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만풍모우(晩風暮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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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는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 왕망이 황위를 찬탈한 후, 그의 국사(國師)인 유흠(劉歆)은 어느 날 <적복부(赤伏符)>라는 기서(奇書)를 보고 한 마다 참어를 추산해 낸다: "유수발병포부도(劉秀發兵捕不道), 사이운집용투야(四夷雲集龍鬪野), 사칠염제화위주(四七炎際火爲主)"
참어는 장래에 '유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흠은 이름을 유수로 개명하고, 왕망을 암살하고 그 자리를 차리하려 모의한다. 그러나 일이 들통나서 자살로 끝이 난다.
그리고 서문군혜(西門君惠)라는 도사는 이 참어를 굳게 믿었다. 그는 왕망에게 처형될 때, 둘러싸고 있던 백성들에게 유수가 장래 황제에 오른다고 소리쳤다.
몇년 후, 유수라는 젊은이가 참어에 나온 대로 황제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광무제 유수이다.
그리하여, 이 참어는 "사상최고의 참어"라는 평을 듣는다.
이 참어는 확실히 역사상 존재했다. 그러나 전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신기한 것은 아니다. 참어는 유흠 혹은 그의 일당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참어가 나올 때, 유흠은 일찌감치 유수로 개명해 있었다.
2
유흠이 참어때문에 개명했다는 것은 할 일없는 사람이 견강부회하여 만들어낸 억측이다. 기실, 고대의 피휘(避諱) 제도만 이해한다면 가볍게 이 유언비어의 헛점을 알아낼 수 있다.
고대에, 제왕, 성형, 윗사람의 이름에 대하여 직접 얘기하거나 쓰는 것을 피했고, 이를 통해 존경을 나타냈다. "춘추는 위존자휘(爲尊者諱), 위친자휘(爲親者諱), 위현자휘(爲賢者諱)"한다는 것이다.
서한때 제왕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하여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개명해야 했고, 조정에서 지정한 다른 문자로 대체해야 했다. 이미 죽은지 여러해가 지난 고인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사서와 문헌기록에서는 모두 이름을 고쳤다.
예를 들어,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 등극한 후, 전항(田恒)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신은 전상(田常)으로 고쳐야 했다; 다시 그 이름도 유명한 한무제 유철(劉徹)이 즉위한 후에는 한나라의 작위인 철후(徹侯)를 열후(列侯)로 고친다. 문건에서 진말한초에 살았고, 일찌감치 사망한 괴철(蒯徹)조차도 괴통(蒯通)으로 이름을 고친다. 괴통은 한신의 모사이고, 한신이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일찌기 그에게 스스로 왕이 되어, 초한과 삼분천하라고 권했던 인물이다.
한명제는 이름이 유장(劉莊)이다. 피휘를 위하여 '莊'자는 '嚴'자로 고치게 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한나라때 수백년전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마저도 엄주(嚴周) 혹은 엄자(嚴子)로 고쳐불렀다.
황제뿐아니라 많은 외척의 이름도 피휘해야 했다. 예를 들어, 한원제의 장인은 왕금(王禁)이었는데, 당시에는 '금중(禁中)'을 '성중(省中)'이라고 불러야 했다.
자신의 가족 윗어른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피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중 '시귀(詩鬼)'로 불리는 이하(李賀)는 부친의 이름이 이진숙(李晋肅)이었다. 부친의 이름에 들어 있는 '진(晋)'은 진사(進士)의 '진(進)'과 동음이다. 이것도 피휘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하는 과거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우울하게 뜻을 펴지 못했던 이하는 27세에 죽고 만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에는 완벽하고 효과적인 피휘제도가 있었다. 누구도 이 피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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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의 이름의 '흠(歆)'자는 한애제(漢哀帝) 유흔(劉欣)의 이름중 흔(欣)자와 발음이 같다. 자연히 피휘해야 한다. 한애제는 완화2년(기원전7년)에 등극했고, 다음해에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고친다. 그래서 유흠이 유수로 이름을 고친 것은 완화2년 혹은 건평원년(기원전6년)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흠이 왕망이 건립한 '신조(新朝)'때 참어로 이름을 유수로 고쳤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유흠이 개명하기 전에, 한애제의 조모인 부태후(傅太后)와 정황후(丁皇后)의 가족이 득세했다. 왕망은 파직된 후 봉지(封地)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문을 걸어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동안 가노(家奴)를 죽인 차남 왕획(王獲)을 죽여서, 세상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왕망이 파직된 거이 억울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속속 그가 다시 관직에 복귀하기를 청했다. 그리하여 한애제는 다시 왕망을 경성으로 불러 왕태후(王太后)를 모시게 한다.
이때의 왕망은 실업저조기였다. 그러나 위장을 아주 잘 했다. 자신에게 겸공검양(謙恭儉讓), 예현하사(禮賢下士)의 현인 이미지를 십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조야에 칭찬이 자자했다.
왕망은 당시 '현인(賢人)'이라는 광망을 안고 있었고 아직은 절국(竊國)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도(不道)'라는 폄의사(貶義詞)는 그 당시 왕망에게는 절대 쓸 수 없는 말이다.
한애제가 죽은 후, 왕망은 비로소 기회를 잡아 조정대권을 장악하고, 한나라를 대체하여 신왕조를 세운다. 연호를 '시건국(始建國)'이라 한다. 그후 신정을 추진하였으나 왕망의 개혁은 실패하고 천하가 대란에 빠진다. 이때 그를 '부도'라고 칭하는 것은 명실상부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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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개혁이 실패한 후, 민심은 한(漢)왕조를 그리워했다. 정명한 유흠은 민심의 방향을 읽고 일당들과 함께 "유수발병포부도"라는 참어를 만들어 낸다. 미래천자의 이름을 직접 자기의 이름으로 적은 것이다. 이를 통해 천명을 자신이 받았고, 왕망을 대체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려 했다.
기실, 유흠과 왕망의 관계는 계속 아주 좋았다. 한나라 말년에 왕망은 일찌기 조정에 유흠을 천거한 바 있다. 신조가 건립된 후, 유흠은 더욱 중용되어 혁혁한 인물이 된다.
다만, 유흠은 왕망의 개혁에 대하여 이견이 있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왕망의 개혁이 실패한 후, 원성이 비등해지자 유흠은 왕망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유흠의 신경을 써서 만들어낸 참어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적극적인 작용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런 결말은 아마도 그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참어를 나중에 한왕조종실인 남양 유수가 이용한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천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극력 선전한다.
유흠이 유수로 개명할 때, 광무제 유수는 겨우 1,2살이었다.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다. 신조때 유수는 장안에서 공부를 했고, 채소공(蔡少公)이라는 학우가 유수에게 이 참어를 말해준다. 그리고 참어에 나오는 유수는 바로 국사 유수(유흠)라고 말해준다. 유수는 그 말을 듣고 호기있게 소리쳤다: "네가 어찌 이 유수가 나를 가리키는게 아니라고 하느냐."
유수가 하북을 평정한 후, 전후로 누군가 <적복부>, <적복문(赤伏文)>등 '천서(天書)'를 바친다. 천서에는 "유수발병포부도, 묘금수덕위천자(卯金修德爲天子)"라고 되어 있었다. 명확하게 유수가 천자에 오른다고 한 것이다. 나중에 유수는 과연 군웅을 물리치고 동한의 개국황제가 된다.
광무제 유수는 참어를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참어는 그의 거병과 천하를 얻는데 적지 않은 고무작용을 했을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소위 '사상최고의 참어'는 유흠이 정치적 야심을 위하여 날조해낸 것이다. 그런데 광무제 유수가 성공하는데 이용되었다. 두 명의 유수가 있었다는 우연을 가지고 한 할일없는 사람이 견강부회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네티즌들을 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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