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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치5

임표(林彪)와 등소평(鄧小平)의 은원(恩怨) 글: 조대부(趙大夫) 임표, 등소평은 모택동의 득의문생(得意門生)으로 일찌기 모두 모택동의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한명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이름을 넣었던 모택동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명은 모택동의 사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렇다면, 등소평과 임표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제1대영도집단의 핵심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심리도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상하급관계였기도 했고, 일찌기 밀접한 협력관계이기도 했고, 또한 심각한 대립관계이기도 했다. 등소평과 임표는 일생동안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등소평의 딸 모모(毛毛)가 등소평을 회고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등소평과 임표는 개인적인.. 2022. 11. 24.
"문혁(文革)"의 진상을 가장 먼저 통찰한 사람들.... 글: 부국용(傅國涌) 56년전인 1966년, 중남해에서 일어난 태풍이 밀려올 때, 일시에 파도가 하늘에 닿고, 음습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많은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중공고관들이나 전공이 혁혁한 대장, 원훈(元勳)들, 그리고 한 지방을 다스리는 봉강대리(封疆大吏)들까지도 이때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고, 그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운명의 처분을 기다렸다. 유소기(劉少奇) 마저도 단지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는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문혁발생초기, 많은 권력무대에서 부침을 거듭한 고관들은 거의 모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앞장서서 이 전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동란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 2022. 9. 7.
유소기사건의 증거는 어떻게 조작되었는가? 글: 나서(羅嶼) 2012년초,중공문헌연구회 유소기분회의 부회장 겸 중공중앙문헌연구실 2부 전 부주임인 황쟁(黃崢)이 쓴 두 권의 저작 <유소기원안시말(劉少奇寃案始末)>과 <유소기의 최후세월> 재판은 널리 주목을 받았다. 왜 이제까지도 유소기사건이 여전히 사람들의 흥미.. 2015. 12. 4.
유소기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었는가? 글: 중국경영망 2012년초, 중공문헌연구회 유소기분회 부회장, 중공중앙문헌연구실2부 전 부주임 황쟁(黃崢)의 두 권의 저작 <유소기원안시말>, <유소기의 최후세월>이 재판이 나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왜 오늘날에 이르러 유소기사건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 2015. 1. 14.
진석련(陳錫聯) : 모택동 말년의 4 총신(寵臣) 진석련 이 사람은 당내에서 계속 “쌍면호(雙面狐)”로 불리운다. 한 측면으로는 그가 전쟁시대때 보인 모습과 건국후기의 모습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이 때 이 사람에 대하여는 이렇고, 저 때 저 사람에 대하여는 저렇다는 점이다. 사람됨이 매우 매끄러웠고, 심지어 교활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 2006.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