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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56

잘못된 국가전략은 어떻게 수립되는가? 글: 사로(思芦)호타 에리(堀田江理)의 은 일본이 1941년 미국에게 선전포고하는 정책결정의 내막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진주만기습은 전술적으로 성공이지만, 전략적으로 실패였다. 잘못된 결정은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강경한 여론. 국가가 여론을 선동하다가, 여론이 국가를 압박한 것이다. 소는 꼬리를 흔들 수 있지만, 꼬리도 소를 흔들 수 있다. 둘째, 중하층 매파장교들이 추진했다. 셋째,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고, 서로 책임을 떠밀었다. 차량이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아무도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큰 배를 차라리 침몰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물에 빠져죽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세 명의 참모면 제갈량과 맞설 수 있다. 다만 잘못된 체제와 의사결정매커니.. 2024. 5. 22.
일본의 유구(琉球)왕국 병합 경위는...? 글: 양택휘(楊澤暉) 중국과 유구왕국의 교류는 역사가 길다. 유구군도(琉球群島)는 일본 규슈섬의 서남쪽에서 중국대만의 동북쪽의 사이에 크고 작은 섬 55개를 포함하고 있고, 3개의 비교적 큰 군도로 나눌 수 있다. 북부는 엄미군도(奄美群島, 일본명 아마미제도), 중부는 충승제도(冲繩諸島, 일본명 오키나와제도), 남부는 선도제도(先島諸島, 일본명 사키시마제도)이다. 유구국의 역사서 에 따르면, 수양제(隋煬帝)가 우기위(羽騎尉) 주관(朱寬)에게 명하여 다른 나라들의 풍속을 알아보라고 보냈을 때, 이곳에 도착한 적이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니 섬들이 마치 규룡(虬龍)이 큰 바다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같아서, "유구(流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을 보면 이에 대해 상세한 문자기록이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 2023. 5. 23.
제2의 청일전쟁이 일어날 것인가? 글: 심주(沈舟) 1주일동안 중공은 두번에 걸쳐 한국전쟁을 기념했다. 2차에는 많은 군인도 참가하여 마치 무슨 동원대회같았다. 시진핑은 70년전의 대미일전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핵심요소는 빠트렸다. 그때 중공군대 240만명으로 미군 33만명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공이 사용한 것은 인해전술이었고, 근본적으로 병사의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 한반도를 통일하고 점령하려 했지만, 결국은 38선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중공고위층은 소리높여 미국과 싸우겠다고 한다. 여전히 병사와 백성의 목숨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데 인해전술을 쓸 수도 없다. 아마도 전쟁형태는 주로 해전, 공중전이 될 것이다. 이는 다시 한번 100여년전의 청일전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중화민족은 아마도 다.. 2020. 10. 26.
청나라에는 왜 왜구(倭寇)가 없었을까? 글: 지역사(知歷史) 원나라 중후기부터 왜환(倭患)"은 3세기여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명나라 가정(嘉靖)연간에 40년동안 지속되고, 전화가 동남연해에 미친 '가정대왜란(嘉靖大倭亂)'이 가장 심했다. 그러나 아편전쟁이전의 청나라때 '왜환'은 조용했다. 비록 1990년대 홍콩, 대만에서 만든 .. 2020. 3. 25.
일본이 근대에 최초로 만든 6개 사단은...? 글: 수향산인(壽鄕散人) 근대에, 일본은 세습 무사제도를 폐지하고,근대화된 징병체제를 건립한다. 부대의 번호를 보면, 최초에 6개 사단을 설립한다. 이 6개사단은 6곳의 지방에서 징병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1개사단은 모두 같은 고향사람들이다. 서로간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제1.. 2019. 6. 6.
원명(元明)시기에 창궐했던 왜구(倭寇)가 청나라때 돌연 사라졌을까? 글: 원원설사(袁袁說史) 왜구를 얘기하면, 우리는 명나라와 척계광(戚繼光)을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구가 명나라때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당연히 그런 생각은 틀렸다. 왜구는 일찌기 원나라후기부터 대거 중국의 연해지구에 해를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만, 원나라장수 .. 2019.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