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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105

한명제(漢明帝)의 다섯째 아들인 유달(劉炟)은 어떻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을까? 글: 이대규(李大奎) ​ 동한(東漢)왕조에는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마황후, 등황후, 염황후, 양황후는 모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책봉된 황태자는 많은 경우 폐출되었다. 예를 들어, 동해왕(東海王) 유강(劉疆), 청하왕(淸河王 劉慶), 제음왕(濟陰王) 유보(劉保)등. 그리하여, 번왕이나 그 후손들이 여러가지 기연이 합쳐지면서 황위를 계승하는 일도 벌어졌다. ​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과 가귀인(賈貴人) 사이에 태어난 다섯째 아들 유달(劉炟)도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어떻게 황위를 승계할 수 있었고, 역사에 위업을 남길 수 있었을까? ​ 유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황후가 맡아기르다. ​ 기원56년에 출생한 황자 유달은 적출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4명의 형이.. 2024. 1. 30.
김일제(金日磾): 한무제는 임종때 왜 흉노왕자인 그를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삼았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왕자로서 한나라에서 아주 잘 지냈다. 심지어 보정대신까지 지냈는데, 그 근본원인은 한무제(漢武帝)의 신임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비록 흉노왕자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무제의 곁에서 함께 자랐다. 흉노인이라는 신분외에 한무제에 있어서는 총신(寵臣)으로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게다다 한무제의 임종전에 한나라에는 복잡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래서 결국, 김일제가 보정대신이 되어, 한무제가 죽은 후, 한소제(漢昭帝)시대의 '사대천왕(四大天王)'중 한명이 된다. 당연히 이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한무제시대와 관련된 여러가지 역사적 원인이 있다. 이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단하게 김일제가 어떻게 하여.. 2023. 7. 4.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 이야기 글: 우서한독(友書閑讀) 사마상여가 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자 첩(妾)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인 탁문군(卓文君)에게 편지를 보낸다: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百千萬". 총명한 탁문군은 이 편지를 보고, 즉시 남편의 뜻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시를 한수 써서 남편에게 보낸다. 사마상여는 그 편지를 읽고 첩을 들이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우리는 이전에 역사상 첫번째 여성시인 허목부인(許穆夫人)은 비록 재능이 출중했지만, 남자들에 못지 않은 집안과 나라에 대한 감정을 가졌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도 정략결혼의 도구가 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역사의 기나긴 흐름 속에서 얼마나 많은 홍수형향(紅袖馨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매몰되었던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겨우 이름정.. 2023. 4. 17.
상관씨(上官氏): 6살에 황후, 15살에 태후, 40살에 태황태후가 된 여인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상관씨는 명문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상관걸(上官桀)이고, 외할아버지는 대장군 겸 대사마 곽광(霍光)이다. 곽광은 곽거병(霍去病)의 동생으로 조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인물이다. 그와 상관걸은 모두 한무제때의 중신으로, 한무제의 탁고를 받아 나이어린 한소제(漢昭帝)를 보좌했다. 이런 할아버지를 두었으니 상관씨의 일생은 당연히 평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딸을 궁으로 보내기 위해, 상관씨의 부친인 상관안(上官安)은 한소제를 어릴 때부터 길러준 한소제의 유일한 누나인 악읍장공주(鄂邑長公主)를 찾아가서, 과부로 지내는 장공주의 애인 "정외인(丁外人)"의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악읍장공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상관씨를 한소제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성공한다. .. 2023. 1. 10.
한성제(漢成帝) 유오(劉驁)는 어떻게 죽었을까? 글: 진령신(陳令申) 한성제 유오는 한원제(漢元帝) 유석(劉奭)의 장남으로 서한의 제9대황제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색채의 황제중 하나이고, 가장 호색한 황제중 하나이며, 남총(男寵) 장방(張放)을 좋아했던 황제이기도 하다. 그와의 사이에는 "단수(斷袖, 한애제가 동공과 함께 자다가 먼저 깼는데, 소매가 동공에게 깔려 있어서, 소매를 빼면 장방이 깰까봐 소매를 잘랐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동성애를 의미한다)"의 성향이 있어 후세의 욕을 먹는다. 한성제는 26년간 재위했고, 정무는 돌보지 않았으며, 주색에 빠져 지냈고, 혼용무도(昏庸無道)했고, 외척을 관리로 등용했다. 그리하여, 서한왕조는 위기에 빠지고 갈수록 위험해진다. 동시에 서한왕조의 멸망에 화근을 심은 셈이 ㅣ된다. 그는 역사상 '황음호색.. 2022. 3. 19.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왜 동생 유항(劉恒)에게 황위가 넘어갔을까? 글: 조문사(朝文社) 한혜제 유영이 재위하던 기간동안 비록 명목상으로 황제였지만, 사실상 권력자는 모친인 여후(呂后)였다. 유영이 사망한 후, 전소제(前少帝) 유공(劉恭), 후소제(後少帝) 유홍(劉弘)이 전후로 즉위한다. 비록 이들 둘은 허수아비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황제에 오르긴 한다. 사료에 따르면, "밤에, 각각 사람을 나누어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상산왕(常山王)과 소제(少帝)를 자택에서 주살했다." 바꾸어 말하면, 유영의 6명 아들 중에서, 2명은 황제에 올랐다. 전소제 유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반여집단(反呂集團)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에는 반여집단의 진평(陳平), 주발(周勃)등의 옹립하에,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왜 유영의 남은 .. 2020. 11. 25.
평민 유수(劉秀)는 황제에 오르면서 왜 "한(漢)"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썼을까? 글: 심야요재(深夜聊齋) 한(漢)나라는 전후로 400년간 지속되는데, 둘로 나뉜다: 서한(西漢)과 동한(東漢). 나중의 북송(北宋), 남송(南宋)과는 달리, 서한과 동한의 사이는 끊어져 있다. 중간에 왕망(王莽)의 신(新)왕조가 있었다. 다만, 한동안 '신'왕조는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왕망은 황위를 찬탈한 인물로 덕이 없다고 여겨져서, 왕조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왕조의 중후기 당시의 사회 각계층에도 한왕조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비교적 두드러진 것은 유씨종실(劉氏) 종실의 인물들 중에서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비록 그 중 대부분은 가짜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한무제의 증손자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한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였.. 2020. 6. 11.
서한(西漢)에는 왜 재혼한 황후가 많았을까? 글: 진사황(秦四晃) 열심히 고증해본 것은 아니고 개인의 유한한 학문으로 추측해보면, 우리의 진,한 심지어 그 이전시기에는 남녀 및 혼인관계가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것같다. 예를 들어, 진시황 영정의 모친 조희(趙姬)는 여불위, 남편인 자초(子楚), 그리고 노애(嫪毐)와의 사이에 자식.. 2020. 1. 13.
곽광 vs 상홍양: 한무제의 두 탁고대신은 왜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그때는 염철회의 대변론 후의 다음 해였다. 즉 한소제 원봉원년(기원전80년) 구월, 잘나가던 상홍양(桑弘羊)은 시종 자신의 경력과 공로가 모두 곽광(霍光)보다 위라고 여긴다. 그런데, 정치적인 지위는 곽광보다 낮은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 2019. 10. 10.
소하(蕭何): 진말 영웅각축의 최대의 승리자 글: 곽천민(郭天民) 기원전209년, 얌전하게 농사나 지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부귀'를 꿈꾸던 농삿꾼 진승(陳勝)이 마침내 마음 속의 불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900여명의 수졸(戍卒)을 이끌고 반란의 깃발을 내걸었다. 이는 진나라통치의 철의 장막의 한 부분을 찢어버리는 것이었고, 동.. 2019.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