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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서비홍(徐悲鴻) : 우공이산(愚公移山)

by 중은우시 2006. 7. 17.

 

우공이산 : 46X107.5센티미터

 

 

 

서비홍(1895-1953)

 

강소 의흥 사람. 1917년 일본에 가서 미술을 배움. 1927년 파리고등미술학교를 졸업. 1949년 중앙미술학원의 초대 원장이 됨.

대표작 : 전횡오백사. 우공이산. 군마. 타고르상등이 있음.

 

우공이산의 구상, 창작과 유전은 모두 전설적인 색채를 담고 있으며, 중국현대미술창작과 수장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39년 12월 서비홍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초청을 받아, 싱가포르, 랭구운, 캘커타를 거쳐 타고르의 거주지인 Shantiniketan으로 갔다. 1940년 2월에는 간디가 샨티니케탄을 방문했고, 타고르는 간디에게 서비홍을 소개시켜 주었다. 후세인들이 적은 글에 의하면 서비홍은 우공이산의 이야기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간디를 위하여 화상을 그리던 중에 이 인도독립의 영혼인물의 몸에서 우공의 영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에 <<우공이산>>의 초고와 인물사생을 수십장 그렸다. 5월에 서비홍은 히말라야산맥의 시킴으로 가면서 구절양장의 길을 뚫어놓은 것을 보고는 <<우공이산>>의 구상을 보다 완성시켰다.

 

8월 24일 오후 1시, 서비홍은 <<우공이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전에 초벌그림만 30여폭을 이미 그렸었다. 11월에, 커다란 수묵화 <<우공이산>>과 유화 <<우공이산>>의 창작을 완성했다. 인도여행기간중에 창작한 수묵화 <<우공이산>>, <<타고르>>, <<군마>>, <<분마>>, 유화인 <<우공이산>> <<간디>>, <<희말라야산>>, <<식난교장로>>등의 스케치와 소묘를 완성했다.

 

1940년 11월, 서비홍은 타고르와 헤어져,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1941년 4월, 미국의 화교연합회와 임어당, 새진주등이 서비홍에게 미국으로 와서 전시회를 열도록 준비했다. 11월 전시회의 도록과 참고사진을 미국으로 보내는 동시에 수백장의 유화작품을 해운회사에 보내어 미국으로 보냈다. 나머지 대부분은 상자에 넣어 운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같은 날 새벽4시부터 싱가포르에 일본비행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15일에 빈성이 함락되고, 싱가포르로 몰려왔다. 진퇴양난의 서비홍은 수장한 백여상의 회화창작과 고대서화작품, 근대명가의 서화, 골동품, 도자기, 고서적진본등을 각각 한괴준의 홍모단원과 황만사의 백선재에 나누어 보관했다. 1942년 12월 일본기의 공습을 피해, 서비홍은 나농천의 숭문학교로 옮겨갔다. 이 학교는 복건 안계회관에서 만든 것으로 교장인 종청해는 서법에 뛰어났고, 서비홍과 안면이 있었다. 싱가포르가 위험한 것을 보고, 서비홍은 황만사등과 협의하여 밤에 백선재에 보관했던 회화, 서적, 비첩, 골동, 인장 및 <<우공이산>>을 포함한 10폭의 유화를 노농천으로 옮겨와서 옛날 우물 속에 숨겨두었다. 1942년 1월에 서비홍은 싱가포르함락을 전후하여 인도배를 타고 싱가포르를 떠났다.

 

1945년 9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황만사, 임금승, 종청해등 세 사람은 그동안 3년8개월간 감춰두었던 작품등을 꺼내고 서비홍에 서신을 보냈다. 서비홍은 회신에서 종교장이 일본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켜준 것에 감사하며, 그 중에 아무 것이나 하나를 택해서 가지시도록 하였다. 종청해는 <<우공이산>>을 선택했다.

 

1953년 서비홍이 병으로 사망하고 다음해 2월, 싱가포르에서 서비홍의 작품전을 열었는데, 이 때 <<우공이산>>이 전시된다. 이 작품은 1999년 대만의 모 화랑에서 구매했으며, 2000년 중국가덕에서 인터넷경매를 했고, 대만의 수장가가 250만위안의 가격으로 가져갔었다.

 

2006년 6월 24일에서 26일까지 북경한해춘계 경매회가 케리센터호텔에서 거행된다. 여러 경매작품중에 해외에서 수십년을 머물렀던 서비홍의 대표적인 유화인 <<우공이산>>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은 서비홍이 창작완성한 후에 65년만에 북경으로 처음 돌아온 것이다. 낙찰경매가격은 3000만위안으로, 서비홍작품중 최고가격을 기록했다.

 

서비홍의 <<우공이산>>유화작품은 두 개가 세상에 남아 있다. 서비홍은 일찌기 두 폭을 그렸다. 이번 한해에서 경매된 것은 첫번째 작품으로 크기가 비교적 적은 것이다(46X107.5센티미터), 현재 서비홍기념관에 수장되어 이는 <<우공이산>>은 두번째 작품이며 크기가 400X200센티미터이다. 위에 설명한 사항은 모두 첫번째 작품에 관련된 것이다.

 

두번째 작품은 문혁기간중에 물기가 많은 방안에 두었기 때문에, 색깔이 변했다. 중국과 프랑스의 유화전문가들이 5년의 시간을 들여 원상으로 복구한 후에야 전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재현하는데에는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에 경매된 소폭의 우공이산은 지금까지 서비홍의 항일전쟁기간동안의 창작풍모를 더욱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