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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소림사(少林寺)

by 중은우시 2006. 3. 23.

 

 

2006년 3월 22일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소림사를 다녀갔다. 그러면서, 소림사는 다시 한번 미디어가 주목하는 장소가 되었다.

 

소림사는 하남성 등봉시(登封市) 소실산(少室山)의 아래에 있는 총림(叢林)중에 있어서, 이름을 소림사라고 하였다. 소림사를 가려면, 반드시 등봉시를 지나가야 한다. 정주(鄭州, 하남성의 성도)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2시간이 안걸려 등봉시에 도착하게 된다. 등봉시는 도로가 넓고, 정갈하며, 구획이 잘 되어 있고, 새 건물이 많다. 눈에 바로 띄는 것은 새롭게 지은 참신한 학교에 써놓은 간판과 건물들이었다. 이 학교들은 거의 모두 소림무술학교(少林武術學校)이다. 등봉시에는 약 100여개의 소림무술학교가 있다. 여기는 이미 중국의 무술중심이 되었고, 세계의 무술중심이 되었다. 중국각지의 무림제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뿐아니라, 세계각지의 무술서양제자들이 명성을 듣고 찾아오고 있다. 소림사의 명성은 일찌감치 등봉시의 명성을 눌러버렸다. 소림사를 언급하면 누구나 다 알지만, 소림사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열에 여덟, 아홉은 소림사가 등봉시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소림사는 천년고찰이다. 고증에 따르면, 북위 태화19년(495년) 효문제가 인도고승 발타(跋陀)를 위하여 소림사를 지었다고 한다. 발타는 소림사에 도착한 후, 오랫동안 여기에 머물며 소승불교를 전수했다. 소림사는 수당시기에 이미 이름을 날렸다. 송나라때 소림무술은 이미 체계를 갖추고 세상에서는 "소림파"라고 불렀다. 원명시기에 소림사는 가장 흥성한다. 2천여명의 승려를 가지게 된다. 청나라에 들어선 후에는 소림사가 점차 쇠락한다. 특히 1928년, 군벌의 혼전시기에 군벌 석우삼(石友三)이 소림사를 불질러 버린다. 큰 불은 40여일을 계속하여 탔으며, 소림사의 천왕전, 대웅보전, 법당과 종루등 주요한 건축물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소림사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소림사의 "문앞에 아무도 없고, 차나 말도 다니지 않을(門前冷落車馬稀)" 때, 허나의 영화가 소림사의 날로 쇠퇴하는 운명을 구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1982년 홍콩의 중원영화공사가 투자하고 장흠염이 감독하고, 이연걸이 주연한 영화 <<소림사>>였다. 이연걸은 여러차례 전국 무술종합우승을 차지한 바 있었다. 이 <<소림사>>는 이연걸의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유명해졌고,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었다. 중국의 강남강북, 장성의 안과 바깥 모두 무술의 열풍이 불게 된 것이다. <<소림소자>>, <<남북소림>>등 쿵후영화가 계속 나타났다. 소림사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관광객들은 계속 찾아왔다. 무술학교는 우후죽순처럼 등봉에 생겨났다. 이로부터 소림사의 이름은 다시 전국에 알려지게 되고,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소림붐은 등봉시의 면목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소림사의 중흥을 가져왔다. 소림사는 폐허에서 다시 일어셨다.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고, 황금색의 휘황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오늘날 소림사의 관광객은 구름처럼 몰려든다. 정거장에서는 차에 "청도", "태원"등의 글자를 붙이고 있는 관광버스를 볼 수 있고, 관광가이드는 여러 색깔의 모자를 쓰고 각종 관광단을 끌고 다닌다. 귀에서는 관광객들의 서로 다른 사투리와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소림사를 관광하기 전에 먼저 소림탑림(少林塔林)을 보아야 한다. 하나하나가 십여미터씩이나 되는 벽돌탑이다. 탑림은 사실 소림고승의 분묘이다. 소림사의 고승이 원적한 후에, 그의 생전에 불교계에서의 명망이나 공덕에 따라, 탑의 높이가 달라진 것이다. 탑림에는 현재, 당, 송, 금, 원, 명, 청 각대의 벽돌묘탑 230여기가 있다. 국내에서는 최대의 탑림이다. 그 중에 아주 낡아보이는 탑은 당나라 정원7년(791년)에 만든 것으로, 탑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며, 소림사의 유구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림사는 등봉시의 서북쪽 13킬로미터지점에 있는 산림속에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당송연간에 소림사는 누대전각 5천여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소림사는, 교모에서 당시를 초과한다. 지금 말하는 소림사는 바로 소림사의 상주원(常住院) 즉, 절안의 주지와 여러 승려들이 불교종교활동을 하고 거주하는 곳을 말한다. 상주원은 산을 따라 건축되어 있다. 산문에는 높이 "소림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것은 청나라때 강희황제의 어필이다. "소림사"편액아래로 소림사로 걸어들어갈 수 있다. 산문에서 천왕전으로, 다시 대웅보전, 장경각으로, 다시 방장실, 달마정으로 마지막에는 천불전에 이른다. 모두 7번 들어가야 한다. 양쪽 측면에는 육조전, 긴나라전, 동서선당, 지장전, 백의전등등이 있다. 지금의 소림사는 면적이 3만여평방키터에 이른다. 소림사는 "천하제일명찰"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명실상부하다.

 

소림사의 향불은 끊이지 않는다. 그 중 굵은 향은 팔목정도로 두껍다. 바깥에는 금색글자를 쓴 붉은 종이로 감싸고 있고, 수십개의 두꺼운 향이 그 속에서 조용히 타고 있다. 햇볕아래서 푸른 연기는 하늘거리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소림사는 "무술은 절때문에 이름을 날리고, 절은 무술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등봉시의 한 무술학교에서 소림쿵후를 볼 수 있다. 그 곳은 젊은 소림제자가 무술공연을 하고, 칼빛과 검그림자가 휘날리고, 봉이 날라오고 창을 날리며,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어지럽게 만든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6살된 어린 아이가 소림쿵후를 제대로 익혀서 맨손으로 소림권을 공연하는 것인데, 하나하나가 모두 뛰어나고 구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한다.

 

"천하의 무공은 소림사에서 나왔다(天下武功出少林)" 등봉시에는, 길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중에, 운동복을 입고 있는 소림제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무술학교에서 보통 3년씩 배운다.

 

등봉에는 문(文)과 무(武)가 모두 있다. 등봉성의 북쪽으로 2킬로미터지점에 있는 숭산의 자락에는, 숭양서원(嵩陽書院)이 있다. 숭양서원은 상구의 회양서원, 호남의 악록서원, 강서의 백록동서원과 더불어 중국의 사대 서원의 하나이다.

 

숭양서원에서는 송나라때의 복장을 한 "수재"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여기의 관광가이드는 모두 옛날 복장을 하고 있고, 일종의 "고대"의 분위기를 만끽하게 한다.

 

숭양서원의 원래의 이름은 숭양사(嵩陽寺)였다. 북위태화8년(484년)에 창건되었다. 송나라때, 유교의 이학대가인 정호(程顥), 정이(程이) 및 사마광(司馬光), 범중엄(范仲淹)등이 여기서 강학을 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전해지는 바로는, 사마광의 유명한 저작인 <<자치통감>>의 일부분은 여기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숭양서원에는 두개의 큰 나무(古柏)가 있다. 그 중의 한 그루는 허리 둘레가 15미터에 이른다. 전해지는 바로는, 서한원봉원년(110년), 한무제가 숭산을 유람할 때, 세 그루의 가지가 무성하고, 키가 큰 나무를 보고 각각 "대장군", "이장군"과 "삼장군"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나중에 "삼장군"은 명나라 말에 화재로 사라지고, 지금까지 "대장군"과 "이장군"은 여전히 남아 있다.

 

숭양서원안에는 또 하나의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아래에는 단을 쌓았다. 그 단의 이름은 행단(杏壇)이다.

 

숭양서원은 맑고 그윽하며, 조용하다. 확실히 글을 읽기에 좋은 곳이다. 숭양서원에서 천천히 걷다보면, 맑은 쟁(箏)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젊은 여인이 옛날 송나라때 복장을 하고서 쟁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 전문적인 음악가는 아니고, 의대를 졸업하였는데, 졸업후 현지 병원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였고, 숭양서원의 관리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쟁을 좋아하여 여기에서 쟁을 연주하면서 숭양서원의 흥취를 높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등봉에는 무로는 소림사가 있고, 문으로는 숭양서원이 있어, 가히 "문무겸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葉永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