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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재해석

중국이 4대 고대문명국가의 하나라고? 웃기지 마라 (2)

by 중은우시 2006. 3. 21.

지금 더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문제는 소위 "하왕조"가 존재하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량의 하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전형적인 예는 이런 것이다. 시간적으로 소위 "하왕조"에 바로 이어지는 상왕조에서 발견된 수많은 갑골문과 청동기의 명문에서 전대왕조인 하왕조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사실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진 것이 아닌가? 당신은 주왕조, 진왕조, 한왕조등이 남긴 정부문서와 자료에서 그들의 전대 왕조인 "하"왕조에 대한 어떠한 내용이라도 기재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단지 상왕조라는 이런 초기문명만이 있어야 이런 결과는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심심했던 문사는 절망끝에, 대외적으로 이미 상대의 갑골문과 청동기명문에서 이미 "하왕조"에 관한 기재를 발견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웃기는 것은, 고고학계의 책임자가 즉시 부인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아직까지는 자기의 직업적인 명성을 가지고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기는 싫었던 것일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절망끝에 "거짓말도 수천번 반복하면 진리가 된다"는 법보를 내놓고 있을 뿐이다. 중학교 초등학교 교과서와 선전자료에서는 반복적으로 "하왕조는 중국의 첫번째 노예제국가"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더듬더듬, 감출듯말듯 얘기해주고 있다. 하왕조는 단지 종이 위의 왕조라고. 이것은 방법이 없다. 이런 역사학도들도 나중에는 "역사조작사업단", "고고조작사업단"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어떻게 조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진상을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들을 제대도된 일꾼으로 배양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웃기는 일은, 중국정부는 국내에서는 5천년역사라고 사람들을 속이면서도, 국제적으로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실대로 중국의 역사는 상나라때부터 시작된다고 인정한다는 점이다. 외연사에서 출판한 영문판 중국통사에서는 소위 하왕조와 황제의 전설을 "신화전설시대"로 정리하여 적고 있다. 나는 정말 우리 중국인에게 비애를 느낀다. 원래 우리 중국사람들은 정부가 보기에는 외국인보다 비천한 것인가?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하여도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알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우리가 만보를 양보하여 말하더라도, 소위 "하왕조"부터 계산하더라도 기원전2000년부터 4000년에 불과하다. 어디서 "5천년문명역사"가 나오는가? 혹시 2000+2000=5000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5천년문명역사"는 하나의 우스개에 불과한 것이다.(이런 우스개는 황당하여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기본 사실이 거기에 놓여져 있고,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은 선전기관을 독점하여 결사적으로 선전하여, 사람들이 그저 그려려니 하게 하는 것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1+1=3, 혹은 1+1=4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스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정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어떤 "역사학자"는 분노한 목소리로 단언하는 경우도 있다: "하왕조는 사기(史記)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좋다. 원래 2천년뒤의 사마천이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을 기술한 것이고 한번도 직접 본적도 없는 것인데, 이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기재한 1만년전의 아틀란티스에 관한 것도, 사람들이 해저에서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는데, 그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사마천의 말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그가 쓴 사기와 그 내용은 역사기록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역사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많은 내용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한사람이 단독으로 한 일도 있고, 두 사람이 비밀스럽게 한 말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할 내용도 있고, 외부에 자랑하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그는 어떻게 알았는가? 옛날에는 사람들이 매일 일기를 쓰고, 죽은 후에 일기를 출판하여, 수백년후의 사람이 그 세부적인 일을 알았단 말인가? 그가 황제로부터 궁형을 당한 이후로 심리적으로 매우 꼬여있었을 것이다. 허구의 고대 "현명한 임금"과 "좋은 시절"의 환상으로 스스로를 지탱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 상상이다) 이런 심리적상태하에서 그가 삼황오제라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신화전설(당시의 중국관방자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을 역사로 기술한 것이리라. 이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가"

 

소위 황제(黃帝), 염제(炎帝), 요(堯), 순(舜), 우(禹). 이들은 춘추전국시대 및 진한시대에 이르러 방술사(方術士)들이 신화전설에 근거하여 꾸며낸 인물들이다. 중국의 관방자료에서는 감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설중의 황제시대인 셈이다.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이것은 여기서 거짓을 가리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이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이 방면의 자료는 많다. 이 문제는 이미 5.4운동시절에 이미 해결된 것이다. 중국사학계의 태산북두인 고힐강선생의 고사변에서 이미 이것들은 명확하게 정리된 바 있다)

 

웃기는 것은, 중국관방은 비록 정식의 교과서에서는 전설중의 황제시대라고 쓰고는 출판하는 사전이나 자전에는 소위 "오제시대"를 역대기원표의 안에 넣어두는 것이다. 여기서 웃기는 장면이 하나 더 나온다. 황제로부터 시작된 오제의 기간이 500년을 지속하는 것이다. 평균하여 매 제왕의 재위기간이 100년이다. 여기에 그들이 제위를 이은 때에 이미 성년이 되었다고 보면, 그리고 퇴위한 후에 만년을 보냈다고 보면, 그들의 평균수명은 100세가 훨씬 넘게 된다. 원래 석기시대의 원시부락사회의 사람의 평균수명이 이미 100여세에 달하였다는 것은 천하가 웃을 일이다.

 

비록 중국의 이런 정치인과 문사들의 뼛속에는 허구의 소위 "염황시도"를 정식의 역사로 선전하고픈 마음이 있겠지만, 그래서 황제에 제사지내는 행사를 여러번 했었지만, 그러나 나는 믿는다. 중국에서 사교가 횡횡하는 날이 오지 않고서는 그들의 기도는 실패하리라는 것을...

 

요. 순. 우.는 후대의 허구이다. 더더구나 "염황시조(炎黃始祖)"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힐강이 제출한 "층층이 누적된 중국의 고대사"라는 관점에서 주요한 것은 두가지이다. "시대가 뒤로 가면 갈수록 고대사의 시기는 더욱 길어졌다" "시대가 뒤로 가면 갈수록 전설중의 중심인물은 더욱 과장되었다". 이것이 고대사를 판별하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방사 문인들이 어떻게 고대사를 위조해냈는지는 그의 책 속에 이미 상세하게 분석되어 있다.

 

지나는 길에 한 마디 해두자면, 고힐강은 중국역사학자중에 몇명안되는 양식있는 학자이다. 그러나, 시대조건의 제한은 벗어나지 못했고, 그도 일찌기 당시에 발굴된 "북경원인(北京猿人)"을 중국지역 각민족의 인종기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는 이미 알고 있다.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종족의 사람들의 DNA측정을 통하여 모든 인종의 기원은 20만년전의 아프리카 오스트랄로 피데쿠스라는 것을. 북경원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조기 원인은 일찌기 멸종했고, 중국지구에서의 인종의 기원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중국의 현재의 인종은 빙하기가 끝날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것이라는 것을. 이것은 그저 상식이다.

 

어떤 중국인은 "중국문명은 유일하게 연속되어온 고대문명이다. 다른 문명은 모두 일찌감치 소멸하였다. 종족도 이미 멸종되었다"는 가소로운 얘기를 신나게 떠들고 있다. 이것도 사람들을 오인시키는 황당한 논조이다. 이러한 황당하고 가소로운 얘기들은 이제 철저하게 청소되어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다른 문명은 이미 소실되었는가? 종족은 멸종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그리스를 보면, 그리스의 최초의 문명은 미노스문명이다. 시작은 기원전 2500년이고, 지금으로부터 4천년전이다. 최초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기재되어 있다. 19세기말에 그리스 크리트등의 지역에서 대량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적 근거에 따르면 초기의 상형문자, 중기의 상형문자가 있었고; 성숙한 청동제련술이 있어 대량의 청동기가 발굴되며; 초기에 성이 있으며, 중기에는 크로소스등지의 왕궁이 있는데, 특히 후자는 매와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초기문명에서 등봉조극의 경지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주의: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미노스문명이 기원전 2000년에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의 역사서에서는 모두 기원전 2500년전부터 계산한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는 스스로 판단해보라)

 

이어지는 그리스남부의 미케네문명은 기원전1600년에 시작하며 지금으로부터 3600년전이다. 호메로스 서사기에서 기술한 것은 주로 이 시기의 역사이다. 19세기에 그리스의 미케네, 타린스등지에서 많은 도시유적을 발굴하였고, 대량의 청동기와 선형문자를 발굴하였다.

 

그후의 이백년간의 호메로스의 시대를 거친다. 이 때 그리스는 철기시대로 들어간다. 무기와 공구는 모두 철제를 사용한다. 그러나 중국은 근 1천년후의 한나라때부터 정식으로 철기시대에 들어간다(나는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문명지역이 중국지역보다 1천년먼저 철기시대에 들어갔다는 것은 역사의 상식이다. 원인은 매우 간단하다. 왜냐하면 철을 제련하는 기술의 기원은 지중해 일대의 히타이트문명이고, 그 후에 점차 멀고 가까운 각 문명으로 퍼졌으며, 중국지역은 가장 멀리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가장 늦었을 뿐이다)

 

이어지는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테네를 대표로 하는 고전문명시대이다.

 

미노스문명을 창조한 것은 펠라스기인(Pelasgians)이고, 그리스어족이 아니다. 중국의 어느 껄렁한 문사는 이걸 기화로 하여 고의적으로 미노스문명의 창조자와 미케네문명을 창조한 그리스인은 동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것으로 그리스문명을 폄훼하려고 하였다. 실제적으로 펠라스기인은 비그리스어족일 뿐이다. 그리이스인과 같은 인도유럽종족이고, 아리안족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노스문명의 초기부터 미케네문명을 창조한 그리스인들과 융합하기 시작했고, 그 문명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아티카등지의 펠라스기인들은 일찌기 현지의 아카이아인과 융합하여 공동으로 나중의 고전문명을 창조했다. 그 문화예술의 세속주의, 자연주의특징은 몇개의 고대문명중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나중의 그리스고전문명과 근원이 같다.

 

정통적인 그리스인부터 계산한다면 아카이아인의 미케네문명부터 계산하게 되는데, 그래도 중국에서 가장 빠른 상왕조보다 앞선다. 도대체 "4대 고대문명국가"라는 호칭이 왜 중국앞에 붙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우기, 중국의 두개의 초기문명: 상. 주. 이것들은 모두 서방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족이 창조한 것이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상민족은 일찌기 소멸한다. 오늘날 누가 감히 자기가 상나라 후예라고 하는 사람이 있던가? "정통"의 중국인으로 얘기하자만 "한나라사람"부터이다. 그것은 진나라 한나라가 되어서 비로소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중국의 초기문명은 이미 소멸되었고, 종족은 멸종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기원전 1000년이후의 그리스고전문명은 남하한 아카이아인과 동족인 두리안인이 함께 위의 두 종족과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이후 그리스를 통일하고 알렉산더제국을 세운 마케도니아인들도 그리스인이고, 그리스화문명시대를 창조하였다. 로마는 그리스를 점령한 후에 그리스문명의 직접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서로마제국멸망후에는 동로마제국이 1천년을 이어내려갔다. 그 핵심민족은 여전히 그리스인이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15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멸망되면서 그리스인들은 400년의 망국시기를 겪는다. 19세기초에 다시 독립하게 된다. 지금의 그리스공화국의 영토는 고대 그리스의 주요지역이고, 그 인구의 절대다수는 당연히 그리스족이다. 그리스어는 국어이다. 이 지구는 예로부터 민족구성에 있어서 크게 변화하지 않았는데, 어디에서 "종족멸종"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떤 사람은 "문명소실"이라는 말도 하는데 이것은 더 웃기는 말이다. 오늘날 모든 현대문명은 서방문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서방문명은 그리스로마문명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스로마문명은 오늘날의 과학, 철학, 문학, 예술, 정치, 법률등등의 방면에서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곁에서 가는 곳마다 그리스로마문명의 그림자를 마주치게 된다. 어디에서 "소실"하였다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로마문명이 단지 중도에 기독교의 구성요소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화한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리스문명과 유태문명의 혼합의 산물이다. 기독교정전인 신약성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만들어졌다. 주요하게 전파한 사람도 로마제국의 그리스인이었다. 단지 구약성서를 받드는 유태교만이 우상숭배를 엄격하게 금지하였지, 기독교의 각유파는 성상을 그리고 조각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화한 전형적인 특색이다.

 

그리스문명에 대하여는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만일 그리스문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대사회의 모든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현대의 거의 모든 과학분야. 기술발명, 및 민주제도는 일찌기 고그리스시대에 이미 그 맹아가 형성되었다. 고그리스문명은 더욱 직접적으로는 중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를 불러왔고, 근대과학의 탄생을 불러왔으며, 민주제도의 맹아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인류세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문명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이전에 인식이 충분하지 못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