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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무제)

유수(劉秀): 그는 어떻게 농민에서 황제로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1. 5. 9.

 

 

: 정계진(丁啓陣)

 

한나라때 유씨황족에 기인(奇人)이 나타난다.

 

만일 왕망의 찬탈이 없고, 난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고조의 9대손 유수는 일생동안 아마도 약간의 학문을 지니고, 열심히 일하는 농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풍속최미(風俗最美)”, “유학최성(儒學最盛)”(양계촉 한 말이다)의 동한왕조를 창시한 광무제(光武帝) 유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고,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후한서. 광무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수의 나이 9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고, 그는 숙부인 유량(劉良)에 의하여 부양된다. 어른이 된 후, 유수는 키가 칠척삼촌에 이르고 미목이 청수하며, 입은 크고 코는 높은 미남자가 된다. 청년시대의 유수는 농사를 짓는데 근면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형인 유연(劉縯, 劉伯升)과 전혀 달랐다. 유연은 호협양사(好俠養士)”했고, 창이나 무기를 잘 다뤘다. 그리고 호협지사들과 널리 어울렸다. 그리하여, 유수는 형으로부터 비웃음을 많이 받았다. 유연은 그가 한고조 유방의 둘째형과 닮았다고 했다. 그저 머리를 쳐박고 농사만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량의 집안환경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같다. 조카들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그리하여 유수는 왕망의 천봉연간(기원후14-19), 장안으로 가서 대부 허자위(許子威) <상서(尙書)>강좌를 들어 대강의 뜻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공부하는 기간동안 돈이 없어서, ()씨성의 다른 학생과 함께 모려(毛驢)를 한 마리 사서, 시종을 시켜 임대하게 하여 그 임대료로 학비를 냈다. 이를 보면 유수는 그저 무지렁이 농민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날이 맑으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면 책을 읽는 시골생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유수가 나중에 황제가 된 것은 본가의 여자어른들에게도 의외의 일이었다. 광무제 건무17(기원후41) 십월 유수는 고향에서 제사행사를 거행한 후, 술을 내리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동네사람들에게 즐기게 한다. 유씨가족의 몇 명 여자어른들이 술을 마신 후 흥분하여 같이 얘기를 한다: “문숙(文叔, 유수의 자)이 어렸을 때 근면신중하고 성실하며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몰랐다. 그저 솔직하고 온순했다. 오늘날 이런 인물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유수가 그 말을 들은 후, 크게 웃으며 말한다. “나는 천하를 다르리는데, 온순한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논어.태백편>에 증자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적혀 있다. “사불가이불홍의(士不可以不弘毅) 임중이도원(任重而道遠)” 여기서 ()’에 대하여 장태염은 그 글자가 ()’ 성인 것을 들어 ()’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자의 본 뜻은 역시 넓다는 의미이다. ‘는 굳건하다는 뜻이다. 이를 합쳐보면, ‘홍의라는 것은 관후능용(寬厚能容),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뜻이다. 사람의 품성으로 말하자면 역대제왕중 동한의 광무제 유수가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다.

 

유수의 관용은 청년시대에 이미 마을에서 이름났었다. 왕망의 지황3(기원21), 유연은 무리를 모아 거병하여 왕망정권에 반항하는 길에 들어선다. 처음에, 친족자제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자신도 연좌될까봐 겁을 먹은 것이다. 그리하여 곳곳으로 도망쳐 숨어서, “백승이 우리를 죽이려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런데 유수도 강의대관(絳衣大冠)’의 장군복장을 하고 나타나자, 모두 놀랐고, “근신충후하던 그까지도 나섰구나라고 생각하며 점차 안정되었다고 한다.

 

유수의 관후함은 주로 황제가 된 후에 취한 노비,죄수의 석방조치, 박장과 근검절약을 제창한 것, 부세를 경감한 일, 전공을 세우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 일등 일련의 조치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사항은 역사교과서에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단지 두 가지 사례를 들고자 한다: 사례의 하나. 유수가 황제에 오른 그해 구월, 적미군이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경시제 유현은 황급히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처자식은 의복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하고 도로에 나앉았다. 유수는 동정을 표시하며 명을 내린다: “유현은 회양왕에 봉하고, 수하관리들 중에서 누구든지 그를 해치는 자가 있으면 대역죄와 같이 처리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유현이 유수에 어떻게 대했는지. 그는 형을 죽인 원수중 한 명이다. 유연은 유현의 손에 죽었다. 유헌은 나중에 적미군에 의하여 피살된다. 사례의 둘. 건무십일년 이월, 조서를 반포한다: “천지의 본성은 사람을 귀하에 여기는 것이다. 노비를 죽이는 것은 죄를 감해주지 않는다.” 같은 해 팔월, 다시 조서를 반포한다: “감히 노비를 불로 지지면 형률로 다스리고 불로 지져진자는 서인으로 한다그는 서민백성을 보호하는데 아주 세심했다.

 

유수의 관후함은 그가 처첩을 대하는데서도 나타난다. 곽황후(郭皇后)는 총애를 다투다가 원한을 품어서 결국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된다. 그러나, 유수는 다른 황제들처럼 그녀를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 중산왕태후(中山王太后)로 강등시켰을 뿐이다. 그녀의 친척에 대하여도 타격을 가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우대해준다. 예를 들어, 그녀가 낳은 아들중 우익공 유보(劉輔)를 중산왕에 봉하고, 상산군을 중산국에 귀속시켜준다. 그녀의 오빠인 곽황(郭況)은 안양후에 봉해진다. 당형 곽경(郭竟)은 전투에 공이 있어 기도위에서 신처후(新郪侯)에 봉해지고, 관직은 동해상(東海相)이 된다; 곽경의 동생 곽광(郭匡)은 발간후(發干侯)에 봉해지고 관직은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른다. 곽황은 나중에 대홍려(大鴻臚)에 이른다. 유수는 여러 번 그의 집으로 가서, 금전과 겸백을 무수히 하사하다. 당시 경성 사람들은 곽황의 집을 금혈(金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녀의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유수는 백관을 이끌고 가서 문상을 한다.

 

사실, 곽씨가 총애를 잃은 것은 유수가 희신염구(喜新厭舊)해서가 아니다. 유수가 사랑한 여인은 곽씨보다 먼저 취한 처인 남양 신야의 미인 음려화(陰麗華)였다. 유수는 일찍이 남양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음려화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다. 나중에 장안으로 와서, 집금오가 아주 위풍당당한 것을 보고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사신당작집금오(仕臣當作執金吾)

취처당득음려화(娶妻當得陰麗華)

 

벼슬을 하려면 집금오를 해야 하고

처를 취하려면 음려화를 얻어야 한다.

 

유수가 음려화를 취한 것은 갱시원년(기원23) 유월이다. 그리고, 곽성통(郭聖通)을 취한 것은 갱시2년 봄이다. 유수가 황제에 오른 후, 원래는 아성관인(雅性寬仁)’한 음려화를 황후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음려화는 곽씨가 아들을 않았고, 자신은 당시에 아들을 아직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극력 사양한다. 그렇게 하여 곽씨가 황후에 오른다. 음려화는 유수의 첫사랑이었을 뿐아니라, 그의 평생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유수의 마음 속에 음려화의 지위는 시종 누구도 따를 수 업섰다. 곽씨가 음려화와 총애를 다툰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유수의 견의(堅毅)한 성격은 그가 왕망에 반란을 일으킨 과정에서 위급한 순간에 잘 드러났다. 갱시원년, 곤양 일대에 왕명이 대사도 왕심, 대사공 왕읍에게 장병 백만, 갑사 사십이만명을 파견한다. 나중에 엄우, 진무의 군대와도 회합한다. 그러나 유수이 수하는 불과 수천의 병졸이었다. 양식과 건초도 심각하게 부족했다. 대군이 밀려오자, 장군들은 속속 곤앙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두려움에 떨고 처자식을 걱정한다.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도망칠 생각만 한다. 이때 유수는 냉정하게 형세를 분석한 후, 한 가지 출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동심담공거공명(同心膽共擧功名)”이고 처자재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오늘 만일 적을 이기면, 보물이 만배이고, 큰 공을 이룬다; 만일 패배하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무슨 재물이 남겠는가?” 마침내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유수의 교묘한 안배와 용감한 돌격으로 적 수십급을 베는 작은 승리를 거둔다. 수하장병들이 모두 기뻐한다. 유수에 대하여 평생 작은 적은 겁을 내더니, 큰 적을 만나서는 용감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앞에서 돌진했고,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하면서도 자신감을 얻었다. 유수를 따라서 전투하고싶어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물리친다. 왕망의 대군을 궤멸시킨다. 왕읍, 엄우, 진무는 병졸의 시체를 밟고서 겨우겨우 강을 넘어 도망친다.

 

곤양대첩이후, 유수는 다시 영양을 공격한다. 불행한 것은 이 시기에, 형인 유연이 유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유수는 자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군대를 몰아가서 죄를 묻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완성으로 가서 유현에게 사죄한다. 유연의 부하들이 그를 영접할 때, 유수는 그들과 몰래 얘기하지도 않았다. 일관되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곤양의 공로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형을 위하여 상복도 입지 못하고, 식사나 이야기도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이렇게 하자 갱시제 유현이 부끄러워 하고, 유수를 파로대장군으로 삼고, 무신후에 봉한다. 유수는 이를 꾹 참고 도광양회하였으니 절대일류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한말기, 왕망이 찬탈한 후, 제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영웅들이 나타나 왕과 패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과강지즉(過江之)만큼 많아진다. 유수는 일개 평민에서 십여년의 전투를 거쳐 천하를 통일하고 근이백년간 지속된 왕조를 열 수 있었다. 유수를 중흥지군이라고 부른다면, 중국역사상 다른 중흥지군중 어느 누구도 그와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유수의 성공비결은 그의 사람됨이 관후하고, 견의했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