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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전6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장선운(蔣先雲): 황포군관학교 최고의 천재 글: 유계흥(劉繼興) 다시 대학입학시험의 계절이 돌아왔다. 필자는 황포군관학교 사상 최고의 천재인 장선운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모든 시험과목의 수석을 차지한다. 황포군관학교상 '유일무이'한 기적을 이루었을 뿐아니라, 이는 국내외학교의 역사상으로도 보기 .. 2018. 7. 7.
장정(長征)때 홍군은 왜 매복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는가? 글: 서염(徐焰) 장정기간동안 홍3군단장, 홍1방면군사령원을 지낸 팽덕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홍군지휘관의 영용과 뛰어난 정찰업무덕분에, 전멸을 피하고 섬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리장정에서, 홍군은 시시때때로 중병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도 매복에 걸린 적이 없.. 2013. 11. 10.
황포신화의 파멸 작자: 미상 항전을 되돌아보면, 갈라진 후의 공산당을 이끈 무장역량을 중점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항전의 중요한 역량중 하나였다. 도한 황포신화에 열중하는 독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팔로군"에는 얼마나 많은 황포의 혈통이 있을까? ".. 2013. 8. 17.
10대원수 계급부여시의 군내파벌균형 글: 복녕객(福寧客)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은 최초로 계급제를 실시한다.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택동은 주덕등 10대원수에게 계급장을 수여하고, 주은래는 속유(粟裕)등 10대대장에게 계급장을 수여했다. 중국군대의 저명한 십대원수, 십대대장은 이렇게 확립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 2013. 6. 10.
개국10대원수의 개명과정 글: 정세강(程世剛) 1. 주덕(朱德) 주덕이 태어났을 때, 모친은 그를 잘 자라라고 아명으로 "구아(狗兒)"라고 불렀다. 가끔, 주씨집안사람들은 사천북부의 습속에 따라, 그를 "구왜자(狗娃子)"라고 불렀다. 4살이 되어 부친은 주씨집안의 항열에 따라 그에게 "주대진(朱代珍)"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1895.. 2011.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