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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제42

계유지변(癸酉之變): 가경제 암살미수사건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10여년전에 라는 TV드라마가 있었다. 후징(胡靜), 황웨이더(黃維德), 훠쓰얜(霍思燕)이 주연을 했는데, 드라마 첫편에서 가경18년에 발생한 계유지변을 얘기한다. 화면에는 천리교(天理敎) 신자의 수가 아주 많아서, 시커멓다. 최소 천명은 넘을 것같다. 모두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비첨주벽(飛檐走壁)하며 가볍게 오문(午門)을 뚫고 들어가 대내고수(大內高手)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자막으로 가경황제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갔다고 적어놓았다. 이아거(二阿哥, 둘째황자) 민녕(旻寧)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으나, 측푸진(側福晋, 푸진은 부인이라는 뜻임)이 남장을 하고 추격병을 따돌려서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태가 평정된 후, 가경제는 심신이 피폐.. 2021. 12. 23.
점간처(粘杆處): 옹정제가 만들고, 가경제가 없앤 신비의 특무조직 글: 양우모초(样雨慕初) 이전에 의 자매편 시리즈를 볼 때, 옹정이 가장 의지하던 기구의 명칭이 '점간처'라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너무 성의없이 지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건 작가가 무신경해서라고 생각했다. 인식 속에서 고대의 각 부문의 명칭은 장엄하였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원래 '점간처'가 역사상 진짜 존재했던 것이고, 옹정제때 영향력이 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간처"라는 명칭은 겉으로 보기에 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실질적인 지하특무기관이었다. 명나라때의 동창, 서창과 금의위에 해당한다. 주요작용은 정보를 수집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이는 황제에게 적지 않은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황제가 전면적으로 조정을 장악.. 2021. 2. 9.
가경(嘉慶)연간, 좋은 인재가 많았는데 왜 점점 쇠퇴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는 아마 건륭제만이 자칭 천조상방(天朝上邦)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강건성세(康乾盛世)이후 청나라는 아주 명확하게 쇠퇴현상을 보인다. 역사의 철칙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 시간이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왕조는 거의 수백년의 기간동안 존속한다. 가경제때가 아마 흥성하다가 쇠퇴하는 기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여러번 강남을 순유하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현상이 엄중해졌다. 옹정제때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무를 보지도 않았고, 쇄국정책을 쓴다. 번성하던 대청왕조는 이때부터 이미 쇠퇴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진나라에서 모든 힘을 쏟아서 건설한 각종 도로와 성곽으로 이미 아주 견.. 2020. 11. 8.
가정제(嘉政帝)는 왜 엄숭(嚴嵩)을 중용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 2020. 6. 30.
건륭제는 왜 자질이 평범한 가경제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가경제(嘉慶帝)는 청나라의 제7대황제이다. 가경제는 청나라역사상 비교적 평범한 황제이다. 재위기간동안 특별한 업적도 없고, 그 이후부터 청나라는 쇠락기에 접어든다. 가겅제는 이처럼 평범했는데, 왜 건륭제(乾隆帝)는 그를 후계자로 삼아서 황위를 잇게 하.. 2020. 3. 3.
왜 청나라의 황후들은 곤녕궁(坤寧宮)에 거처하지 않았을까? 글: 역사순간(歷史瞬間) 항간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청나라때 황후가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은 것은 망자(亡者)의 회기(晦氣), 즉 죽은 사람의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주황후(周皇后)는 이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기실 청나라가.. 2020.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