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문(思文)
서한말기 하남 신야(新野)에 한 거부가 있는데, 성이 음(陰)씨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춘추전국시대의 명상 관중(管仲)의 후예라고 한다. 관중의 칠대손인 관수(管修)가 제나라에서 초나라로 가서, 음대부(陰大夫)에 봉해진다. 이때부터 '음'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한교체기에 음씨집안은 다시 신야로 옮긴다. 한선째때는 음씨집안이 큰 돈을 벌어 현지의 최고부자가 된다. 그러나, 음씨집안이 신야일대에서 유명해진 것은 그의 집안에 돈이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음씨집안에 미모가 출중한 아가씨 음려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쁘게 생겨서 그녀를 한번 본 사람이면 모두 칭찬을 아끼기 않았다. 병마황란의 시대에도 구혼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음려화는 모두 거절한다.
갱시원년(25년), 음려화는 이미 19살이 되었다. 하루는 음려화의 오빠 음식(陰識)이 그녀에게 말한다: "오늘 갱시황제의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 유수(劉秀)가 사람을 보내와서 구혼을 했다"
음려화는 7살때 부친을 잃었고, 음식은 그녀의 동부이모의 오빠였다. 장형은 부친과 같다. 음려화의 혼사를 위하여 음식은 매우 조급해 했다. 그는 계속 말한다: "많은 명문집안의 공자, 왕손귀족들을 모두 네가 마다하지 않았느냐. 그냥 좋은 집 자식들로 평생을 맡기기에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이 대장군 유수는 한나라 고황제의 자손이고, 귀인의 상을 지녔다. 나이도 서른이 되지 않았고, 이미 갱시제의 고굉지신이며, 작위가 무신후에 이르렀다. 만일 너와 배필이 되면 실로 영웅미인(英雄美人), 지조천설(地造天設)이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음려화도 시원스럽게 동의한다. 며칠 후, 유수는 사람을 시켜 빙례(聘禮)를 보내오고, 성혼의 일자를 정한다.
유수는 자가 문숙(文叔)이며 남양군 채양현(지금의 호북성 조양 서남쪽) 사람이다. 한고조 유방이 9대손이다. 부친 유흠(劉欽)은 남돈현령을 지냈는데, 유수가 9살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유수는 어려서부터 숙부 유량(劉良)의 집에서 자란다. 어렸을 때 유수는 농사짓는 것을 좋아했고, 형인 유인(劉寅)은 협의를 좋아해서, 사방의 호걸들과 사귀었다. 형의 영향을 받아, 유수도 관직에 나갈 생각을 한다. 그래서 왕망의 천봉연간에 혼자서 장안으로 가고, 왕망이 늘인 경사태학에서 공부한다. 여기서 <상서>를 배워 경학의 대의를 약간 깨치게 된다.
경사에 머무는 동안, 유수는 친히 고관대작들의 호화사치와 위풍을 본다. 한번은 그가 길거리에서 집금오(執金吾)가 바깥나들이할 때 기세가 등등한 의장대를 보고는 부러워한다. 그래서, "사관당지집금오(仕官當至執金吾)"라고 맹세한다. 유수의 누나 한 명이 신야로 시집을 갔는데, 유수도 자주 신야로 가서 놀았다. 그곳에서 그는 음려화라는 아가씨가 아주 예쁘다는 말을 듣는다. 사람들이 많이 구혼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취처당득음려화(娶妻當得陰麗華)"라고 맹세한다. 당시의 유수는 부자도 아니고, 권세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로만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왕망이 황제를 칭하고, 옛날식으로 제도를 바꾸어 사회혼란을 가중시킨다. 유씨성의 종실자제들은 각지에서 속속 거병한다. "한실부흥(漢室復興)'의 기치를 들고 정권을 다시 빼앗으려는 것이다. 유수 형제도 몸이 근질근질하여 참지 못하게 된다.
지황3년(22년), 남양에서 대기근이 발생하고, 유수의 집안에는 남는 식량이 있었다. 그리하여 완현으로 가서 곡식을 판다. 완현에는 이통(李通)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전부터 유인, 유수의 대명을 앙모했다. 그는 암암리에 유수에게 말한다. "나의 부친 견수는 점을 칠 줄 아는데, 나에게 몰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흥할 것이고, 이씨가 반드시 보좌할 것이다. 지금 사방이 어지럽고 군웅이 들고 일어나니, 참어대로 한실이 부흥할 것이다. 남양의 종실에서 오로지 당신 형제만이 이 중임을 감당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대와 함께 대사를 도모하고 싶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유수는 기뻐서 응락한다.
남양에 돌아온 후, 유수는 즉시 유인을 설득한다. 각 지방의 의사 100여명을 모아서 대계를 논의한다. 모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함께 자제병 7천명을 데리고, 유인을 우두머리로 하고, 유수가 보좌하여, 완현에서 거병한다. 이 해에 유수는 28살이다. 얼마후 유수는 사람을 보내어 남양일대에서 활동하던 신수, 평림의병을 설득하여, 하나로 합친다. 유씨형제의 명망은 금방 널리 퍼지고, 연이어 왕방의 부대를 격파하여, 10여만명으로 늘어난다.
다음 해, 전 평림군의 두목이자, 유수형제와 같은 갈래의 한나라종실인 유현(劉玄)이 황제로 추대되니 갱시제이다. 유인을 대사도(大司徒)로 삼고, 유수를 태상편장군(太常偏將軍)에 봉한다. 곤양(하남성 엽현 북쪽)의 일전에서 유수는 삼천병마를 이끌고 왕망의 주력을 돌파하고, 적의 총사령관 왕심(王尋)을 죽인다. 의병이 적은 병력으로 많은 관군을 이긴 것이다. 왕망의 사십만군마를 물리치고 대공을 세운 것이다. 곤양대첩후, 갱시군의 명망은 더욱 커지고, 각로의 부대들이 속속 귀순하여, 갱시제의 휘하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해에 유인은 신시,평림의 여러 장수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유수는 비록 비분강개했지만, 아직은 힘이 부족하여,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은인자중한다. 그리고 여전히 유현을 위하여 힘을 바친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 유현의 신임을 받게 되고, 곤양대전후 유수는 혁혁한 공로로 파로대장군이 되고, 무신후의 작위를 받는다.
고관이 되고 재산도 생기자, 유수는 예전에 했던 "취처당득음려화"의 맹세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신야의 음씨집안에 구혼하러 보낸 것이다. 이해 육월, 유수는 완성에서 정식으로 음려화와 결혼한다. 신혼의 허니문에 두 사람은 여교사칠(如膠似漆)이었다. 다만 유수는 공무가 바빠서, 더 많은 시간을 이 아리따운 부인과 보내지 못하고, 유현의 명을 받아, 음려화와 이별하고, 사례교위(司隷校尉)의 직함을 가지고 낙양으로 가서 왕궁을 짓는 것을 감독한다. 음려화는 다시 신야로 돌아가서 거주한다.
갱시원년 십월, 유수는 "행대사마사(行大司馬事)"로서 관직을 내릴 권한을 갖고, 하북으로 가서 각주군을 선위(宣慰)하게 된다. 실제로는 각지로 가서 투항을 받는 일이다. 당시 유현은 이미 낙양에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북방의 유씨종실사람들은 아직 유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북의 유씨종실간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유수일행이 한단에 도착했을 때, 거기는 이미 고 조무왕(趙繆王)의 아들인 유림(劉林)이 한성제 유오의 아들 유자여를 사칭하여 황제에 올라 있었다. 유림은 남방에서 파견되어 온 유수를 체포하도록 명을 내리고, 유수의 목에 십만호를 현상으로 건다. 유수는 할 수 없이 수행인원을 데리고 도망친다. 먼저 계주에 도착하고, 다시 신도로 간다. 가는 길에 계속 추격병이 뒤따르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아주 낭패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창성사람 유식(劉植)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유식도 유씨종실이다. 수만의 병력을 모아 신도성을 차지하고 지키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유수의 대명을 앙모해왔고, 귀순할 생각이었다. 유수는 유식을 효기장군에 봉하고, 신도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하북에서 유림정권과 대항한다. 하북의 많은 군현이 갱시정권에 호응한다. 오로지 진정공왕(眞定恭王) 유양(劉揚)이 10만을 이끌고 북방유씨세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유수에 귀순할 생각이 없었다.
하루는 유수가 고민하고 있을 때, 유식이 들어온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공왕과 일면지교가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가서 세치 혀로 유양을 대사마의 휘하로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유수는 반신반의하며 그를 보내봤다.
며칠이 지나서, 유식이 돌아왔다. 그는 웃는 얼굴로 유수에게 말한다. "대사마 축하합니다. 진정공왕 유양도 이미 귀순할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사마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나보고 중매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유수는 놀라면서도 기뻤다. 그러나, 결혼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유식이 말한다. 유양에게는 외조카딸이 있는데, 단정하게 생겼고, 책을 읽었고 이치에도 밝았다. 유수가 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유양은 외조카딸을 유수와 결혼시키고자 한 것이다. 유수가 이를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면 음려화의 은혜에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생각한다. 유양은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어, 무시할 수가 없다. 만일 이 혼사에 동의한다면, 유양을 이용하여 유림의 세력을 없애고 하북을 평정할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이를 승락한다.
다음 날, 유수가 제대로 차려입고, 수행인원과 빙례를 가지고, 친히 진정의 공왕부로 간다. 유양이 성문을 크게 열고 맞이한다. 유수는 과연 용모가 당당했고, 기우가 헌앙했다. 그후 황도길일을 택하여, 유양은 외조카딸 곽성통(郭聖通)을 유수와 결혼시킨다. 유수는 두번째 결혼이다. 곽성통과 아침저녁으로 함께 하며, 서로 사랑하며 지낸다. 음려화는 잊어버렸다.
유양의 부친 유보(劉普)는 한경제의 7대손이고, 진정공왕을 세습했다. 유보는 일남일녀를 낳았는데, 딸이 바로 곽성통이 모친이고, 유양의 누나이다. 곽성통의 부친 곽창(郭昌)은 진정일대의 유명한 대지주이고, 현명하기로 유명했다. 일찌기 백만에 이르는 전답과 재산을 동부이모형제에게 양보한다. 곽창은 군주(郡主)와 결혼하여, 곽가는 더더욱 하북의 유명한 명문집안이 된다. 재산도 있고, 권세도 있으며, 게다가 유양의 십여만 인마도 가졌다. 이렇게 하여 곽성통을 부인으로 맞이한 유수는 천하를 얻는데 견실한 기초를 가지게 된다.
갱시2년(24년) 삼월, 전쟁이 불길이 신야로 불어왔다. 유수의 신혼처인 음려화는 가족과 함께 외지로 도망친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날로 그리워하는 영웅남편이 이때 곽성통과 다시 결혼했을 줄은.
동한 광무제 건무2년은 유수가 황제에 즉위한 다음 해이다. 낙양을 수도로 정한 후, 유수는 궁전을 새로 수선하고, 시중 부준(傅駿)을 신야로 보내어 음려화를 맞이해 오게 한다. 부부는 헤어진지 3년만에 다시 만났다. 유수는 이미 천하를 가지고 있었고, 예전과는 달랐다. 더더욱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곽씨와 음씨는 동시에 귀인(貴人)에 봉해지고 서로 아래위가 없게 된다.
오월이 되어, 군신들이 황후를 세우도록 청한다. 유수는 이제 골치가 아파진다. 명목상으로 그는 음씨와 곽씨를 모두 정실부인으로 취했다. 그러나, 황후는 오직 한 사람만 세울 수 있다. 누구를 세울 것인가? 만일 이전의 법도에 따르면, 원부인을 세우거나 혹은 황장자를 낳은 후궁을 세운다. 그렇다면 음려화는 원부인이므로 황후로 올려야 하고, 곽성통은 유수와의 사이에 장남 유강(劉疆)을 낳았으므로 황후로 세워야 한다. 만일 유수 본인의 총애를 기준으로 한다면 광무제 유수는 음귀인을 더 좋아했다.
다만, 하나의 중대한 정치적 원인이 유수의 황후선택의 저울에서 부득이 곽성통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게 된다. 원래, 바로 이 해 봄에 진정공왕 유양 즉 곽성통의 외삼촌은 광무제의 배신위약(당초 유수는 유양의 병력을 빌어 유림을 공격할 때, 나중에 유양을 황제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에 불만을 가지고 하북에서 모반을 일으킨다. 유수는 장군 경순(耿純)을 보내어 계책을 세워 유양과 두 형제를 주살하고, 진정을 수복한다. 그후,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써서 유양의 아들 유덕을 진정왕에 봉한다. 곽귀인이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죄인의 친척으로 그 지위는 어쨌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유수는 이런 때일 수록 곽귀인을 더욱 후하게 대한다. 이를 통하여 은덕과 관용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곽씨배후의 북방유씨세력을 회유하고자 한다. 당시의 유수 정권은 아직 유수에 귀순하지 않고 북방할거지역에서 웅거하고 있는 유씨종실이 남아 있고, 조정안에도 북방유씨세력을 대표하는 문무대신들도 있었다. 과연 대신의 논의하에, 두 파로 의견이 나뉜다. 남양집단은 음려화를 세우는데 찬성하고, 북방집단은 곽성통을 세우기를 바란다.
정치적 이익과 개인의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유수는 조서를 내려, 곽귀인을 황후로 책봉한다. 아들 유강은 황태자가 된다. 조서를 다 읽은 후 신하들은 의외라고 여긴다. 황제가 음귀인을 총애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무제의 관후한 성덕지군이라고 더욱 칭송했다.
황후책립후, 유수는 음귀인을 더욱 총애한다. 매번 출정할 때마다 음귀인을 곁에 데리고 다녔다. 음귀인이 낳은 큰아들 유양(劉陽)은 출정도중에 분만한 것이다.
건무15년(39년), 유수는 각 주군에 호구와 개간한 전답수를 조사한다. 각 주군의 자사들, 태수들은 속속 사실대로 보고한다. 오직 진류군(치소는 지금의 개봉시 동남쪽)은 보고서에 쪽지를 하나 끼워서 올린다. 그 위에는 두 마디가 적혀 있었다: "영천, 홍농은 물어볼 수 있지만, 하남, 남양은 물을 수 없다." 그 의미는 황제가 하남과 남양 일대의 호구, 전답수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광무제는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수에게 이 쪽지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었다. 태수는 길거리에서 주웠다고 했다. 광무제는 도참으로 생각했다. 이때 곁에 있던 황자 유양은 무슨 뜻인지 알고는, 말을 올린다:
"하남은 폐하가 거처하던 성입니다. 가까운 신하가 많습니다; 남양은 폐하의 고향입니다. 역시 가까운 친척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답, 호구의 수량이 대량으로 초과합니다. 그러니 폐하가 너무 상세하게 묻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광무제가 그 말을 듣고는 이치에 맞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과연 고관대작의 일족들이 인정세와 전무세를 피하기 위하여, 인구와 전답수를 숨겼으며, 황제가 조사할까 겁이 나서 도참을 날조하여, 황제를 속이고자 한 것이다. 이 일을 통하여, 광무제는 유양이 치국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여 황태자를 너무 일찍 세운 것에 후회하게 된다.
광무제는 음귀인과 황자 유양을 총애했다. 항상 곽황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교양이 있더라도 투기를 피할 수는 없다. 두려움도 피할 수 없다. 일단 투기지심이 일어나자 원망의 말을 하게 되어, 광무제는 화를 내게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계속 다투게 된다.
사실, 이 때, 곽성통의 황후지위는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다. 곽성통이 좀더 똑똑했더라면, 꾹 참고 견뎠을 것이고, 조심하고 근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가출신의 곽성통은 어릴 때부터 귀여움만 받고 자랐다. 오히려 유수에 대하여는 차갑고 비웃는 태도를 취하여 유수가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된다. 더욱 안타깝게도 이때의 곽황후는 이미 정치적 배경이 사라졌다. 북방의 유씨집단은 일찌감치 정복될 자는 정복되고, 귀순할 자는 귀순했다. 유수는 이미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해줄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건무17년(41년) 십월이 되어, 유수가 돌연 조서를 반포한다. 곽황후는 "여러번 명령을 위반하고, 여치, 곽성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음귀인의 공손하고 근검절약하며 덕이 있음을 칭찬한다.
조서가 나가자, 곽성통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아니라, 조정대신들도 돌연하다고 느낀다. 황제는 이미 결정했다. 누가 감히 황제에게 명을 거두라고 권하겠는가? 곽성통은 그저 새수(璽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십육년동안 머물던 중궁을 가슴아픈 마음으로 떠나, 별원으로 옮겨 거주한다.
유수는 비록 곽황후를 폐위시켰지만, 그는 황태자 유강을 폐위시키지는 않았다. 곽성통이 낳은 둘째아들 유보(劉輔)를 중산왕으로 봉한다. 그리고 곽성통을 "중산왕태후(中山王太后)"의 직위를 내려 우대해준다. 그래서 이 폐위된 황후의 처지는 전대의 그 어느 폐위된 황후들보다 운이 좋았다. 이뿐아니라, 유수는 곽성통의 친가에 은혜를 더욱 베풀어, 곽성통의 남동생 곽황(郭況)을 양안후(陽安侯)로 봉하고 대홍려(大鴻臚, 구경의 하나)로 승진시킨다. 다른 당형, 당제들도 모두 제후에 봉한다. 그후 광무제는 친히 곽황의 집으로 가서 공경제후들과 모임을 가지고, 연회를 베풀었고, 금전, 옥백을 무수히 하사했다. 장안의 관민들은 곽황의 집을 '금혈(金穴)'이라고 불렀다. 건무26년(50년), 곽성통의 모친이 병사한다. 광무제는 문무백관을 이끌고 친히 장례에 참석한다. 이미 고인이 된 곽성통의 부친을 양안후에 봉하고, 곽창의 유해를 진정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곽성통의 모친과 합장한다.
2년이 지난 건무28년, 곽성통은 우울하게 죽는다. 광무제는 그녀를 융중하게 장례지내준다. 그리고 곽성통과 생전의 부부의 정을 생각하여, 자신의 넷째딸 육양공주를 곽황의 아들 곽황에게 시집보낸다. 하사품을 내릴 때는 음가와 곽가를 같이 해주고, 곽가는 여전히 곽황후가 살아있을 대의 은혜를 누린다.
유수의 이런 조치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해를 잘 하지 못했다. 이처럼 곽가를 후대하면서 왜 곽황후를 폐위시켰을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유수는 음씨와 곽씨에게 모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한쪽을 후하게 하고 어느 한 쪽을 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후를 돌아가며 하게 한 것이다. 곽황후를 폐위시킨 후에도 곽가를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수는 내심으로 음려화를 더욱 좋아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음려화와 백년해로했다. 거꾸로 곽성통을 후대한 것은 그이 일관된 허위적인 일처리방식이다. '이유도치천하(以柔道治天下)'로 유명하고, 이를 통하여 '현군(賢君)'의 명성을 얻고자 한다.
유수가 곽황후를 폐위하고, 태자 유강은 앉으나 서나 불안했다. 당시 질운(郅恽)이라는 이름의 전중시랑은 유강에게 이렇게 일러준다: "당신의 지위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스스로 태자의 지위를 내놓는 것이 낳겠다. 그후에 모친을 봉양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좋겠다." 유강은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부친에게 태자위를 내놓겠다고 말한다. 유수는 짐짓 요청을 거절한다. 유강은 부친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다른 훈척대신에게 부탁하여 그를 대신하여 재삼 요청하게 한다. 유수는 그제서야 받아들인다. 건무19년(43년), 유수는 조서를 내려, 유양을 황태자로 삼는다. 유강은 동해왕으로 봉한다. 그리고 유양이 "숭집겸퇴(崇執謙退)"하였다고 칭찬한다.
음려화가 황후가 된 후, 여전히 결신자호(潔身自好)의 품성을 유지하였다. 샤서에서는 그녀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황후가 재위할 때, 공손하고 검소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웃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웠으며 긍지가 있었다." 건무중원2년(57년) 유수가 죽는다. 황태자 유장(劉庄, 유양이 유장으로 개명했다)이 즉위하고, 음려화는 황태후가 된다. 그녀는 명제 영평7년에 죽으니, 향년 60세이다. 그녀는 죽은 후 광무제 유수와 원릉에 합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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