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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군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신하가 임신한 소첩을 바치다.

글: 역사대미감(歷史大微鑒)​옛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 이를 보면, 옛사람들은 가족혈맥의 전승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백성도 마찬가지이니, 왕실은 더욱 신경썼다. 황제가 만일 생육능력이 없다면, 이는 단순히 효 불효의 문제가 아니라,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기회를 노릴 수 있어, 통치지위에 위기가 미치고, 국가가 동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종접대(傳宗接代)'는 황제의 가장 중요한 직책중 하나가 된다.​역사상 후사를 두지 못한 군주는 많다. 한소제 유불릉, 한애제 유흔, 명무종 주후조, 광서제 재첨, 선통제 부의가 모두 일국지군으로 후사를 두지 못한 경우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기에 한 초나라..

육군양가자(六郡良家子):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은 기반

글: 자귤(紫橘)​양한(兩韓, 서한 및 동한)은 무덕(武德)이 충만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나라때 북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과 장수는 대부분 )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풍이 사납고, 집안자산도 충분하고, 장비도 우수하였다. 그들은 우림군(羽林軍)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관직과 작위를 얻으려년 적극성이 아주 높았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군대가 강대했던 주요한 원인이다. 양한은 이로 인해서 흥했고, 동한은 바로 육군의 후인이다. 그러나, 동한말기 군벌할거가 일어나면서 우림군 건제는 사라지고, 육군양가자라는 집단도 역사에서 인멸되어버린다.​육군(六郡)과 양가자(良家子)​소위 양한의 육군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반고(班固)의 이다. 그러나 그는 육군이 구체적으로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