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시대의 삼대 신동

중은우시 2006. 1. 12. 02:45

삼국시대에는 많은 신동(神童)들이 나타났으나, 이러한 신동들중 가장 뛰어난 자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그들은 조충(曹沖), 주불의(周不疑), 하후영(夏候榮)이다.

 

1. 조충

 

삼국신동중 가장 유명한 것은 조충이다. 이것은 최근 몇십년간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는 가장 유명한 신동은 건안칠자중의 한 명인 공융(孔融)이었다. <<삼자경(三字經)>>에 "융사세, 능양리(融四歲, 能讓梨)"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융은 요절하지 않았다. 이로써, 신동의 위치를 조충에게 양보해야 했다.

 

조충에게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충칭상(曹沖秤象)의 이야기로서 코끼리의 몸무게를 잰 일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친 조조가 고관을 지내고 있을 때,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 코끼리를 선물로 보냈는데, 조조는 코끼리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는데, 신하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어린 조충이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코끼리를 호숫가로 데리고 가서 배에 태우고는 배가 가라앉은 곳에 금을 그어놓고는 코끼리를 내리고 다시 돌을 실어서 같은 위치까지 가라앉게 만든 다음에 그 돌의 무게를 재어 코끼리의 무게를 계산했다는 것이다.

 

사실 조충에게는 코끼리의 몸무게를 재는 이런 작은 재주뿐아니라 "판단하고 관찰하며 어진 것이 태어나면서 부터 가지고 났고, 용모도 뛰어났다" 자주 그의 지혜와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을 구한 일이 많았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군국대사에 형이 엄하고 중하였는데, 조충이 잘 말해서 목숨을 건진 자가 수십명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조충은 어린 나이임에도 조조의 사랑을 받고, 조조에 의하여 후계자로 뽑히게 되나 불행히도 13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조충이 관대하였고, 조조는 그가 지혜가 뛰어남을 사랑한 것이므로 만일 그가 일찌기 요절하지 않아써라면, 조비등 형들과의 싸움이 불가피하였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예상하기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또 다른 신동 주불의(周不疑)와의 관계는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조조는 주불의도 매우 아꼈다. 그러나 조충이 죽자 바로 주불의를 죽이고자 한다. 조비등이 주불의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조조는 "이 자는 네가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 주불의를 죽여버린다. 이로써 볼 때, 조조는 조충의 정치적 능력도 매우 높게 평가하였고, 특히 주불의와 같은 인재도 조충이라면 다룰 수 있다고 보았고, 조비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같다.

 

2. 주불의(周不疑)

 

삼국시대의 신동중에 가장 비극적인 것은 주불의이다.

 

주불의는 영릉사람으로 유표의 좌사인 유선의 외조카이다. 어려서 비상한 재주를 보였고, 총명하고 재빨랐다. 그는 유비와도 친척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어려서는 형주에 거주하면서 유비의 총애를 받았고, 전해지는 바로는 유비는 그를 위하여 스승을 뽑아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촉한의 상서령을 지낸 유파이다. 그러나, 당시 유파는 유비를 무시하고 있었으므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주불의는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삼국지에서는 그가 "문론사수"를 저술했다고 되어 있다. 제목으로 봐서는 문학논술에 관련된 저작으로 보인다. 만일 그가 왕찬(건안칠자의 1일)과 같은 유생이었다면 절대 조조가 주불의를 죽일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재주는 손견과 같은 유형의 재주였을 것이다. 아마도 주불의가 계속 유비와 같이 있었더라면 제갈량과 같은 스승을 소개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종이 투항하면서 주불의는 다시 유비와 연락하지 못하고 조조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유비의 은혜는 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자 했을 때, 주불의는 거절하게 된다. 만일 주불의가 유비를 쫓아갔더라면 아마도 제갈량의 후계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3. 하후영(夏候榮)

 

삼국의 신동중 사람들이 가장 주의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하후영일 것이다. 그러나 하후영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는 위나라의 명장 하후연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알았고,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하후영은 자가 유숙이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7살에 글을 했고, 책을 읽으면 하루에 천마디를 읊었으며, 한번 눈으로 보면 다 알아보았다. 문제가 이를 듣고 그를 청하였다. 손님이 백여명이었는데, 사람들 이름을 한 번 쓰고, 그에게 보여주고 나서 얘기하도록 하니 한 사람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후씨는 원래 명장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하후영은 용맹하고 병법에 능할 뿐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전도는 양양하였다. 한중에서 위군이 패배할 때, 하후영의 나이 13살이었다. 전부 도망치라고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임금과 부친이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어찌 죽음을 피해 도망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검을 뽑아들고 싸우다 결국 죽었다. 이로써 볼 때 그는 삼국시대의 신동중에서 제갈격의 재주와 제갈첨의 충의를 겸하고 있었다. 만일 요절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출장입상의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