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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위46

기독교는 어떻게 중국에 전파되었는가? 글: 곽계민(郭繼民)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에 대하여 당금 학계에서는 대체로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삼분법으로 기독교는 주로 아래의 3개 시기로 전파를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즉 635년을 전후한 당나라시기, 명말청초, 1849년이후 지금까지. 다른 하나는 사분법이다. 원나라의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원나라때 몽골인은 중국으로 온 기독교와 그 신도를 이렇게 불렀다)의 전래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탁신평(卓新平)선생이 이런 견해를 취한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순수한 역사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마땅히 '야리가온교'의 원나라로의 전래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만일 전파의 영향이라는 각도에서 보자면 신축성있게 처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나라의 '야리가온교'는 영향이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 2023. 4. 18.
최후의 귀족: 강동벽(康同璧) 모녀의 인상 (2) 글: 장이화(章詒和) 강동벽의 집에 기거하는 동안 나는 3명의 교수를 알게 되었다. 한명은 장장강(張長江)이다. 그는 강유위의 제자인 장백정(張伯楨)의 손자이고, 북경사전문가인 장차계(張次溪)의 아들이다. 대외경무학원(지금의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했으면 서예도 뛰어났다. 십일이나 반달에 한번씩 강동벽의 집을 찾아왔고, 강동벽의 문자류업무를 처리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몰래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가 천극단에 있을 때, 강씨모녀가 너에게 보낸 회신은 대부분 내가 대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너를 알았다. 다만 만날 연분이 없었을 뿐이지." 장선생은 집으로 들어오면 서두르지 않고 탁자로 가서 앉아서 글쓰는 일로 바빴다. 그는 노인과 한담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나 길거리소식.. 2023. 4. 16.
광서제(光緖帝)는 왜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사진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1843년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 서양의 상류층인사들은 자주 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사진기가 청나라에 전래된 후, 서태후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지금도 우리는 서태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서제의 경우는 몰래 찍은 사진 한장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광서제는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제이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이면서도 비참하다. 1874년,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서태후는 조정대신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재첨(載湉)이 황위에 오르도록 결정한다. 그 말을 듣자 혁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 2023. 1. 5.
광서제의 죽음(1): 서태후에 유폐당한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담사동(譚嗣同), 강유위(康有爲)와 무술변법의 '삼위일체'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할 운명이 되었다. 과연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담사동은 죽임을 당하고, 강유위는 망명했으며, 홀로 남아서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된 운나쁜 광서제는 변법실패의 책임을 혼자서 지게 돈다. 사갈처럼 악독한 친이모(서태후)에게 영대(瀛臺)에 유폐되어 힘들게 10년을 살았다. 원래는 서태후가 죽으면서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미스테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가경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 외인들은 알 수 없는 사인불명이었다. 활실에 태어나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원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그는 대청을 회생시킬.. 2021. 9. 16.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2020. 1. 16.
청나라말기의 3가지 선택: 변법, 폭동, 혁명 글: 냉아봉(冷阿鋒) 대청 말기 인심이 바뀌었고, 모든 사람들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지위가 다르고,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생각은 서로 살랐다. 당시의 대청왕조도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2019.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