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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동북공정

고구려민족의 기원 추적 (1)

by 중은우시 2006. 7. 13.

작자 : 양군(楊軍) : "사회과학전선" 2002년 2기에 발표한 내용임.(여기에서 주석은 생략함.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사람은 원문을 보아야 할 것임.) http://www.eurasianhistory.com/data/articles/a02/6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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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력족의 족원은 주로 두 갈래이다. 하나의 갈래는 동북토착민족집단이고, 다른 하나의 갈래는 북부여국이 남쪽으로 이동한 민족집단이다. 본문에서는 이 두 방면에서 고구려민족의 기원을 추적하여 얘기해볼까 하며, 사학계의 선배들이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고구려민족중에서 부여국에서 이동해온 사람들은 부여족이 중심이며, 고구려의 통치집단은 스스로 부여사람에서 나왔다. <<호태왕비>>에는 "시조 추모왕이 기업을 열었으니,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 <<고려대형염모묘지>>에서는 "추모성왕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하여, 모두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동부여왕인 금와의 양자이다. 주몽은 부족을 이끌고 동부여에서 나왔으며 이 때가 "한 효문제 건소2년 즉 기원전 37년이었다"라고 하여 고구려는 동부여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중국사서인 <<상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에는 비록 모두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였으나, 부여사람을 북부여와 동부여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사서인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기록하기를 "전한서 선제신작3년임술4월8일, 천제가 흘승골성에 내려왔고,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차를 타고, 수도를 세우고 왕으로 칭하였다. 국호는 북부여라고 하였으며, 자칭 해모수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부루이다. 해(解)를 씨(氏)로 하였다. 왕은 후에 상제의 명에 따라, 수도를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자 북부여를 이어 흥하니, 수도를 졸본부에 세웠으니, 졸본부여이다. 즉,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국사. 고려본기>>를 인용하여 "먼저 북부여왕 해부부, 동부여로 피했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고 하여, 해부루의 부족은 원래 북부여라고 불리웠는데, 동쪽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동부여라고 고쳐불렀다는 것이다. 중국사서인 <<삼국지>. <<후한지>>에서는 부여에 대하여 "모두 원래 예, 맥의 땅이며, 부여왕이 그 가운데 있었고, 스스로 '망인(亡人)'이라고 불렀다" <<논형.길험>>, <<위략>>, <<후한서. 동이전>>은 모두 부여인의 시조가 남쪽으로 옮긴 전설을 기재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지>>, <<후한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부여는 바로 동쪽으로 옮긴 다음에 동부여라고 개명한 원래의 북부여임을 알 수 있다. 구구려인의 통치집단은 바로 이 부여인의 가지에서 나왔다.

 

<<논형.길험>>, <<위략>>, <<후한서. 동이전>>에 기록하고 있는 부여인의 시조기원전설과 <<호태왕비>>,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조선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고구려인의 시조기원전설은 서로 같다. 이것은 고구려인의 통치집단이 동부여와 동일한 이동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동이전에, 고구려인의 선조는 북부여의 구성부분으로 흉노의 왼쪽땅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부여인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의 구성부분이 되었고, 한문제건소2년에 동부여로부터 갈라져나와 남하하여 독립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주몽의 부족은 비록 부여인이 주체이기는 하였으나, 상당수 부여국내의 기타 민족들도 섞여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국은 "원래 예, 맥의 땅에 있고, 부여왕이 그 가운데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부여국의 민족이 3개의 큰 계통 즉, 예, 맥, 부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주몽은 부여왕 금와의 양자이므로, 부여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협보, 합보, 섬보중 어느 것으로 읽어야 할지...)의 세 사람"과 함께 남하하였다. 오이와 마리는 기원후14년에 "2만의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 양맥을 정벌하였고 그 나라를 멸하였으며, 병사를 이끌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이 때는 주몽이 남쪽으로 이동한 지 이미 51년이 되는 때였다. 오이, 마리가 주몽과 이동한 때 겨우 20살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때는 이미 70여세가 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앞의 세 명의 왕중에 주몽은 40년을 살았고, 그 아들 유리명왕은 약56세를 살았다. 대무신왕이 가장 오래 살았으나 겨우 61세였다. 오이, 마리가 70여세가 되도록 아직 건재했으며, 병사를 이끌고 원정을 하였다는 것은 믿기 힘든 점이 있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중국사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이 오인(烏引), 오위(烏違)등 2 사람을 이끌고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갔다"고 되어 있으며, 오이의 이름은 없다. 그러므로 오이, 마리는 아마도 주몽을 따라간 부족의 명칭일 수 있다. 장기간의 옛날 역사에 대한 신화작업이 이루어진 후에 그 시조기원에 대한 전설에서 사람의 이름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오이는 <<삼국사기>>에서는 조이(鳥伊)라고도 되어 있다. 또한 이(伊)는 <<동국사략>>에서는 이(夷)로 쓰고 있다. 그래서 오이는 조이(鳥夷)라고도 쓸 수 있다. <<상서. 우공>>에는 "도이(島夷)"라는 말이 나오는데, 도는 원래 조였으나 당나라 때 고친 것이다. 왕숙의 주석에 의하면 "조이는 동북이국의 나라이름이다"라는 것이다. 즉, 요임금시대의 동북에 있던 고민족이라는 것이다. 오이의 원형은 조이부족일 수 있고, 바로 부여국내의 예족이다. 고구려라는 단어는 <<궐특근비문>>에 의하면 "Bokli"이며 한자로 표시하면 바로 마리(摩離)가 된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구려는 일명 맥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마리는 맥의 변음이다. 그래서 마리는 바로 맥이라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족의 별칭이다. 마리의 원형은 바로 부여족의 맥인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주몽이 부족을 이끌고 동부여에서 남하할 때, 상당한 예족, 맥족들이 따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부여왕이 주몽에게 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내 신하들을 유인해서 끌고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모아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주몽의 남하가 단순히 부여국의 통치계급인 부여족만을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부여국내의 피통치민족인 예족과 맥족도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몽의 부족중에,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 것은 여전히 부여인이다. 그러므로, 주몽이 막 졸본천에 도착해서 나라를 세울 때, 졸본부여라고 불렀던 것이다.

 

부여국이 "원래 예, 맥의 땅에 있으며 부여왕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데서 보면, 나라의 통치계급은 부여족이고, 피통치계급은 예, 맥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읍락이 모두 제가(諸加)에 속한다" "적이 있으면, 제가는 스스로 싸우고, 아랫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다"라는 기재에서 보면, 부여국에서 성행한 것은 상당히 강한 군사이민적인 성격의 영주제였으며, 이와 같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예족과 맥족에게 일을 시켰고, 부여족의 원래 부족조직은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 "읍락에는 귀족이 있으며, 아랫백성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보면, 부여인과 예족, 맥족간에는 동일한 족속이라는 인식이 있기 보다는, 부여인과 예족 맥족이 관계가 정복민족과 피정복민족의 관계라를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원인으로 피정복자들은 스스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부득이 "제가들이 스스로 싸웠"을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고기>>를 인용한 기재에 따르면, 부여인은 기원전 59년에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주몽이 부족을 이끌고 부여국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기원전 37년이다. 부여인과 이전한 후의 원주민인 예족, 맥족은 짧은 22년의 기간내에 민족융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주몽의 부족은 이 세개 민족을 포함하고 있었고, 주몽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필요로, 주몽은 무리들 중 부여족이건 예족이건 맥족이건 모두 무장시키면서, 예전의 정복민족과 피정복민족의 경계선은 점차 소실되고, 모두 주몽을 따르는 군사력이 되고, 공동의 통치집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리명왕33년에, "왕은 오이, 마리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양맥을 정벌하게 하였다" 예인과 맥인으로 조직된 부대가 또 다른 맥족인 양맥을 치러 간 것이다. 이것은 주몽을 따라 남하한 예족과 맥족은 이미 고구려정권의 주요한 군사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국에서 예족과 맥족은 무장할 수 없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점이고, 이것은 주몽의 무리내에서 부여인과 예족 맥족은 이미 새로운 정치공동체로 융합되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을 나타낸다. <<삼국사기>>의 기재를 보면, 이러한 결합과정은 2대에 걸쳐 이루어지며 약 50여년의 시간이 걸린다. 이처럼 빠른 시일내에 융합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의 특수한 역사환경에 따른 것이다.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출현은 민족융합에 거대한 촉진작용을 하였다.

 

<<한원. 고구려>>의 주석에 따르면 고구려의 오부는 "모두 귀족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에는 3만호가 있는데,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그저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구이고, 아랫백성들이 쌀 양식 물고기 소금을 공급한다"고 기재하고 있다. 만일 1호에 5명이라고 계산하면, "대가"의 인구는 전체인구의 15분의 1을 차지한다. 귀족이 총인구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이처럼 높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가"는 <<통전>>에서 말하는 "귀인"이고, 바로 주몽이 이끌고 온 부여인과 예맥족이 융합해서 형성된 통치집단이다. "아랫백성(下戶)"은 그들이 정복한 현지의 원주민이다.

 

주몽이 부족을 이끌고 졸본천일대에 오기 이전에, 여기에는 이미 부여인의 방국이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말로 옛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한다" 주몽이 나라를 세운 다음해에 비류국의 소재지를 다물부로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구구려의 "언어와 제반 일들은 많은 것이 부여와 같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구려말은 바로 부여인들의 언어이고, 주몽을 대표로 하는 고구려통치자인 부여인들은 비류부를 수복하는 것은 바로 부여민족의 옛땅을 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비류부도 부여인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주몽이 오기 전에 이미 졸본천에 와서 거주했다는 것이다. 유리명왕이 동부여에 있을 때, 그의 모친은 그에게 말하기를 "너의 부친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라가 받아들이지 못했고, 남쪽으로 되돌아 도망가서(逃歸南地)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위 "남쪽으로 되돌아 도망"갔다는 말은 바로 부여인의 남쪽의 옛땅을 회복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주몽의 무리가 남하하기 이전에 졸본천에는 이미 부여인의 부족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한다. 주몽이 이 지역으로 옮겨온 후에 두 부족은 원래 동족이므로, 빠른 시일내에 융합되었다. 유리명왕은 "다물후 송양(松讓)의 딸을 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유리명왕 이후에, 계속하여 부여인의 남하와 고구려인의 결합이 지속된다.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재되어 있는 바와 같이 대무신왕이 부여를 공격한 후, 부여왕 종제가 "만여명과 투항하자, 왕은 왕에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고 하고 있다. <<동국통감. 고구려>>는 "연나부에 두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연나부가 원래 부여에서 항복해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부여왕 종제를 따라 투항한 사람을 "국인(國人)"이라고 부르고 "아랫백성(下戶)"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부여국의 통치계급에 속한다는 것. 즉, 부여족과 고구려왕실은 기원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연나부는 대대로 왕실과 통혼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민족의 기원이 같으므로, 이 부여인들은 쉽게 고구려민족으로 흡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