손가망(孫可望)(?-1660년), 섬서 연장현 사람. 1630년(명 숭정3년), 손가망은 장헌충을 따라 반란에 가담한다. 용맹하고 잘 싸워서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고, 이정국(李定國), 유문수(劉文秀), 애능기(艾能奇)와 함께 장헌충의 양자가 된다. 1646년(순치3년), 청군이 대거 사천으로 쳐들어온다. 장헌충은 봉명산(鳳鳴山)에서 전사하고, 나머지 부대는 손가망과 이정국이 물려받아, 운남, 귀주지.. 2021. 1. 28.
대서군(大西軍) 후기: 장수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의 관계와 갈등 글: 화운초(和運超) 대서군이 운남(雲南)으로 들어간 후, 남명군(南明軍)과 융합하는 것은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의 민간농민군이 신분을 바꾸어 남명군이 되는 것에 대하여, 대서군내부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이 발생한다. 특히 1인자인 손가망(孫可望)과 2인자인 이정국(李定國)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더욱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이정국으로 손가망을 대체하려고까지 한다. 이는 결국 대서군과 남명잔여세력이 서남대국에서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1. 손가망의 야심배후: 연합하지만 귀순하지 않는다. 손가망은 큰형이자 우두머리로서, 처음에는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와 협력한 것은 기회를 보아 운남귀주를 점거하기 위함이고, 그후에 힘을 모아 다시 사천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순수한 공리적인 마음이었다.. 2020. 7. 15.
백문선(白文選): 농민군과 남명의 명장, 그는 왜 청나라에 투항했는가? 글: 제운가(齊雲軻) 백문선은 남명(南明)역사상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대의를 깨닫고 대국을 고려하여, 남명의 통치를 지속시키고, 남명망명정부를 지키는데 걸출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왜 마지막에 청나라에 투항했을까? 역사상의 백문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1. 농.. 2019. 5. 21.
장헌충의 죽음 글: 천애간점역사호(天涯看點歷史號) 장헌충과 이자성은 다같이 명나라말기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이다. 다만 역사는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전혀 다르게 하고 있다. 이자성은 백성들을 고난에서 구원해준 "이틈왕(李闖王)", "틈왕이 오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여 대중의 환.. 2019. 5. 4.
이자성의 부인들... 글: 장계합(張繼合) <명사>혹은 <청사고>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요설은(姚雪垠) 선생이 창작한 장편역사소설 <이자성>은 읽어보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틈왐(闖王)"이라 불리는 이자성은 일을 계속하여 벌이는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나온다. 만일 그의 곁에 있는.. 2018. 3. 2.
아오바이(鰲拜)(3):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글: 기련해(紀連海) 소년강희와 성년아오바이간에는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문제는 아오바이의 원인도 있을 것이고, 강희제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강희제의 원인은 여기서 잠시 분석을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그저 아오바이측의 원인만을 분석해보도록 한다: 문제는 왜 4대 .. 2018. 2. 27.
명나라의 유명한 장수들은 왜 모두 청나라에 투항했을까? 글: 목도도(木圖圖) 명나라말기 비교적 유명한 고위장수들은 모두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번왕(四藩王)이다. 즉,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그 다음으로 조대수(祖.. 2017. 9. 26.
청나라의 한족출신 왕공(王公) 1. 평서친왕(平西親王) 오삼계(吳三桂) (1612-1678) 자는 장백(長伯)이고, 강소 고우 사람이다. 요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양(吳襄)이고, 숭정제때 금주총관을 지냈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에 가까이 올 때, 오삼계는 요동총병관이었다. 숭정제는 그에게 평서백(平西伯)의 작위를 내리고, 북경을 보위.. 2007.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