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북성의 약칭은 악(鄂)이다. 약칭을 초(楚)로 하지 못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초나라의 강역이 너무 넓어, 중심지는 호북성이었지만, 호남성도 초나라의 옛땅이므로, 초라는 명칭보다 호북성의 명칭으로 악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북성에서는 호북성의 약칭(簡稱)이 악보다는 초로 쓰는 것이 더욱 적합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역사자료에 기재된 시간상으로 보면 "악(鄂)"이 호북에서 나타난 시기는 "초(楚)"에 비해 늦었다. 악나라는 서주말기에 비로소 호북지역에 출현했다. 그러나 초나라는 주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할 때 참여한 공이 있어, 서주초기에부터 주왕조에 의하여 지금의 호북성 남장(南漳)일대에 봉해졌다. 만일 고대에 호북경내에 나타난 국가의 명칭으로 성의 약칭을 삼는다면, 건립시기가 이른 국가가 시간적으로 늦은 나라에 비하여 명칭상의 우선권을 가졌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장단으로 보더라도, 악국은 춘추중기에 이미 초나라에 의하여 멸망하여 초나라의 봉읍의 하나가 되었으므로 나라로서 존재한 기간은 200여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나라는 전국말기까지 700여년을 존속하였고, 계속하여 호북을 근거지로 하였다. 존재하였던 기간이 긴 나라가 당연히 존재하였던 기간이 짧은 나라보다는 우선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역사기록에 기재된 면적으로 보더라도, 악나라는 춘추중기에 지금의 호북성 악주일대에 성립되어 있었고, 호북성면적의 약1/5정도에 불과한 땅을 다스렸다. 그러나 초나라는 춘추중기부터 이미 호북성 전부를 점령하였다. 초나라의 수도는 계속 호북성내에 있었다. 초나라는 춘추오패의 하나일 뿐아니라, 전국칠웅의 하나이고, 한 때는 세계최강의 국가였다. 국토면적이 큰 나라가 국토면적이 적었던 나라보다는 우선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 역사기록에 남은 문화적인 성과를 놓고 보더라도, 악나라는 옛 구리광산을 경영한 것으로 하여 청동야금에서 일부 성과를 낸 것을 제외하고는 역사상으로 족적을 남긴 것이 없다. 그러나 초나라는 당시 중국 최고수준의 초문화를 형성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과학기술에서도 혁신을 이루고, 음악무용, 회회조각에서도 초나라문화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세계최고수준의 문화는 동방의 초문화와 서방의 그리스문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글자의 의미로 부더라도 "악"은 금문에서는 "악(噩)"으로 쓰는데, 악어(鰐魚)라는 의미이다. 악어는 형상이 무섭게 생기고 성격이 흉포하다. "초"는 갑골문에서는 수풀 림(林)자와 다리 족(足)을 쓴다. 의미로서는 깊은 산의 밀림에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초나라 사람들이 형극을 헤치면서 진취적으로 개척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들의 역사적인 명칭습관을 놓고 보더라도, "초", "초천(楚天)" "형초(荊楚)"는 모두 호북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호북에서 배출된 걸출한 인재를 "초천영걸(楚天英傑)"이라고 부른다든지, 호북성의 운동선수를 "형초건아(荊楚健兒)"라고 부른다든지, 호북을 "형초대지(荊楚大地)"라고 부른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호북의 면직품을 초포(楚布)라고 부르고 호남의 비단을 상수(湘繡)라고 부른다. 호북경내의 강을 초수(楚水)라고 부르는데, 이태백의 <<강하별송지제>>라는 시에서 "초수청약공(楚水淸若空)"이이라고 하고 있다. 각 성의 약칭을 보면 선진시대의 국명을 약칭으로 삼고 있는데, 산서는 진(晉), 산동은 노(魯)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호북성에 대하여 "악"보다는 "초"로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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