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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설가만(薛家灣) : 중국의 산명촌(算命村)

by 중은우시 2006. 11. 6.

중국의 감숙성 영등현에는 설가만이라는 곳이 있다. 이 곳의 주민은 조상대대로 남자는 점복(占卜)을 여자는 수상(手相)을 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전통과 풍속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마치 서양의 집시들과 비슷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들이 서방에서 흘러들어온 집시족들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설가만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옹정황제와 산명선생의 이야기, 황고(皇姑)가 설가만으로 피난온 이야기와 주공과 도화낭랑의 이야기등등이다.

 

그 중 옹정황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는 동네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촌에서 점을 가장 잘보는 사람에게 자기들을 위하여 점을 쳐달라고 했다. 촌에서 한 중년의 고수가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출생시간을 알려달라고 하고는 자세히 그들의 용모를 들여다 본 후에 그들 두 사람중 한 사람은 황제의 명을 타고 났고, 다른 한 사람은 재상의 명을 타고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깜짝놀라서 서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원래 이 두사람은 옹정황제와 그의 재상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산명선생에게 물었다고 한다. "너 자신은 무슨 운명이냐" 그러니, 산명ㅅ선생은 "병부시랑의 명입니다"라고 한다. 이후 그는 모년모월모일에 북경에 들어가서 모년모월모일에 황상을 뵙고, 모년모월모일에 관직을 얻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옹정황제는 점이 맞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돌아가자마자 1개월전에 성지를 내려서 산명선생을 상경하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계속 장마를 만나서 북경으로 가는 시간이 길어져서 산명선생이 얘기했던 시간에 북경에 도착해서 황상을 만난다. 황제는 내심 깜짝 놀라고, 그에게 관직중 남아있던 하나인 병부시랑을 내린다.

 

설가만에는 난을 피해온 황고(皇姑)를 구해준 이야기도 있다. 동치제때 천하가 어지러웠고, 황제의 딸 하나가 난을 만나 설가만까지 흘러들어오고 설가만의 사람에게 수양되어 자란다. 그녀가 설가만에서 2,3년을 살고는 북경으로 돌아간다. 황제는 설가만의 산명선생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기 위해서 부르나, 그는 완곡히 거절한다. 황제는 다시 토지를 나눠주겠다고 하나, 그는 싫다고 한다. 돈을 주겠다고 하여도 설가만의 사람은 싫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는 "너희가 가는 주면 주마다 현이면 현마다 마음대로 먹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설가만 사람들은 이후 어디를 가더라도 관부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설가만은 감숙성 영등현의 동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산언덕에 있다. 촌에는 현재 144호의 집이 있고, 641명의 주민이 있다. 과거에 이 촌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농사를 짓지 않고, 매년 무리를 이루어 바깥으로 돌아다니면서 점을 봐주고, 수상, 관상을 봐주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점복술을 잘하고, 성년자들의 80%이상은 모두 점복에 뛰어났다. 남녀가 분업하여, 각자 나누어 일을 하는데, 남자들은 점복산괘를 여자는 수상을 전문적으로 본다. 점복에는 주로 과중(팔자를 보는 것), 교합소반(관상을 보는 것), 교합탁조(수상을 보는 것), 새점, 해몽, 신기수등이다. 특히 뛰어난 것은 이들이 재앙을 쫓고 푸는 술법(해재, 진법)에 능한데, 여기에도 두가지가 있다. 도화진과 취성진이 그것이다.

 

설가만의 여자들은 모두 말을 잘하고, 매우 총명하며 수상을 보는데 아주 정확하다. 심지어 여인들의 모습도 집시족과 비슷한 점이 있다. 설가만 사람들의 신비로운 점은 그들의 독특한 기술을 절대 외부사람들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다. 엄격히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전하는 규범을 지키고 있다. 설가만 사람들은 외부인과 결혼하지 않으므로, 촌애는 대부분 친척들이 된다.

 

설가만에는 독특한 현상이 있는데, 남자들이 아이기르고 요리하는데 뛰어나고, 화장실은 모두 바깥에 있는데, 통일된 모양을 하고 매우 위생을 따진다. 외부에서 온 손님은 촌에 들어가면 동서남북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나, 촌에서 나가기만 하면 동서남북의 방향이 금방 분명해진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을의 분포는 제갈량의 팔진도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과거에 설가만사람들은 고만자(高蠻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의 명성은 서북지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전에는 "고만자"는 자주 난주의 고관대작이나 군정요인들의 요청을 받아 점을 치거나 재앙을 막아주는 일을 했다. 전하는 바로는, 서북8전구의 황사령관이 아들이 없어 '고만자'를 불러 한번 재를 막고나서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황사령관은 감격하여 고만자를 대은인으로 생각하고, 고만자를 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곤 하였다. 한번은 고만자의 아들에게 징병통지서가 날아와서 고만자가 편지를 한번 쓰자 그의 아들뿐아니라 설가만의 모든 남자들은 징병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고만자의 점술이 뛰어났으므로 난주성에는 그를 양아버지, 양할아버지로 모신 고관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만자의 처는 두 눈이 실명했으나, 손으로 손금을 만져서 점을 치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고만자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인 '고만산(高萬山)'이 부친의 의발을 이었고, 설가만에서 존경받는 점술의 고수가 되었다. 그는 점복, 벽재, 새점도 아주 잘 쳤을 뿐아니라, 도화진 81종 진법을 그는 대부분 할 줄 알았고, 더욱이 무량조사의 취성진법은 그 하나만 알았다고 한다. 그도 몇년전에 죽고 지금은 그의 아들인 고좌명(高坐明)이 있는데, 현재 40여세라고 한다. 그도 현재 설가만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중의 한 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