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남하한 부여인들이 고구려국의 통치집단을 형성하였지만, 고구려민족의 기원의 주요한 측면은 현지의 토착주민이었다. 주몽이 무리를 이끌고 동부여에서 나와 남하하기 전에, 나중에 고구려족 거주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주로 예족, 맥족, 구려(句驪)인, 진번(眞番)인, 그리고 중원에서 온 한인(漢人)등이었다.
이 지역의 토착주민중 수량이 가장 많았던 것은 예족이었다. <<한서. 무제기>>에는 한무제 원삭원년(기원전128년)에 "동이의 예족의 군장 남여등이 28만명을 이끌고 투항해왔고, 창해군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매호 5명으로 계산하면 예족은 총 5만6천호가 된다. 이에 비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한 바에 의하면 조조의 위나라때 고구려는 3만호, 예족은 2만호, 옥저인은 5천호, 총 합계 5만5천호라고 되어 있으므로, 예족의 분포 지역이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족이 이 지역에서 주도적인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족은 아주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서남쪽으로는 단단대령(單單大嶺)에 이르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예족은 "지금의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의 땅이다"라고 하고 있다. "단단대령의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그 동쪽은 7개 현이 있는데, 도위가 다스린다. 모두 예족을 백성으로 한다" 이것은 단단대령이 고조선과 예족의 정치예속관계의 분계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북쪽으로는 흉노왼쪽땅과 접한다. <<사기. 흉노열전>>에 의하면, "동쪽으로 예맥, 조선과 접한다"고 적고 있다. 이 예맥은 흉노와 접하고 있으니 당연히 고조선의 이북이 될 것이다. 북으로는 한나라때 부여족의 거주지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부여는 "나라에 옛 성이름이 예성인 곳이 있는데, 모두 원래 예맥의 땅이었다"라고 하고 있고, <<후한서. 동이전>>은 직접 "원래 예의 땅이다"라고 한다. <<산해경. 해내서경>>에는 곽박의 주석에서 "부여국은 바로 예맥의 옛땅이다"라고 하고 있다. 동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예전"에서는 그는 동으로는 바다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이로써 부여족이 동북으로 들어왔지만, 예족이 거주하던 지역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부여를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고구려정권이 성립된 이후에는 아직 부여나 고구려에 직속되지 않는 예족만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국에 반어(班魚)가 나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여인이 예족의 거주지에 들어오기 이전에 예족의 동쪽 경계선은 바다였다. 대체로 보면 <<삼국지>>, <<후한서>>중에 기재한 후세의 부여, 옥저, 고구려등의 민족의 거주지는 모두 예전에 예족의 분포지였다. 주몽의 부락이 남하하여 들어간 곳의 주요 민족도 역시 예족이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이 기씨조선을 빼앗기 이전에 이미 "진번, 조선 오랑캐에 속했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진번은 민족명칭이고, 진번국은 아마도 이 민족명으로 나라명을 삼은 것일 것이다. 진번군의 위치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낙랑군의 이남이 기자조선의 후예가 세운 한국(韓國)이 있고, 임둔군의 이남은 마한에서 갈라져 나온 진국(辰國)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서는 진번군은 현도군의 이북에 위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여인이 남하하면서 먼저 들어온 것은 사군중 가장 북쪽에 있던 원래의 진번군 소재지일 것이고, 바로 진번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일 것이다.
이 지역은 당시에 이미 현도군에 흡수되어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국은 처음에 현도군의 관할을 받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재에 따르면 "고구려는 현도군으로부터 자주 조복과 의복을 받았고..."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고구려국이 현도군의 첫번째 현인 고구려군에 속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때의 현도군은 이미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현도군의 옜당은 아니었다. <<한서. 지리지>>는 현도군에 대한 응소의 주석을 따라 현도군은 "옛 진번, 조선호국"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의 기록은 <<후한서. 동이전>>에서 말하는 "소제 지원 5년에 임둔과 진번을 파하고 낙락, 현도에 병합시켰다"는 사건 이후의 지역판도이며, 이 때의 현도군의 관할지역의 일부분은 원래의 진번군이고, 나머지 일부분은 조선호국(朝鮮胡國, 조선오랑캐국)이었다. <<한서. 지리지>>에서 고구려현에 대한 응소의 주석에서 고구려현은 "엣 구려호(句驪胡, 구려오랑캐)"라고 적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현도군에서 말하는 "조선호국"은 바로 "구려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씨조선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조선호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현도군이 소재 시원 5년(기원전 82년)에 고구려현으로 옮겨갈 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구려의 서북으로 군을 옮겼다"고 적고 있다. 이 명칭은 주몽이 남하하기 훨씬 전에 이미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당시 고구려현의 동남쪽에 있던 '구려호'는 나중에 온 고구려족과는 동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낙랑은 무제때 설치했다. 모두 조선, 예맥, 구려만이의 땅이다" 이로써 볼 때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기 전에, 이 '구려만이'는 존재하고 있었고, 위씨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도 현도군의 고구려현은 이 민족의 거주지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에서 볼 때,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기 전에, 이 민족은 '고구려' '구려호' '조선호국' '구려만이'등의 여러가지 칭호로 불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의 아들 유리명왕때, 졸본부여의 세력은 이 지역으로 뻗쳐 들어왔다. <<후한서. 동이전>>은 이 민족을 고구려전에 포함시켰는데, 당시에 이미 졸본부여와 민족융합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중에 졸본부여는 고구려로 이름을 고쳐버린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속했던 예족과 옥저는 <<삼국지>>, <<후한서>>에 모두 단독의 전(傳)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구려호와 진번은 전(傳)이 없다. 당시에 예족과 옥저는 비록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나 본민족의 민족특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고, 아직 졸본부여와 민족융합이 발생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옥저는 "구려에 신하를 칭했고, 구려는 다시 그 중의 대인을 사자로 삼았고, 상으로 하여금 이끌게 하고, 대가로 하여금 그 조세를 책임지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점을 알 수가 있다.
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려의 별종으로 작은 물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나라가 있는데, 이로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있다. 조선사서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양맥이라는 국가에 대하여 기록이 있다. 이로써 볼 때, 주몽이 부족을 이끌고 남하하기 전에 현지에는 상당한 수의 맥족이 살고 있었다고 보인다.
졸본부여가 옮겨간 지역에는 일찌기 중원의 한족들도 살고 있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전연(前燕)때로부터, 일찌기 진번, 조선에 속했고. 관리를 두고, 장벽을 쌓았다" 이미 중원 사람들이 진번지구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한비(漢妃)가 있었다는 것으로도 이것은 증명될 것이다. 졸본부여가 현도군의 고구려현의 관할지역내에 들어온 이후에, 중원문화와의 접촉은 더욱 많아졌다. 주몽의 부락의 부여인, 예족, 맥족은 현지의 예족, 맥족, 구려호, 진번인, 한인들과 민족융합을 이루어갔으며 여러 한족 문화요소를 받아들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재에 의하면, 고구려의 관명에는 주부(主簿), 승(丞)이 있고 바로 고구려인이 오부 부족장에 대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이것은 모두 한왕조의 현령에 속한 관리의 명칭이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한나라 고구려현의 제약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인은 "영험한 별과 사직에 제사지낸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중원의 제사를 모방한 것이다. 특히 영성사(靈星祀)는 그렇다. <<사기. 보언서>>에 의하면, 한고조가 "군현에 영성사를 만들도록 지시하였었다. 이것도 고구려국이 한에 대하여 의부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써 볼 때, 고구려민족의 기원은 다양하다. 주몽이 부족을 이끌고 처음으로 졸분천에 들어가 나라를 세운 때에는 나라안에 최소한 부여, 예, 맥의 삼대 민족이 있었다. 모든 민족은 이전해온 사람과 현지에 살던 사람으로 나뉜다. 유리명왕에게 한족 비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현지에 상당한 일부분은 한족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민족성분은 비교적 복잡하다. 중국의 북방과 몽고초원에는 서로 다른 민족이 동일한 지역에 잡거할 때, 옛 사람들은 왕왕 소재지의 지역명칭을 더하여 주도적인 작용을 한 민족의 명칭 앞에 붙여서, 잡거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잡거한 서로 다른 민족간의 융합이 완성되면, 이 지명은 바로 새로 나타난 민족의 명칭으로 되는 것이다. 주몽의 부족을 부여로 부르는 것은 그 통치집단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부여족이 건립한 또 다른 나라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앞에는 '졸본'이라는 지역명이 들어 있는데, 이것으로서 명백히 표시한 것은 이 부족이 비록 부여로 표시되지만, 다른 부여족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주몽의 부족은 부여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민족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하고, 주몽의 부족내에는 이미 민족융합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졸본부여가 한나라의 고구려현의 관할구역에 들어간 이후에 다시 구려호, 진번인, 한인등의 민족과 혼거하면서 민족간의 융합이 시작된다. 민족성분으로 보자면 졸본부여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게 바뀌었다. 특히 새로운 지역에 잡거하고 있는 민족인 구려호, 진번인은 원래 졸본부여에는 없던 민족들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라는 명칭으로 이들까지 포괄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졸본부여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민족을 반영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다시 한번 소재지의 지명을 따서 새로운 공동체를 부르게되었는데, '고구려'라는 말이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고구려민족이 형성된 이후에도, 계속하여 다른 민족과 융합을 이루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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