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민초사운(民初思韻)
고구려민족의 족원(族源)은 비교적 복잡하다. 몽골초원 동부에서 온 맥인(貊人), 부여인(夫餘人)도 있고, 동북의 오래된 거주민인 예인(濊人), 구려인(句麗人), 진번인(眞番人)도 있고, 또한 중원에서 온 한인(漢人)도 있었다. 고구려정권의 통치하에, 위에서 언급한 민족들이 장기간 민족융합을 진행하여 나중에 새로운 민족공동테가 되고 그 정권의 칭호를 따서 "고구려인"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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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족중 부여국에서 이주해온 부분은 '부여족'을 주체로 하며, 고구려의 통치집단은 부여인에게서 나왔다. <호태왕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기반을 세웠다. 북부여 천제(天帝)의 아들이다." <고려대형염모묘지(高麗大兄冉牟墓誌)>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추모성왕(鄒牟聖王)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 모두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다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동부여왕 금와(金蛙)의 양자이고, 주몽이 무리를 이끌고 동부여에서 나온 것은 "한효원제 건소2년(기원전37년)"이라고 하여, 고구려가 동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중국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 <후한서.동이전>에는 모두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지만, 부여인에 대하여 동부여인지 북부여인지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사서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전한서선제 신작3년 임술 사월 팔일, 천제는 흘승골성(訖升骨城)(大遼醫州界에 있다)로 내려와, 오룡거를 타고, 도성을 세우고 왕을 칭한다. 국호는 북부여라 하고, 자칭 해모수(解慕漱)라 한다.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부루(扶婁)이며, 해(解)를 씨(氏)로 한다. 왕은 상제의 명으로 인하여, 도성을 동부여로 옮긴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를 이어 흥했고, 졸본주(卒本州)를 도읍으로 삼으니 졸본부여이다. 즉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국사.고려본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북부여왕 해부루가 땅을 피하여 동부여로 온다. 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이는 해부루가 소속된 부락은 원래 북부여라고 했는데, 동쪽으로 옮겨간 후에 동부여라 칭하게 된 것이다. 중국사서 <삼국지> <후한서>에 전(傳)을 둔 부여는 "대체로 본래 예맥(穢貊)의 땅이다. 부여왕이 그 가운데 있고, 스스로 '망인(亡人)'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있다." <논형.길험>, <위략>, <후한서.동이전>에는 모두 부여인의 시조가 남으로 옮겨간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삼국지> <후한서>에서 기재된 부여는 바로 동천후에 동부여로 개명한 원래 북부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의 통치집단은 이 갈래의 부여인에게서 나왔다.
<논형.길험>, <위략>, <후한서.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인의 시조기원전설과 <호태왕비>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한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인의 시조기원전설을 같다. 이는 고구려인의 통치집단과 동부여는 같은 이동경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동하기 전에 고구려인의 선조는 북부여(즉, 탁리국(橐離國))의 구성부분이었고, 흉노의 왼쪽에 거주했으며, 나중에 부여인과 함께 동천하여, 동부여의 구성부분이 된다. 한원제 건소2년 동부여(즉, <삼국지>, <후한서>에 기재된 부여)에서 나와 남하하여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몽의 무리는 비록 부여인을 주체로 하였지만, 상당부분 부여국내의 기타 민족들도 섞여 있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부여국이 "원래 예,맥의 땅이고, 부여왕이 그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는데, 부여국의 민족은 모두 3대계통으로 나뉜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 맥, 부여.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주몽은 부여왕 금와의 양자이니, 부여인에 속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陝父)등 3명"과 남천한다. 오이와 마리는 기원14년, "병력 2만을 이글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토벌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키며, 병력을 진군시켜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취했다". 이때는 주몽이 남천한지 이미 51년이 지났다. 오이,마리가 설사 주몽이 남천할 때 겨우 20살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이미 70여세인 것이다. 고구려의 최초 3명의 왕 중에서 주몽은 40세까지 산다. 그 아들 유리명왕은 약 56세까지 살았고, 대무신왕이 가장 장수하였지만 겨우 61세까지 살았다. 오이, 마리가 70여세에도 건재했고,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세 명의 이름은 중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위서.고구려전>에는 "주몽이 오인(烏引), 오위(烏違)등 2명과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갔다"고 적고, 오이는 없다. 그렇다면 오이, 마리는 아마도 주몽을 따라 이주한 부족의 명칭일 것이다. 장기간 고대사는 신격화된 이후, 그 시조기원전설이 인명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오이(烏伊)를 <삼국사기>에는 조이(鳥伊)라고 적었다. '이(伊)'자는 <동국사략>에 이(夷)라고 적었다. 즉 오이는 "조이(鳥夷)"라고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상서.우공>에는 "도이피복(島夷皮服)"이라는 말이 있는데, 도(島)자는 원래 조(鳥)였는데, 당나라때 사람이 '도'로 바꾼 것이다. 왕숙(王肅)의 주석에는 "조이(鳥夷), 동국 이국(夷國)의 명칭이다"라고 적었다. 즉 요임금시절의 동북지방 고민족인 것이다. 오이의 원형은 바로 조이인일 것이다. 즉 부여국내의 예인(穢人)이다. 고구려의 <궐특근비문(闕特勤碑文)>에서는 "Bokli"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자표음으로는 바로 마리(摩離)이다.
<후한서.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구려(句驪)는 일명 맥(貊)이다." 마리는 바로 맥의 변음이고, 마리는 바로 맥이다. 즉 고구려족의 별칭이다. 마리의 원형은 바로 부여국내의 맥인(貊人)이다. 이를 통해 증명되는 것은 주몽이 이끄는 부족이 동부여에서 남천할 때 상당한 부분의 예인, 맥인들이 따랐다는 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부여왕이 주몽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신하(臣)들을 유인하여 이곳으로 도망쳤으니, 모아서 국가를 이루려는 것이구나" 이는 주몽을 따라 남하한 것이 부여국의 통치민족인 부여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부여국내의 피통치민족인 예인과 맥인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몽이 이끄는 무리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 것은 당연히 부여인이다. 그래서, 주몽이 막 졸본천에서 나라를 세웟을 때 졸본부여라고 칭했던 것이다.
부여국은 "본래 예맥의 땅이고, 부여왕이 그 가운데 있다"는 기록을 보면, 통치민족이 부여이고, 피통치민족은 예인과 맥인임을 알 수 있다. "그 읍락은 모두 제가(諸加)에 속해 있다" "적이 있으면, 제가가 스스로 싸우고, 하호(下戶)는 함께 식량을 지고와서 그들을 먹인다" 이 내용을 보면, 부여국에서 성행한 것은 상당히 강한 군사이민성격의 영주제라는 것이다. 자체방어 및 정복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인과 맥인을 부렸다. 부여인의 옛 부족조직은 약화되지 않은 것이다. "읍락에는 호민(豪民)이 있고, 하호는 모두 노복(奴僕)이 되었다." 이를 보면, 부여인과 예인, 맥인간에는 심리적인 동질성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인과 예인, 맥인의 관계는 정복민족과 피정복민족의 관계였던 것이고, 바로 이런 원인으로, 피정복자가 병사가 되는 권리를 빼앗았고, 부득이 '제가가 스스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인은 기원전59년 동천했고, 주몽의 무리가 부여국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기원전37년이다. 부여인이 이주해간 곳의 원주민인 예인, 맥인과 겨우 22년이라는 시간만에 민족융합을 완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주몽의 무리는 3개민족을 포함한다. 다만 주몽의 무리가 남하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필요로 주몽이 이끄는 부여인과 예인, 맥인간의 원래의 통치민족과 피통치민족이라는 경계선은 점차 사라지고, 공동으로 주몽정권이 의존하는 역량이 되어 공동으로 통치집단을 구성한 것이다. 유리명왕 33년, "왕은 오이, 마리에게 명하여,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양맥을 토벌하게 했다" 예인과 맥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출정하여 또 다른 갈래의 맥인인 양맥을 토벌한다. 이는 주몽을 따라 이주한 예인과 맥인은 이미 고구려정권의 중요한 군사역량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여국내에서 예인,맥인은 군인이 될 수 없었던 것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는 주몽이 이끄는 무리내에서 부여인과 예인, 맥인은 이미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공동체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 결합과정은 겨우 2대에 걸쳐 개략 50년의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신속하게 진행된 것은 마땅히 위에서 언급한 특수한 역사환경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출현은 민족융합에 크게 촉진작용을 한다.
<한원.고구려>의 주석에서는 고구려의 오부(五部)는 "모두 귀인의 족(皆貴人之族)"이라고 적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고구려가 겨우 3만호(戶)라고 했다. "나라 가운데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구(口)였다. 하호는 멀리 쌀과 양식, 물고기와 소금을 그들에게 공급했다." 만일 1호를 5구로 계산하면, "대가"의 인구는 총인구의 15분의 1을 차지했다. 귀족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렇게 높을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가"와 <통전>에서 말하는 "귀인"은 바로 주몽이 이끄는 부여인과 예맥인이 결합하여 형성된 통치집단일 것이고, "하호"는 그들에게 정복된 현지의 기존 거주민들일 것이다.
주몽이 이끄는 무리가 졸본천일대로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는 이미 부여인의 방국(方國)이 있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고구려말(麗語)로 옛땅을 회복하는 것(復舊土)을 '다물(多勿)'이라고 했다." 주몽이 나라를 세운 다음해에 비류국(沸流國)의 소재지를 다물부(多勿部)로 한다. 비류부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부여민족의 옛땅을 수복한 것이다. 이를 보면, 비류부도 부여인에 속한다. 즉, 부여인이 남천한 옛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는 또한 주몽의 무리가 남하하기 전에 졸본천 현지에는 이미 부여인의 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몽의 무리가 이 지역으로 들어온 후, 동족인 관계로, 양자는 금방 하나로 결합한다. 유리명왕은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비(妃)로 들였다."는 것이 이 점을 증명한다.
유리명왕이후, 계속하여 부여인이 남하하여 고구려인과 결합한다.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기재된 것으로, 대무신왕이 부여를 공격한 후,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만여명과 와서 투항한다. 왕은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한다." <동국통감.고구려>에는 "연나부를 설치했다"고 했다. 이는 최초로 설립된 연나부는 바로 부여에서 항복해온 사람들을 안치시킨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왕의 종제로 항복한 자를 '국인(國人)'이라고 했고, '하호라고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들은 부여국에 속하는 통치민족, 즉 부여족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왕실과 족원이 같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연나부는 대대로 왕실과 통혼하는 특권을 갖게 된다. 족원이 같으므로, 이 부분 부여인들은 금방 고구려족에 융합되어 들어간다.
2
비록 남하한 부여인이 고구려의 통치집단을 구성했지만, 고구려의 족원의 주도방면은 그러나 토착거주민집단이었다. 주몽의 무리가 동부여에서 남하하기 전에, 후세 고구려족 거주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주로 예인, 맥인, 구려인, 진번인이었다. 그리고 중원에서 온 한인도 있었다.
이 지구의 토착거주민중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예인이었다. <한서.무제기>는 무제 원삭원년(기원전128년), "동이의 예족의 군주(穢君) 남려(南閭)등 28만명이 항복해 와서, 창해군(蒼海郡)이 된다." 1호에 5구로 계산하면, 예인은 총계 5만6천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재된 조위(曹魏)시기 고구려 3만호, 예인 2만호, 옥저인(沃沮人) 5천호, 총합계가 겨우 5만5천호이다. 이를 보면 예인은 널리 분포되었고, 예인이 이 지역내의 다수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인의 분포범위는 서남으로는 단단대령(單單大嶺)에 이른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예는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단단대령의 서쪽은 낙랑(樂浪)에 속하고, 영의 동쪽 7현은 도위(都尉)가 다스린다. 모두 예를 백성으로 한다." 이는 단단대령은 고조선과 예인의 정치예속관계의 분계선임을 설명하는 동시에, 고조선족과 예인민족거주지의 분계선이기도 하다. 서북은 흉노좌지(左地)와 접해 있다. <사기.흉노열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러 좌방왕장은 동방에 거주했고, 직상곡이왕자는 동으로 예맥,조선에 접해 있다." 이 예맥과 흉노는 접해 있고, 마땅히 고조선의 북쪽이다. 북으로는 한나라때 부여인의 거주지에 이른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나라에 고성(故城)이 있는데 예성(穢城)이라 한다. 본래 예맥의 땅이다." <후한서.동이전>에는 직접적으로 "본래 예의 땅이다"라고 적었다. <산해경.해내서경>의 곽박(郭璞)의 주석에서도 "부여국은 바로 예맥의 옛땅이다."라고 하였다. 동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예전(穢傳)"에는 "동으로 대해에 이른다(東窮大海)"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부여족이 동북에 진입한 후 일부 예인의 거주지역을 점거하여 부여, 고구려정권을 세운 이후, 아직 직접 부여인 혹은 고구려인에 예속되지 않은 예인의 분포범위이다. 다만, 예국에서 반어(班魚)가 나온다는 말을 참고해보면, 부여인이 예인의 거주지에 들어오기 전에, 예인의 동쪽 경계는 바다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삼국지>, <후한서>에 기재된 후세의 부여, 옥저, 고구려등 족의 거주지는 일찌기 모두 예인의 분포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몽의 무리가 남천한 후 진입한 지역의 다수민족도 바로 예인이었다.
<사기.조선열전>에서는 위만(衛滿)이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정권을 탈취하기 이전에 이미 "약간 진번(眞番), 조선(朝鮮) 만이(蠻夷)에게 예속되었다." 이 진번은 당연히 부족명칭이다. 진번국은 아마도 부족명칭을 국호로 삼은 것일 것이다. 진번군의 위치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낙랑군 이남이 기씨조선의 후예가 건립한 한국(韓國), 임둔군(臨屯郡)이남은 마한에서 분리해 나온 진국(辰國)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진번군은 단지 현도군(玄菟郡) 이북일 것이다. 부여인이 남하하여 가장 먼저 진입한 곳이 바로 사군(四郡)중 가장 북쪽에 있던 원래 진번군의 소재지일 것이다. 즉 진번인의 거주지역이다.
이 지역은 당시에 이미 현도군에 병합되었다. 그래서 고구려국은 현도군의 통할을 받기 시작한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항상 현도군으로부터 조복의책(朝服衣幘)을 받았고, 고구려령이 그 이름이 적힌 장부를 관리했다." 이는 고구려국이 한의 현도군의 수현 고구려현에 예속되었음을 설명한다. 다만 이때의 현도군은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킬 때의 현도군 옛땅에 있지 않다. <한서.지리지> 현도군에는 주석으로 응초(應劭)의 견해를 인용하여, 현도군은 '옛 진번, 조선 호국(胡國)이다.' 다만,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후한서.동이전>에서 말하는 "한소제 시원5년, 임둔, 진번을 파하고 낙랑, 현도에 병합"한 이후의 정치구획이다. 이때의 현도군의 관할구역 일부분은 원래 진번군이고, 다른 일부분은 "조선호국'이다. <한서.지리지> 고구려현에 응초의 견해를 주석으로 인용한 바에 따르면, 고구려현은 "옛 구려호(句驪胡)이다." 이를 보면 현도군의 소위 '조선호국'은 바로 '구려호'이다. 마땅히 그들이 위씨조선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호국'이라고 칭한 것이다. 현도군은 한소제 시원5년(기원전82년) 고구려현으로 이주할 때,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그것을 "군을 구려서북으로 옮기다(徙郡句驪西北)"라고 하였다. 이 명칭의 출현은 주몽의 남천보다 이르다. 이를 보면, 당시 고구려헌 동남에 거주하던 '구려호'와 나중의 고구려족은 동일한 민족이 아니다. <한서.지리지>에 "현도, 낙랑은 한무제때 설치했다. 모두 조선, 예맥,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즉 일찌감치 한무제가 조선을 멸할 때, 이 '구려만이'는 이미 존재했고, 위씨조선에 예속되어 있었다. <후한서.동이전>에는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았다." 이는 현도군 고구려현은 이 족속의 거주지이므로 그러한 명칭을 얻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기 전에 이 족은 '고구려' '구려호' '조선호국' '구려만이'등 여러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의 아들 유리명왕때, 졸본부여의 세력이 이 지역으로 진출한다. <후한서.동이전>은 이 부족을 고구려전에 넣은 것으로 보았을 때, 마땅히 졸본부여와 민족융합이 이러우졌을 것이고, 그후에 졸본부여는 고구려로 개칭한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예인과 옥저는 <삼국지> <후한서>에 모두 단일 전(傳)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구려호와 진번은 전(傳)이 없다. 이는 전자는 비록 고구려에 예속되었지만, 여전히 본민족의 민족특성을 유지하여 졸본부여와 민족융합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옥저를 "구려에 신하로 복속(臣屬)했다. 구려는 다시 그중의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관리하도록 했고, 다시 대가(大加)로 하여금 그 조세를 모두 책임지게 했다." 이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중국사서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小水)에 의존하여 나라를 세웄다. 그래서 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했다." 한국사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양맥(梁貊)의 나라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증명한다. 주몽의 무리가 남천하기 전에 현지에는 이미 상당한 수량의 맥인들이 살고 있었다.
졸본부여가 이주해온 지역에는 일찌감치 중원한인도 거주하고 있었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전연(全燕)때부터, 일찌기 진번, 조선에 속했고, 관리를 두고 장벽을 쌓았다." 이미 중원인이 진번지역에 진입한 것이다.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한비(漢妃)가 있었다는 것도 그것을 증명한다. 졸본부여가 현도군 고구려현의 관할지역으로 진입한 후, 중원문화와의 접촉이 갈수록 많아졌다. 주몽이 이끄는 부여인, 예인, 맥인은 현지의 예인, 맥인, 구려호, 진번인, 한인과 민족융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문화요소를 받아들인다. <삼국지.위서.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국의 관명은 주부(主簿), 승(丞)인데, 이는 고구려인의 오부(五部) 부장에 대한 칭호이다. 이는 한왕조의 현령속관의 관칭이다. 명백히 고구려국이 한나라 고구려현의 제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구려인은 "영성(靈星), 사직(社稷)에 제사지냈다" 이는 모두 중원의 제사를 모방한 것이다. 특히 영성사(靈星祠)는 <사기.봉선서>에 따르면, 한고조가 처음 '군국현에 영성사를 세우도록 했다" 이 또한 고구려국의 한에 대한 의부(依附)관계를 말해주고, <삼국지>에서 "고구려령이 그 이름이 적힌 장부를 관리했다"는 주장도 확인해준다.
위를 종합하면, 고구려의 족원은 다양하다. 주몽이 이끄는 무리가 최초로 졸본천에서 나라를 세울 때, 국내에는 최소한 부여, 예, 맥의 3대민족이 있었다. 모든 민족은 원주민과 이주자의 두 부분이 있었다. 유리명왕에게 한비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현지에 아마도 일부 한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족성분이 비교적 복잡했다. 중국의 북방과 몽골초원에 서로 다른 민족이 동일지역에 잡거할 때, 고대인들은 왕왕 소재지의 지명에 당히 지역에 주도적인 작용을 하는 부족의 족명을 붙여서 잡거하는 각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불렀다. 잡거하는 서로 다른 민족간에 민족융합이 완성되면, 이 지명도 새로 나타난 민족의 족명으로 바뀌게 된다. 주몽의 무리가 '부여'라고 불리웠던 것은 그 통치집단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부여인들이 건립한 또 하나의 국가로 인식되었다. 다만 앞에 '졸본'이라는 지명을 붙여서 명확하게 표시했다. 이 무리는 비록 부여라고 불리지만, 다른 부여인들과는 다르다. 주몽의 무리가 모두 부여인이 아니라 다민족공동체라는 것을 표시했다. 또한, 주몽의 무리내부에서 이미 민족융합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표시한다. 졸본부여가 한 고구려현 관할구역으로 진입한 후, 다시 구려호, 진번인, 한인등 민족과 잡거하게 된다. 민족성분으로 말하자면, 졸본부여때보다 더욱 복잡해졌따. 특히 새로운 지역에서 잡거하는 민족에는 구려호, 진번인이 있는데, 모두 원래 졸본부여에서는 포함되지 않은 민족성분이다. 이는 모두 졸본부여라는 이 명칭으로 개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졸본부여라는 명칭은 이미 정확하게 이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가리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소재지의 지명을 따서 새로운 공동체를 부르게 된다. 이들이 있는 곳이 한나라 고구려현 치하였으므로, 고구려현을 채용하여 고구려로 개칭한 것이다. 그 집단내에서 민족융합이 완성된 후, 고구려라는 단어는 바로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족칭이 되었다. 고구려족이 형성된 후, 계속하여 다른 민족과 민족융합을 진행한다. 다만 이는 이미 본문에서 논의할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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