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돌아와서 중국의 민족구성을 보자. 앞에서 얘기한 상. 주는 원래 외래민족이다. 상이 주를 멸한 후, 상민족은
소멸하였다. 진한시대에 제1차민족대융합으로 소위 "한인(漢人)"이 형성되었다. 이 점은 다른 국가나 지역의 민족변화와 다를 바 없다.
한나라때의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5천만가량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말의 동란을 겪으면서, 삼국시대에는 겨우 7백만이 남게 된다. 그
중이 촉(蜀)의 인구는 최고로 많았을 때 90여만이다(그러므로 촉국의 기본적인 전략이 오나라와 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의 시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고, 천리동안 닭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白骨露於野 千里無鷄鳴)"는 묘사가
결코 문학적인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당시 10개의 집중에 9개가 빈집이었을 정도로 인구가 거의 말살된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인구의 진공상태를 무엇으로 메웠을까? 결국 북방 야만족이 대량으로 남쪽으로 이주해서 메웠던 것이다. 이어지는 짧은
서진(西晋), 북방한인은 다시 대량으로 강남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거의 2백년에 걸친 오호십육국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고, 황하유역은 이미
기본적으로 피가 바뀌게 된다.
수당시대에는 다시 한번 전국에 피바람이 몰아친다. 소위 가장 휘황하였다는 당나라는 원래 부분적으로
한화된 선비(鮮卑)족의 정권이었다. 이세민과 그 가족은 한화한 선비족이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그리고, 대량의 야만적인 습속을 유지했다.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처를 취하는 것등인데, 이것을 일맥으로 이어내려온 중화문명이라고 할 것인가?
요, 금, 원, 청의 시기에 이르면, 더욱 말할 것도 없다. 혼혈된 것은 그만두고라도, 전체적으로 망국노의 시기였다. 오랑캐가 한화되고, 한족은 오랑캐화하고, 치파오를 입는 것이 일맥으로 이어내려온 중화문명인가?
또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중국지구에 생활하고 있는 남방인과 북방인은 "민족"이라는 이 개념의 기본적인 특징을 구성하지도
못한다. 공통적인 심리성격상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리고 종족의 생리특징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북방인은 비교적 순수한
몽골인종이고, 남방인은 비교적 복잡하다. 대량의 말레이인종의 성분도 섞여 있다. 이런 상황은 두가지 측면의 이유가 있는 것같다. 하나는 당초에
중국지역의 인종이 중앙아시아, 남아시아등에서 이주해와서 이러한 국면이 형성된 것일 수 있다. 즉, 황하유역일대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몽골인종이 위주이고, 장강이남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말레이인종이 위주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수천년간의 역사변환, 민족이동중에서
북방의 몽골인종이 대량으로 남하하여 장강이남의 백월등의 민족과 융합, 혼혈로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이럿은 인종학상의 상식문제이다. 독자들은
주변의 이에 관한 전문가에게 물어보라. 내가 말하는 것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종족도 이러니 문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중화문명은 유일하게 연속된 문명"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이 연속되었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다른 국가민족은 모두 자기의 민족복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한족)은 자기의 민족복장이 있는가? (중산복이 민족복장이라고 말하지는
말라. 그것은 일본인의 학생복을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1천여년 특히 최근 수백년의 무정한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소위 중화문명에서 남은 것은
약간의 파편밖에 없다. 그리고 이 파편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양으로 남은 것이다. 오히려 일본인의 문화가 현재의 중국본토문화보다는 훨씬 더
한당문화에 가깝다.
많은 중국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속되어온 문자는 한자이고 다른 언어문자는 모두 단절되었다"고 스스로 자랑한다. 실제로 이것은
매우 우스운 이야기이다. 영어를 예로 들면, 영어전공자라면 알게씨만, 영어는 비록 단어수량이 수백만에 이르지만 일부분의 기초단어를 제외하고는
절대다수의 단어가 그리스어근 또는 라틴어어근에 앞뒤로 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라틴어는 또한 그리스어에서 왔다). 특히 많은 수량의
과학기술용어는 기본적으로 그리스어근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단어의 구성이 어지럽게 자모를 섞어놓았다고 얘기하고, 아무런 규칙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사실 영어가 그리스어근을 기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인터넷웹사이트에서는
"한자단어의 조합은 규칙적이고, 영어단어의 조합은 규칙이 없다 그래서 한자는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얘기하는데, 웃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다)
아마도 당신은 서방국가의 각종 언어에서 많은 단어가 서로 닮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마찬가지로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의 어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상으로 말하면, 서방국가의 각 언어간의 차이는 중국각 지방간의 방언간의 차이만큼도 크지 않다. 서방국가의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서방국가의 언어를 얘기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마치 중국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보통화, 사천화, 광동화를 같이 얘기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자상으로 말하면, 영어의 자모는 라틴자모이다. 라틴자모의 원천은 그리스자모이다. 그리스자모의 원천은 페키키아자모이다. 그런데, 페니키아자모의 최초의 원천은 이집트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자도 수메르문명의 설형문자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인도유럽어계(혹은 아리안어계)의 내부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인도유럽어와 중동일대의 셈족어게도 연원이 매우 깊다. 페니키아자모의 탄생의 또다른 가지는 아라비아 자모이다. 이것은 현재의 아랍자모, 위구르자모등이 되었다.
우리가 다시 한자를 보자. 맞다. 갑골문은 현대 한자의 직접적인 기원이다. 그러나, 만일 고문훈련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갑골문을 알아볼 수 없다. 갑골문, 금문, 소전, 대전등을 구분할 수도 없다. 문자상으로 말하면 이렇고, 언어상으로 말하면, 오늘날 사용하는 서구화된 어법의 현대 한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고문훈련을 받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선진시대의 문헌을 알아볼 수도 없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 문명을 보자. 이집투문명은 정식으로 기원전 3500년(상이집트 나카다문명)에 시작한다. 이시기에 상형문자가 출현하고 수십개의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동기를 제련한다. (실제적으로 기원전 4500년경에 이미 동기시대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종이. 파피루스를 발명하였다.
그 후 기원전 3100년에 메네스가 상하이집트 및 각 연방을 통일하고, 초기왕조시대에 진입한다. 제3왕조시기에 대규모로 피라미드를 건설한다. 이집트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건립된 후 1천년정도가 지나서 중국은 문명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이집트의 종족을 보자: 이집트의 최초의 종족은 햄족이었다. 그 후 서아시아에서 들어온 셈족과 점진적으로 융합하며, 이집트문명을 창조할
때는 셈족과 햄족이 혼합된 민족이었다. 셈족의 기원은 아랍반도이고, 아랍인과 유태인이 모두 셈족이다. 오늘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주민은 아랍화된 고대 셈족의 후예들이다. 고대 이집트는 비록 기본적으로 정권이 3천년을 이어간 후에 앗시리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아랍인의 통치를 받게 되지만, 그 종족 자체는 파라오의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오늘날 나일강의 양안에
생활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고대 이집트시기의 조각이나 회화에서의 모습과 여전히 매우 비슷하다.
이집트인들은 단지 중간에 이슬람교의 성분을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은 고그리스,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중국인이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것과도 유사하다. 단지 이슬람교와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동화작용이 더욱 철저했을 뿐이다. 물론 이슬람교는 그 자체가 셈족의 토종적인 종교이다.
다시 인도문명을 보자. 인도문명은 기원전 2500년(하라파-Harappa-문명시기)에 시작되고, 지역은 인더스강유역일대이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의 두 곳에서 발굴된 완벽한 벽돌도시의 유적이 대표적이고, 상형문자와 청동기가 있다.
최초의 하라파문명을 창조한 것은 드라비다인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인과 점차 융합하여 현재 인도의 주요한 주민이 되었다. 오늘날 인도의 인종이 섞여 있는 국면은 이러한 역사적인 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리인족은 기원전 1500년에 인도에 들어온 후 드라비다인의 문화를 계승하고, 종교, 철학도 드라비다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도가 후에 몽골족의 무굴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는데, 본질적으로 중국지역이 원이나 청의 지배를 받은 것과 같다. 그리고 식민화정도나 노역정도에서 훨씬 가벼웠다는 차이가 있다.
오늘날 인도인구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고대 드라비다인과 아리안인의 후예이다. 그들이 믿는 힌두교도 고대에서부터 계속 전승되고 있다. 그들이 창조한 불교도 모든 동아시아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떻게 "문명소실"을 얘기할 수 있는가.
실제적으로, 이상의 몇개의 문명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멸을 가장 많이 한 것은 오히려 중국지역의 문명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빼고는, 우리는 현재의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학계에서 드러내서 하기 어려워하는 하나의 생각은 "진정한 중화문명은 송나라때 이후로 이미 소멸하였고,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중동의 유프라테스,티그리스문명을 살펴보자. 그것은 기원전 3500년에 수메르문명시기에 정식으로 시작한다(실제적으로 기원전 4300년에 이미 동기시대에 들어가고, 도시가 나타나며, 국가의 맹아가 출현한다), 이 때 출현한 것은 상형문자이고 약간 후의 설형문자이며, 동기를 제련하고, 우르, 우루크, 니푸르등 수십개의 도시가 나타난다.
최초의 수메르문화를 창조한 것은 수메르인이다. 아마도 햄족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빠른 시일내에 후에 들어온 셈족과 융합한다. 이후에 수메르문명을 계승하여 일어난 것은 아카드(Akkad)문명(기원전 2371년), 바빌론문명(기원전1894년)이다. 모두 셈족이 만들었다. 앗시리아문명, 페니키아문명, 유태문명도 모두 고대 셈족이 만들었다. 이슬람문명을 만든 아랍인도 셈족이다. 오늘날 중동지구에 생활하는 대부분의 주민은 이 고대 셈족의 후예이다. 신봉하는 종교도 고대의 셈족의 원시종교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이슬람교이고, 사용하는 문자도 여전히 설형문자와 이집트상형문자에서 요소를 뽑아내어 만든 페니키아자모문자에서 발전시킨 아랍문자이다.
중국의 정부에서 선정하는 고대 4대문명국가에서의 바빌로니아는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지역의 최초문명이 출현한 후에 근 2천년이 지난후에 출현한 후기 문명이다. 중국 관방에서 이것을 가지고 4대 고대문명국가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중국지역의 문명이 자기보다 2천년이나 앞선 유프라테스티그리스문명과 동일한 시기에 나타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셈족은 또 하나의 문명을 창조하였다. 앗시리아문명.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한다. 발원지는 유프라테스티그리스의 상류지역이다. 이 문명의 가장 뛰어난 점은 그의 군사기술상의 성과에 있다. 그는 당시 셰게에서 병사의 종류가 가장 완비되어 있었고,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군사체계를 갖춘다. 나중에 그 군사기술은 페르시아에 의하여 전승된다.
셈족은 지중해 연안에서 또 하나의 문명을 창조한다. 페니키아문명. 이것도 개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한다. 유명한 도시는 트로이등이다. 범위는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이외에 유명한 카르타고가 있는데,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다). 이 문명의 가장 뛰어난 점은 항해술과 상업에서의 성과였다. 일찌기 이집트 네코2세시기(기원전611년)에 페니키아인은 이미 아프리카일주항해를 시행했다. 이것은 인류항해사상 마젤란의 세계일주와 콜롬버스의 미주대륙발견에 버금가는 항해상의 쾌거였다.
페니키아문명의 또 다른 위대한 공헌은 알파벳문자의 발명이다. 그는 비록 설형문자와 이집트상형문자에서 힌트를 얻기는 하였지만 진정한 병음방식의 알파벳문자를 발명한다. 페니키아문자는 그리스문자로 발전하고, 라틴문자로 발전하며, 아랍문자로 발전한다. 페니키아문자에서 발전한 이런 자모시스템은 동아시아외의 거의 전세계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되었다.
유대문명은 만일 기원전 1000년의 솔로몬건국으로부터 계산한다면, 3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상, 하나의 민족으로서 유대인의
역사는 더 유구하다. 일찌기 기원전 2000년이전에 여기에 거주하던 가나안인(셈족)은 이미 동기시대에 접어들었고, 도시를 만들고, 나중에 여기에
들어온 유대인들과 융합한다.
유대문명과 그 민족의 유일무이한 연속성과 그들의 인류에 대한 공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히타이트문명, 이것은 아마도 아리안족의 문명일 것이다. 대략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한다. 지점은 소아시아 일대이다. 이 문명의 최대의 성과는 철기제련술이다(이는 마도 일찌기 미탄니-mitanni-왕국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1400년경에 철기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코카서스일대의 아르메니아는 그 주민이 히타이트족의 후예라고 말해진다.
페르시아문명은 오늘날 이란의 전신이다. 이는 아리안족의 문명이다. 만일 최초의 주민인 엘람(Elam)인이 건립한 문명부터 시작한다면 기원전
2500년경이다. 그들은 이란최초의 문자와 국가를 창조했다. 엘람인은 나중의 메디아(Media)인, 페르시아인과 기원이 같다. 페르시아제국은
기원전 550년에 건립되며, 최초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방대한 제국이었다. 오늘날 이란인들의 절대다수는 고대 페르시아인의
후예이다.
말이 나온 김에 로마문명도 얘기하자. 만일 기원전 754년의 로마건국으로부부터 시작하면(일설에는 기원전 575년), 2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실제상으로는 일찌기 기원전 1800년의 트라마라문화시기에 이미 이탈리아는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었다. 기원전 1000년의 빌라노바문화시기로부터 이미 철기시대에 접어든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주민은 여전히 로마문명을 건립했던 고대 라틴인들의 후예이다.
미주의 마야, 잉카등의 여러 문명은 출현시기가 늦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소위 "고대문명을 창조했던 민족은 이미 멸종했다"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 어느 민족도 철저하게 멸종될 수는 없다. 전란중이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더구나 이주등으로 외래민족과 융합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공동의 지역의식과 문화의식을 가지게 되며, 다시 고대의 문명영역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만일 오늘날의 세계지도를 놓고 조기의 문명분포도와 비교해보라.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고대문명이 소재하던 대체적인 범위는 지금 건립된 현대국가의 영토와 기본적으로는 일치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인들이 천년간의 유랑끝에 다시 완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히브리언어와 문자를 회복했고, 이란인(페르시아인)들은 근대에 독립한 후에 바로 아랍문자를 자기들의 문화에서 청소해버렸으며, 전력을 다하여 고대 페르시아의 문화전통을 회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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