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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제환공(齊桓公): 살아서는 웅패천하(雄覇天下), 죽어서는 무인수시(無人收屍)

by 중은우시 2025. 1. 17.

글: 중국국가역사(中國國家歷史)

1

주(周)가 상(商)을 멸한 후, 주무왕(周武王)은 강태공 강상(姜尙)을 영구(營丘)에 봉하니, 제(齊)나라이다.

강태공이 죽은 후, 14대를 내려오니 제양공(齊襄公)이다.

제양공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당형(堂兄)인 공손무지(公孫无知)와 왕위쟁탈전을 벌인다. 즉위후에는 보복조치로 공손무지의 봉록(俸祿)과 거마(車馬)의 등급을 낮추어버리고, 꼼짝 못하게 만든다.

제양공4년, 노환공(魯桓公)이 부인을 데리고 제나라를 방문한다. 노부인은 제양공의 누나이고, 일찌기 시집가기 전에 제양공과 사통한 바 있다.

모국에 돌아오니, 두 사람간의 옛날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노환공이 발견하고, 크게 화를 내며 노부인을 욕한다.

노부인은 울면서 동생 제양공에게 호소한다. 그러자 제양공은 누나를 위해 나서기로 결심한다.

제양공은 노환공을 연회에 초청한 후, 연회때 그에게 술을 많이 먹여서 취하게 만든 후 대역사(大力士) 팽생(彭生)에게 노환공을 안아서 수레에 태우도록 명한다.

팽생은 노환공을 힘을 주어 끌어안았고, 노환공의 늑골이 모조리 부서진다. 노환공이 역관(驛館)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후였다.

노나라는 분노하여 제나라에 항의한다. 제양공은 팽생을 죽임으로써 사죄를 표시한다.

제양공12년, 대부 연칭(連稱), 관지보(管至父)를 규구(葵丘)에 주둔하며 지키게 하면서, 반년후에는 바꿔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간이 만료되고나서도 제양공은 두 사람이 잘 지키고 있으니 계속하여 지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매우 화가 났고, 그들은 공손무지가 제양공에 원한을 가진 것을 알고,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연칭의 여동생은 제양공의 비(妃)였으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로 하여근 내부에서 호응하게 하여, 제양공의 행적을 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약속한다. 일이 성사되면 그녀를 공손무지의 부인으로 삼게 하겠다고.

십이월, 제양공이 패구(沛丘)로 사냥을 나선다. 그때 큰 돼지 한 마리가 돌진해 온다. 시종은 그것이 이미 죽은 팽생이라고 말했다.

제양공은 놀라면서도 화가나서, 화살을 쏜다. 그러자 그 돼지는 사람처럼 일어나서 비명을 지른다.

그러자 제양공은 놀라서 수레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신발도 잃어버린다. 돌아온 후에는 불(茀)이라는 이름의 신발을 관리하는 내시를 한바탕 혼내버린다.

공손무지등은 제양공이 부상을 입은 것을 알았고, 부하를 데리고 왕궁으로 쳐들어가다가 마침 불을 만난다.

불은 공손무지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나는 제양공이 죽이도록 밉다. 내가 그를 찾아내겠다. 그를 찾은 후에는 알려줄테니, 당신들은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불이 공손무지를 떠난 후, 제양공을 찾아낸 다음, 그를 문뒤에 숨긴다.

그는 바로 사람을 모아 공손무지를 공격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만다.

공손무지는 왕궁으로 들어가 제양공을 수색한다. 어떤 사람이 문 아래에 두 발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문을 열어보니 바로 제양공이었다.

공손무지는 제양공을 죽이고 스스로 왕에 오른다.

다음 해 봄, 공손무지는 옹림(雍林)에서 놀다가, 현지인의 기습을 받아 죽는다.

옹림의 사람은 제나라사람에게 말하기를, 공손무지는 제양공을 죽이고 스스로 왕에 올랐는데, 우리가 이미 그를 죽여버렸다. 공자들 중에서 현명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 바란다.

제양공은 황음무도했고, 도행역시(倒行逆施)했다. 동생들은 화를 입을까 우려하여 속속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공자규(公子糾)의 모친은 노(魯)나라사람이어서, 노나라로 도망쳤고, 관중(管仲), 소홀(召忽)이 그를 따르며 보좌했다.

공자소백(公子小白)은 거국(莒國)으로 도망쳤고, 포숙(鮑叔)이 그의 심복이었다.

공손무지가 죽은 후, 제나라는 대혼란에 빠진다. 권신 고씨(高氏), 국씨(國氏)는 공자소백을 왕으로 옹립할 준비를 하고, 사람을 거국으로 보내 모셔오게 했다.

노나라는 병력을 보내 공자규가 제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호송했고, 관중을 시켜 거국과의 통로를 막도록 명한다.

관중은 화살로 공자소백의 의대구(衣帶鉤, 허리띠버클)을 맞춘다. 소백은 거짓으로 죽은 척했다. 관중은 사람을 노나라로 보내 공자소백이 죽었음을 알린다.

그러자, 공자규등은 경계를 느슨히 하면서 천천히 행군했고, 6일만에 제나라에 도착한다.

그때, 공자소백은 이미 제나라에 들어가 왕으로 즉위한다.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그해 가을, 제나라와 노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노나라군대가 대패한다.

포속은 노나라군주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공자규는 제나라왕의 형제이니, 그를 차마 죽일 수가 없다. 노나라가 대신 죽여달라고 한다.

공자규의 스승인 소홀, 관중은 원수이니, 노나라는 반드시 그들을 제나라로 압송하라고 한다. 만일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제나라는 노나라를 계속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노나라는 겁을 먹고 공자규를 죽여버린다. 소홀은 자살했고, 관중은 제나라로 압송된다.

환공은 관중을 죽이고자 했지만, 포숙아(鮑叔牙)는 말리며 말했다. 만일 단순히 국군(國君)이 되고자 한다면 나만 있어도 된다. 그러나 만일 천하를 쟁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관중의 보좌를 받아야 한다.

제환공은 관중을 만나서, 왕패지술(王覇之術)을 논한다. 관중의 말은 그의 마음에 맞았다.

그리하여 제환공은 크게 기뻐하며, 관중을 대부(大夫)로 삼아, 정무를 맡긴다.

2

관중은 포숙, 고혜(高傒)등과 함께 공동으로 제나라를 다스린다.

병제(兵制)를 개혁하고, 상업을 발전시키며, 염철(鹽鐵)을 전매하고, 현명한 인사들을 기용하여 제나라의 국력이 크게 증강된다.

제환공5년, 제나라는 다시 노나라를 토벌한다. 노나라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노장공(魯莊公)은 땅을 바치면서 화의를 청한다.

맹회(盟會) 당일, 역사 조말(曹沫)이 비수를 들고 제환공을 납치하여 말하기를, 노나라에게 빼앗아간 땅을 돌려달라. 그렇게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제환공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조말은 그를 풀어준다.

제환공은 나중에 후회한다. 그리하여 조말을 죽이고 토지를 돌려주지 않으려 한다.

그때 관중이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했으면, 그게 납치 당했을 때라고 하더라도, 그 약속을 어겨서는 안됩니다.

약속을 어기고 상대방을 죽이게 되면, 스스로의 쾌감은 만족되겠지만, 제후들 사이에서 신의는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인의 지지를 잃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제환공은 관중의 말에 따라, 점령했던 땅을 모조리 노나라에 돌려준다.

제후들은 그 말을 듣고, 제나라는 신용을 지키는 나라라고 여겨, 속속 제나라에 의부(依附)한다.

제환공7년, 제후들이 견지(甄地)에서 맹회(盟會)를 열고, 제환공을 천하패주(天下覇主)로 추대한다.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침범하자, 연장공(燕莊公)은 제나라에 급히 도움을 청한다.

제환공은 병력을 보내 연나라를 구해주고, 산융을 대패시키고, 고죽(孤竹)까지 갔다가 회군한다.

연장공은 은혜에 감사하며, 제환공의 귀국을 배웅하며 제나라경내로까지 들어간다.

제환공이 말하기를, 천자를 제외하고, 제후간에 서로 배웅하는 것은 자신의 국경을 넘지 않는 것인데, 연왕의 예우가 너무 극진하니, 저도 연나라에 무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연장공이 배웅하며 넘어온 제나라의 영토를 도랑(溝)을 파서 경계로 삼고 연나라에 넘겨준다.

제후들이 그 일을 듣고 더더욱 제나라를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제환공은 채목후(蔡穆侯)의 여동생을 취했으니, 그녀가 채희(蔡姬)이다.

채희는 제환공과 함께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호수중앙까지 저어간다. 그때 채희는 돌연 몸을 일으켜, 두 발을 배의 양쪽에 딛고, 좌우로 흔든다. 작은 배는 크게 흔들렸고 곧 뒤집어질 것같았다.

제환공은 수영을 할 줄 몰라서, 당황하여, 채희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혼낸다.

그러나 채희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장난치며 더욱 힘을 준다.

제환공은 급히 배를 붙잡고 바닥에 엎드렸으며 얼굴색은 창백하여 낭패하기 그지없게 된다.

겨우 호숫가에 올라온 후, 제환공은 즉시 채희를 친정으로 쫓아낸다.

채목후는 이를 큰 치욕으로 여기고, 분노하여 채희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다.

제환공은 더욱 불쾌해졌다. 내가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니고, 그녀를 친정으로 보내 반성하라고 한 것인데, 채후가 이렇게 한 것은 제나라의 체면을 완전히 잃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병력을 출동시켜 채나라를 공격한다.

제나라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금방 채목후를 붙잡는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내친 김에 초(楚)나라까지 공격한다.

초나라는 어리둥절했다. 초나라와 제나라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갑자기 쳐들어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관중은 억지로 변명하며 말했다. 주천자(周天子)가 말하기를 제나라는 구주방백(九州方伯)이며, 천하의 불공평한 일들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너희 초나라는 원래 천자가 술을 거르는데 사용하는 청초(靑草)를 바쳐야 하는데, 금년에 아직 바치지 않았다. 주소왕(周昭王)이 예전에 남순하다가 너희 초나라에세 익사했다. 그래서 우리 제나라가 너희 초나라의 죄를 물으려 하는 것이다.

초나라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청초에 관한 것은 우리가 잘못한 것이고, 즉시 진공하겠다. 주소왕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왜 우리에게 묻느냐, 한수(漢水)에 물어봐라.

제나라는 명분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철군하게 된다.

채나라를 지나갈 때, 각로의 제후들이 채후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한다. 제환공도 그때는 화가 풀려서 채목후를 풀어준다.

그 당시는 주왕실이 힘이 없었고, 천하는 제(齊), 진(晋), 진(秦), 초(楚)의 네 나라가 대국이었다.

진헌공(晋獻公)은 여희(驪姬)를 총애하여, 태자를 폐위시켰고, 그가 죽은 후에 진나라는 수십년간 내란에 시달린다.

진목공(秦穆公)은 나라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발전이 더뎠고, 제후회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초성왕(楚成王)은 이제 막 형만(荊蠻)의 땅을 점령하여, 스스로 이적(夷狄)이라 칭하면서 중원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오직 제나라만이 제후회맹을 소집할 수 있었고, 패주의 위세를 드러낼 수 있었으며, 각국이 복종하고, 속속 회맹에 참가했다.

제환공은 득의만면하여 말한다. 과인은 남정(南征)으로 소릉(召陵)과 웅이산(熊耳山)에 이르고, 북벌로 산융과 고죽국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대하(大夏) 정벌하고, 멀리 유사(流沙)를 밟고 태행험도(太行險道)에 올라 비이산(卑耳山)에 도달한 후 되돌아왔다.

과인은 일찌기 병거맹회(兵車盟會)을 세 차례, 승거맹회(乘車盟會)를 여섯차레 소집하여 구합제후(九合諸侯), 일광천하(一匡天下) 했으니, 제후들이 절하고 복속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과인은 "봉제태산(封祭泰山), 선제양보(禪祭梁父)"(태산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양보에서 땅에 제사지내는 것. 즉 봉선) 하겠다.

관중이 극력 말렸지만, 제환공은 듣지 않았다.

관중은 할 수 없이 집행절차를 아주 복잡하고 번잡하게 해야한다고 설명하자, 제환공은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3

제환공의 곁에는 3명의 근신(近臣)이 있었다. 역아(易牙), 개방(開方)과 수조(竪刁)이다.

역아는 원래 왕궁의 요리사이다. 제환공은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과인은 천하의 맛있는 것은 모두 먹어보았는데, 오직 인육만 먹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유감이다.

그러자 역아는 집으로 돌아와 4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탕으로 만들어 제환공에게 보낸다.

제환공이 먹어보니 아주 신선하고 부드러웠다. 그리하여 역아에게 무슨 고기인지 물어본다.

그러자 역아가 울면서 말한다. 자신의 막내아들의 살이라고. 국군의 몸이 건강하도록 아들을 죽여 주공에게 바친 것이라고.

제환공은 크게 감동한다. 역아는 자신을 친골육보다 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여 극히 총애하고 신뢰한다.

개방은 위(衛)나라의 귀족인데, 제환공을 따른 후 15년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있었다.

개방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개방은 돌아가서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환공은 개방이 자신을 부모보다 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여 크게 총애한다.

수조는 제나라의 환관인데, 제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했다.

제환공은 수조가 자신의 몸보다 그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여 심복으로 삼는다.

제환공41년, 관중의 병이 위중해진다.

제환공이 문안하러 와서 그에게 묻는다. 당신이 죽은 후에 여러 신하들 중에서 누가 상국(相國)을 맡을만한가?

관중이 대답한다: 신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국군입니다. 먼저 말씀해 보시지요.

환공이 묻는다: 역아는 어떤가?

관중이 답한다: 그는 친아들을 죽여서 국군에 잘보이려 했습니다. 이는 인정(人情)에 맞지 않으니, 기용해서는 안됩니다.

환공이 묻는다: 개방은 어떤가?

관중이 답한다: 그는 양친을 버리고 국군에게 잘보이려 했습니다. 인륜(人倫)에 맞지 않으니 가까이 해서는 안됩니다.

환공이 묻는다: 수조는 어떤가?

관중이 답한다: 그는 스스로 거세하면서 국군에게 잘보이려 했습니다. 인욕(人慾)에 맞지 않으니 가까이 두어서는 안됩니다.

관중이 죽은 후, 제환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이 세 사람을 중용했다.

제환공43년 구월, 제환공의 병이 위중해진다.

역아, 수조, 개방 세 사람은 제환공을 방안에 가두어 두고, 담장을 높이 쌓고, 제환공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도 막았다.

십월, 제환공이 굶어죽는다.

제환공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 여무휴(呂无虧), 차남 여원(呂元), 삼남 여소(呂昭), 사남 여반(呂潘), 오남 여상인(呂商人), 육남 여옹(呂雍).

제환공이 죽은 후, 역아와 수조는 손을 잡고, 공자무휴(公子无虧)를 제나라 국군으로 세울 준비를 한다.

공자소(公子昭)는 송(宋)나라로 도망치고, 다른 공자들은 불복하여 서로 대치했다.

최종적으로 공자무휴가 승리를 거두어 왕위에 오른다.

그때는 제환공이 죽은지 이미 67일이 지난 때였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입관해주지 않았고, 시신은 침궁에 그냥 널부러져 있었으며, 부패하여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가득했으며, 창문을 넘어 집밖으로까지 기어나왔다.

4

공자소는 송나라로 도망쳤고, 송양공(宋襄公)이 병력을 보내 도운다.

송나라군대가 국경선으로 밀려오자, 역아는 병력을 이끌고 맞이하러 나선다. 그때 노신 고혜(高傒)는 수조에게 상의할 일이 있다며 궁안으로 부른다. 수조가 입궁하자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때려죽인다.

그후 공자무휴도 죽이고, 공자소를 맞이한다.

역아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노(魯)나라로 도망친다.

나머지 네 명의 공자는 포기하지 않고, 병력을 모아 공자소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공자소는 할 수 없이 송나라로 되돌아가야 했다.

송양공은 매우 화가나서, 다시 병력을 출동시켜, 네 공자를 격패시킨다.

그리하여 공자소가 제나라로 다시 들어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효공(齊孝公)이다.

제나라의 내란으로 원기가 크게 상하고, 패업은 그렇게 끝이 난다.

5

생전에는 더할 나위없이 영광스러웠으나, 죽었을 때는 매우 처참했다.

이런 비극은 제환공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후세에 조무령왕(趙武靈王)도 일대웅주였으나, 말년에 궁정정변이 일어나 사구궁(沙丘宮)에 갇혀서 굶어죽는다.

원인은 권력은 단지 그 원천에만 책임진다는 것이다.

군왕이 죽거나, 혹은 죽은 것과 같을 때는 그의 몸에 붙어 있던 권력도 소실되는 것이다.

만일 생전에 독재를 심하게 했거나, 자부심이 너무 강했다면, 그때 오히려 권력의 도움을 받던 사람에게 오히려 배신당해서, 더욱 낭패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