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도지풍(小島知風)
여자들은 매달 월경을 한다. 당시에는 "대이마(大姨媽)"라고 불렀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한 황제의 후궁의 '대이마'때문에 황조의 목숨이 근 이백년이나 연장될 줄은. 그렇다면 그 후궁은 누구이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기실 그 후궁은 한나라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의 총비 정희(程姬)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제소정희(景帝召程姬), 정희유소피(程姬有所辟), 불원진(不願進), 이식시자당아사야진(以飾侍者唐兒使夜進)".
그 내용은 어느 날 밤에 한경제가 정희를 시침하라고 불렀는데, 당시 마침 정희에게 '대이마'가 왔다. 그녀는 한경제를 시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히 거절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시녀 당아를 자신인 것처럼 보내 한경제를 시침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 정희에게 '대이마'가 왔다면 그녀가 한경제에게 그렇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게 아닌가? 하필 시녀를 자신처럼 분장시켜 한경제를 모시게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설마 한경제가 그녀인지 시녀인지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란 말인가?
정희는 당연히 한경제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비록 당시 한경제가 아직 정식 등극한 것은 아니고 태자의 신분이지만, 그의 후궁에는 여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번에 정희가 만일 한경제의 요구를 거절해서, 만일 한경제가 기분나빠한다면 아마도 다음에 그녀를 부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면 총애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경제는 정희인지 시녀 당아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 내용은 <사기>에 비교적 간략하게 적혀 있다. 다만, 반고의 <전한서>에는 사건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경제는 저녁에 연회에 참가해서 술에 취해 있었다. 저녁이고 술에 취한 상태였으며, 고대의 유등(油燈)은 그다지 밝지가 않다. 그리하여 한경제는 시침하는 여인이 정희인지 아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경제는 자신을 시침한 여인이 정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희를 불러 물어본다. 그제서야 정희는 사실대로 고한다. 자신은 '대이마'가 와서 한경제를 모실 수 없게 되어, 당아를 자기 대신으로 보내어 한경제를 시침하게 한 것이라고.
한경제는 사실을 알고난 후 정희가 세심하게 신경썼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시녀 당아는 이날 밤의 일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임신 후에는 한경제의 후궁이 된다. 그녀가 사료에 기록된 당희(唐姬)이다. 나중에 한경제를 위해 아들을 낳으니 그의 이름은 유발(劉發)이다.
이 사건을 후세에는 성어로 만들어 "정희지질(程姬之疾)"이라 부른다. 고대에, '정희지질'은 현대인들이 '대이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두 여성의 월경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특히 고대의 궁정비빈과 귀족부녀는 월경으로 남편을 모실 수 없을 때 모두 '정희지질'이라고 고했고, 그러면 남편도 무슨 뜻인지 알았다.
기실 사료기재를 보면, '정희지질' 사건의 배후에는 아마도 궁중투쟁극이 있는 것같다. 비록 당시 한경제가 태자의 신분이지만 그의 후궁여인은 아주 많았다.
한경제의 정실부인이자 제1대황후는 박황후(薄皇后)이다. 당시에는 태자비(太子妃)였따. 박황후는 한경제의 할머니인 박태후(薄太后) 집안의 손녀였다. 그리고 박태후가 그녀를 한경제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실제로 한경제는 그녀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고,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정실부인 박황후는 한경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니, 다른 희첩들이 총애를 다투게 된다. 당시 한경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여인은 율희(栗姬)이다. 한경제는 등국후 율희가 낳은 서장자(庶長子) 유영(劉榮)을 황태자로 앉힌다. 한경제의 아들중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다. 그러나 당시 유철의 생모인 왕지(王娡)가 총애받는 정도는 율희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당시 율희와 총애를 다툴 수 있는 여인은 정희뿐이었다. 기실 당시 정희는 한경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이미 전후로 한경제를 위해 넷째아들 유여(劉餘)와 다섯째 아들 유비(劉非)를 낳았다. 다만 율희가 훨씬 더 총애를 받았고, 정희는 그녀에 비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마도 후궁에 자신의 사람을 하나 더 끌어들여 율희로부터 총애를 나누어가지고자 했을 것이다.
정희의 방법은 후궁에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고 한경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여인을 배양하는 것이다. 당아는 출신이 미천하고, 일개 시녀에서 일약 비빈이 되었으니, 분명 정희에게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아가 한경제의 총애를 받는다면, 정희는 그녀와 동맹을 맺어 율희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희는 고의로 '대이마'의 핑계를 대고 당아를 시침시켰을지 모른다. 그 목적은 한경제의 율희에 대한 총애를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아는 출신이 미천하고, 그다지 소양이나 자질이 없어, 결국 한경제의 총애를 받지는 못한다. 그날 밤의 일로 유발을 낳은 후 다시는 한경제를 모시지 못한다.
기실 이 방식은 나중에 한무제의 모친인 왕지도 쓴 바 있다. 왕지가 한무제를 낳은 후, 율희로부터 한경제의 총애를 더욱 나누어갖기 위하여 그녀는 특별히 자신의 여동생 왕아후(王兒姁)를 추천하여 한경제를 시침들게 한다. 그리고 최종결과는 정희의 경우와 완전히 달랐다. 왕아후는 당아보다 대단했고, 한경제로부터 크게 총애를 받게 된다.
왕지자매가 연합하여 총애를 빼앗아가고, 게다가 왕지가 한경제의 누나인 관도공주(館陶公主)와 연합하여 그녀를 타격하자, 율희는 결국 심리적으로 붕괴되어 한경제의 총애를 철저히 잃게 된다. 그녀의 아들 유영은 태자에서 폐위되어 임강왕(臨江王)이 되고, 태자는 유철이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나중의 한무제이다.
비교해 보자면, 정희는 왕지보다 먼저 총애를 나누려는 수단을 썼는데, 그녀는 실패했다. 왕지는 그러나 성공했다. 그러나 비록 정희가 실패하기는 했찌만, 그녀는 인생에서 좋은 동생 당아를 얻게 된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서로 아주 친밀했고, 마치 자매처럼 지낸다.
특히 정희는 당아가 낳은 아들 유발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유발을 마치 친아들처럼 대했다. 그리고 정희가 유발에게 쏟은 사랑은 보답도 받는다. 그녀의 말년에 유발이 그녀를 돌보고 모셨던 것이다.
유발은 생모 당아의 출신이 미천하여 한경제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한경제는 자식이 아주 많았다. 그리하여 유발은 어려서부터 한경제에게 주목받지 못하고, 성년이 된 후에도 한경제는 그에게 당시 경제발전이 비교적 낙후되고 기후도 습한 장사(長沙)로 보내 장사왕(長沙王)으로 봉한다.
한경제는 유발을 좋아하지도 않고, 중시하지도 않았지만, 유발은 아주 기지가 있었다. 기원전142년 한경제의 47세 생일에, 유발은 장사에서 경성으로 가서 한경제의 생일을 축하한다. 생일축하연에서, 유발은 고의로 손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발도 제대로 두지 못하는 자세를 보인다. 생일축하연에서 실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박장대소한다. 이에 한경제는 화를 내면서 그에게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느냐고 질책한다. 그러자 유발이 이렇게 대답한다: "신국소지협(臣國小地狹), 부족회선(不足回旋)"
유발의 뜻은 자신의 봉지가 너무 적어서 손발을 뻗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한경제에게 자신의 봉지가 너무 적다고 호소한 것이다. 유발이 그렇게 말하자, 한경제는 자신이 이 아들에 대해 너무 박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서를 내려, 무릉군(武陵郡), 계양군(桂陽郡), 영릉군(零陵郡)의 3개군을 장사국에 편입시킨다.
유발이 이렇게 교묘한 방법으로 한경제에게 봉지를 요구해서 받아낸 것을 보면 그는 아주 기지가 있는 인물이다. 직접 한경제에게 봉지를 늘여달라고 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한경제에게 자신의 봉지가 너무 적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만든 것이다.
유발은 기지가 있을 뿐아니라, 효자였다. 그는 장사에서 부모와 멀리 떠어져 있어서, 그는 한경제의 생일축하연회가 끝난 후, 특별히 장안에서 모래흙을 장사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는 가져온 모래흙으로 장사에서 장안방향으로 관모대(觀母臺)를 짓는다. 매번 부모가 생각날 때면, 그는 관모대로 가서 장안을 바라보았다. 이를 통해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죽은 후 동생 한무제는 그를 장사정왕(長沙定王)으로 추봉하여, 이 관모대는 지금 장사의 정왕대(定王臺)이다.
유발은 생모 당아에 대해 아주 효성을 다했을 뿐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신을 아껴준 서모 정희에 대해서도 효성을 다했다. 정희의 말년은 조금 처량했다. 그녀는 한경제와의 사이에 모두 3명의 아들을 두었다. 각각 제4자 노왕(魯王) 유여(劉餘), 제5자 강도왕(江都王) 유비(劉非), 제7자 교서왕(膠西王) 유단(劉端)이다.
한경제가 죽은 후, 법도에 따라 정희와 당아는 황자를 낳아 봉왕되었으므로 아들이 맞이하여 양로해야 했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정희를 노왕태후(魯王太后)로 봉해서 그녀가 낳은 장남 노왕 유여가 모시도록 했다. 당아는 장사왕태후(長沙王太后)에 봉해져 유발이 장사로 모셔가 모신다.
비록 아들의 수는 당아가 정희보다 못했지만, 유발은 당아에게 극히 효성을 다했다. 사서에는 "사모지효(事母至孝)" 모친을 극히 효성스럽게 모셨다라고 하였따. 그러나 정희는 아들이 많았지만, 유발처럼 효성스러운 아들이 없었다.
큰아들 유여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더듬었고, 공부는 좋아하지 않아, 고양이 개와 놀기를 좋아했고, 황음방탕하며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많이 했다. 심지어 공자의 고거까지도 철거하였으며, 정희에게도 불효했다.
둘째아들 유비는 비교적 정상적이다. 사람됨이 용맹하고 과감하여, 한경제시기 칠국의 난이 발발했을 때, 나이 겨우 15살의 유비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경제에게 반란을 평정하겠다고 한다. 칠국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고, 그리하여 한경제가 그를 강도왕에 봉한 것이다.
유비는 봉국내에서 현명하고 능력있는 왕이었다. 그는 전국에서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모아서 봉국을 다스렸고, 유명한 거유 동중서(董仲舒)도 유비로부터 크게 예우를 받고 존중받았다.
한무제가 즉위한 후, 유비는 한무제에 불만이 컸다. 자신이 한무제보다 황제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주에서 거병하여 한무제의 자리를 대체할 생각까지 했다. 다행히 동중서가 그를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한무제를 보좌하기로 마음먹는다.
나중에 흉노가 침범하자, 유비는 대노한다. 그는 청년 한무제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한무제에 상소를 올려 자신이 양주의 병마를 이끌고 흉노를 막겠다고 나선다. 그는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며, 게다가 황제에 오를 야심까지 가졌으므로 한무제는 당연히 그에게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따. 그후 유비는 할 수 없이 봉국을 다스리는데 전념하다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유비는 선종했지만, 그의 아들 유건(劉建)은 화를 부른다. 유비가 강도왕을 이어받은 후, 양주의 병마가 강성하다고 여겨, 한무제를 대체할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유건은 몰래 다른 한무제에게 불만을 품은 번왕들과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
당시 멀리 산동에 있던 정희는 손자 유건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고 서신을 보내 말린다. 다만 유건은 조모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패하고 일가족이 주살당한다. 강도왕의 봉작세계도 폐지된다.
한무제는 유건을 주살한 후, 정희가 일찌기 유건을 말리는 서신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서모 정희의 행동을 칭찬하며 특별히 정희가 현명하다는 조서를 내린다. 정희는 그 기회를 틈타 한무제에게 유건의 어린 딸 유세군(劉細君)에 대한 관대한 처리를 부탁한다. 한무제는 유세군을 정희에게 주어 기르게 한다. 나중에 정희가 죽고, 유세군은 한무제에 의해 공주로 봉해진 후 오손국(烏孫國)에 화친으로 가게 된다.
정희의 셋째아들 유단은 더더욱 한나라역사상 유명한 황당한 번왕이다. 유단은 성격이 방탕하고 사람됨이 잔혹했다. 봉국내에서 자주 사람을 죽였다. 그는 여자는 좋아하지 않고, 남자를 좋아했다. 게다가 그는 남자역할이 아니라 여자역할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주 장수했다. 그러나 장수해도 소용은 없었다. 후손을 두지 못했고, 그가 죽은 후 봉국은 폐지된다.
그래서 정희는 세 아들을 모두 의지할 수 없었다. 정희의 말년은 아주 우울했다. 그리하여 동생 당아에게 편지를 보내 고충을 호소한다. 당아는 정희의 세 아들이 모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자 즉시 아들 유발과 상의한 후 그녀를 장사로 모셔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유발은 사람을 산동 연주(兖州)로 보내 정희를 장사로 모셔온다.
원래 유발은 유여에게 당아가 정희를 그리워하니, 그녀를 장사로 모셔와 잠시 지내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유여는 온신(瘟神)을 버리는 것처럼 바로 모친을 장사로 보내버린다. 이렇게 하여 정희는 장사로 옮겨가고 죽을 때까지 연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장사에서 유발은 아주 효성스럽게 정희를 모셨다. 그의 친아들 셋보다 훨씬 나았다. 이렇게 하여 정희는 매일 당아와 얘기를 나누면서 아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그녀와 당아가 모두 사망하자, 유발은 두 모친을 합장한다. 후세에 그녀들의 합장묘를 "쌍희묘(雙姬墓)"라고 부른다.
기실, 정희, 당아, 한경제 3명이 생각지도 못한 일은 바로 유발이 후손이 한나라의 명을 195년간이나 연장시켜주게 된다는 것이다.
서한말기, 외척 왕망(王莽)이 황위를 찬탈하여 신조(新朝)를 건립한다. 그러나 금방 왕망의 정권은 적미(赤眉), 녹림(綠林)의 난으로 멸망하고, 녹림군은 유발의 5대손 유현(劉玄)을 올입하여 경시제(更始帝)에 올라 한왕조의 황통을 잇는다.
나중에 유현은 적미군에 피살당하고, 결국 유현의 당제(堂弟)이자 마찬가지로 유현의 5대손인 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통치를 회복한다. 역사에서 동한(東漢)이라 부른다.
유수가 동한을 건립한 때로부터 한헌제 유협이 위문제 유비에게 선양할 때까지 동한은 195년간 존속했다. 정희의 한차례 '대이마'로 한왕조는 근 이백년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진귀한 '대이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희(楊喜): 한 소인물(小人物)이 이천년 역사에 영향을 끼치다. (0) | 2025.01.13 |
---|---|
"묵돌선우(冒頓單于)": 초원제국은 왜 중원통일왕조의 악몽이 되었을까? (13) | 2024.10.08 |
원앙(袁盎): 서한초기의 정치한 이기주의자 (0) | 2024.08.19 |
유양(劉襄): 유방의 장손으로 능력이 너무 뛰어나 황제에 오르지 못한 인물 (0) | 2024.08.02 |
한경제(漢景帝)는 왜 황태자 유영(劉榮)을 폐위시켰을까? (1) | 2024.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