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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원명(元明)시기에 창궐했던 왜구(倭寇)가 청나라때 돌연 사라졌을까?

by 중은우시 2019. 5. 6.

글: 원원설사(袁袁說史)


왜구를 얘기하면, 우리는 명나라와 척계광(戚繼光)을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구가 명나라때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당연히 그런 생각은 틀렸다. 왜구는 일찌기 원나라후기부터 대거 중국의 연해지구에 해를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만, 원나라장수 유섬(劉暹)이 격퇴시켰을 뿐이다. 명나라가 건립된 후, 왜란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나 청나라에 이르러, 왜구는 출몰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긴다. 원,명 두 왕조를 괴롭힌 왜구가 왜 청왕조에 이르러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원인은 청나라에 있지 않다. 청나라때 왜란이 없어진 원인은 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이다.


첫째, 일본이 남북조(1336-1392)시기에 접어든 후, 봉건제후들이 할거하고, 서로 공격하며 권리를 다툰다. 전쟁에서 패배한 일부 남조의 봉건제후들은 무사, 상인과 낭인(浪人)을 조직하여 중국연해지구로 가서 무장밀수와 방화약탈의 해적활동을 벌인다. 이렇게 왜구가 된 것이다.


그후 일본이 전국시대(1467-1615)에 접어든 후, 왜구가 중국에 끼치는 해악이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가 건립될 때(1616-1912, 초기에는 후금이라 칭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에도막부(江戶幕府, 도쿠가와막부라고도 부른다)를 건립하고, 1615년에 일본을 통일한다.


에도막부가 일본의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사, 낭인들을 엄격히 단속하고, 왜구를 대거 타격한다. 그뿐아니라, 에도막부의 통치하에, 정국이 안정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생각해보라.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으면, 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왜구가 되겠는가? 이는 확실히 뿌리에서 왜구의 발원지를 없애버린 의미가 있다.


둘째, 그 당시, 많은 서방인들이 일본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에도막부는 국내인이 외국인과 결탁하여, 자신의 통치를 무너뜨릴까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일본판' 쇄국정책을 펼친다. 일본선박이 바다로 나가서 무역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일본인이 해외를 왕래하는 것도 금지하며, 밀항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천주교의 선교활동을 단속하고, 일본에 잠입한 선교사들을 체로하여, 천주교가 일본에서 만연되는 거을 막고, 본토종교를 보호하고자 했다. 일본으로 항해해서 오는 외국선박에 대하여도 엄밀하게 감시하며, 무역활동은 막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진행하였고, 이를 어기면 엄중하게 처벌을 받았다.


셋째,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명나라때, 중국에서 왜구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은 강소절강일대이다. 그리고 강소절강일대의 왜구는 모두 대만에서 왔다. 이들 왜구는 먼저 일본에서 대만으로 가고, 그 후에 대만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대륙을 침입한다. 그러나 대만은 정성공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대륙과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


그러므로, 대만의 왜구를 소탕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대만에서 왜구가 심하게 창궐하여, 대만은 왜구의 본거지가 된다. 1662년 정성공이 점령한 후, 왜구는 본거지를 잃게 된다. 자신들이 발판으로 삼을 땅을 잃은 것이다. 이때부터 왜구는 중국에 더이상 기반이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본고향인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때 돌연 왜구가 사라진 것이다. 원인은 청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체와 정성공에 있다. 청나라는 그저 시기를 잘 만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