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삼고초려의 고생을 한 얘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유비가 인재를 얻는 과정에서 가장 고생한 것이 제갈량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또다른 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 유비는 더욱 고생하고 형주, 익주를 다 쫓아다녔으며, 하마터면 월남까지 갈뻔했다. 그를 쫓아다니는 과정에서 기쁠 때는 연회를 베풀고 화가날 때는 아예 그의 목을 베어버리려고도 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수하가 된 후에 유비를 따라 고락을 함께 했지만, 이 인물은 촉국에 몸을 담고나서도 차갑기가 얼음이나 서리와 같았다.
그는 바로 유파(劉巴)이다. 자는 자철(子徹)이고, 영릉 증양(호남성 소동) 사람이다. 조부는 유요(劉曜)로 창오태수를 지냈고, 부친은 유상(劉祥)으로 강하태수를 지냈다. 기원190년에 유파는 화를 피해 영릉으로 가서, 주부가 된다. 기원208년에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였을 때, 유파는 북상하여 조조에 의탁한다. 적벽대전이후, 조조의 명을 받아 강남으로 와서 항복하라고 권유한다. 제갈량은 유파에게 남으라고 권하지만, 유파는 따르지 않는다. 다만 조조에게 다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유파는 남하하여 교주로 가고, 성을 장씨로 바꾼다. 그리고 익주로 가서 유장의 수하가 된다. 기원211년에 유비가 익주를 취함에 따라 유파는 다시 유비의 수하가 된다.
유파의 재능에 대하여는 제갈량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그를 끌어들이는데 가장 노력을 들인 것도 제갈량이었다. 그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유비 진영의 사람들은 거의 전부다 동원되었다. 유파는 형주의 명문세가출신이면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가 이름을 떨칠 때부터 유비를 싫어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운명은 이상하게도 그를 계속 유비와 연결시켰다. 그가 어떻게 숨든지간에 항상 유비와 만나게 되었다.
유파가 18세때, 형주에서 군서호조의 주부를 지냈다. 이띠 유비는 마침 형주로 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파가 언제부터 유비를 싫어했는지는 모른다. 유비가 유표의 조카인 주불의(삼국시대 삼대신동으로 유명)를 그에게 보내어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유파는 유비가 소개했다는 말을 듣고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사양한다.
적벽대전전에 유비는 조조에게 패퇴하여 엉망이 되어 도망친다. 형주의 선비들은 유비를 쫓아 도망쳤으나, 유파만은 혼자서 북상하여 조조를 찾아간다. 이것은 형주를 배신하더라도 절대 유비는 따르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조조는 그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관직을 준다. 나중에 조조는 그를 장사, 영릉등지에 보내어 항복을 권하도록 하는 중임을 맡긴다. 유파는 "안간다"고 하여 조조를 놀라게 한다. 조조는 내가 너를 중용했는데 왜 안간다는 것이냐고 하자. 유파는 "유비가 형주에 있으면 나는 안간다"고 하였다. 원래 장사등의 땅은 형주의 남쪽에 있었다. 조조는 그 말을 듣고, "괜찮다. 만일 유비를 만나면 내가 6군을 보내어 너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말을 듣고서야 유파는 길을 떠난다.
그런데,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퇴하고, 제갈량이 지도하여 유비는 장사, 영릉등을 얻게 된다. 유비가 영릉에 들어갔다가 유파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기뻐한다. 유비는 그가 자신을 버리고 조조를 찾아갔던 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아주 기쁘게 유파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를 찾아가서 발견한 것은 유파가 이미 멀리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지, 지금의 월남으로.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피하기는 해도 도망치지는 않았었는데, 유파는 아예 도망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유비가 그를 찾을까 두려워 이름까지 바꿔어버렸다. 그러나, 운명은 이상하여, 교지의 태수인 사섭은 유파와는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교지를 떠났고, 익주로 왔을 때 붙잡혀서 거의 목숨을 잃을뻔한다. 다행히 익주의 관리가 유파가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보고 유장에게 천거한다.
유장은 원래 조조에 친했다. 그래서 장송을 보내어 조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장송의 용모가 뛰어나지 않아서인지 조조는 그저 그렇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장송은 돌아오자마자 유장에게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 대항하도록 권한다. 유장은 스스로 무슨 의견이 있는 자가 아니어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유장은 유파를 보고는 일찌감치 그의 대명을 들어와서 매우 기뻐한다. 그래서 그에게 의견을 묻자 유파는 한마디로 답한다. "유비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유장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익주는 유비에게 먹힌다. 유파는 다시 한번 유비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도망치기 전에 붙잡힌다. 제갈량은 "너는 도망칠 수 없다. 천명이 그렇다. 유비가 천명을 받은 천자이다. 명을 따르라." 유파는 회신에서 "나는 유장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일을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
유비는 끝까지 유파를 놓아주지 않았고, 유파는 어쩔 수 없이 유비를 따른다. 그러나 몸은 유비의 수하로 있지만, 마음으로는 유비를 싫어했다. 유파는 그러나 능력은 있었다. 유비가 익주를 함락시킨 후 국고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한다. 이에 유파는 "작은 일이다. 세가지만 하면 된다. 첫째, 백전을 하는 동판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둘째, 전국의 물가를 통일시키며, 셋째, 공매제도를 실시한다" 과연 그의 의견대로 하니 수개월만에 국고는 충족하게 되었다.
유파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짐작은 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수동적이었다. 누가 와서 해달라고 하기 전에는 스스로 먼저나서서 하는 법이 없었다. 촉이 건국한 이후에 공문서는 모두 유파가 썼다. 국호, 년호도 그가 제정했다. 그러나, 그는 후세에 자기가 유비의 수하라는 것을 남기는 것을 싫어했던 듯하다. 그에 관한 기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유파는 장무2년에 사망한다. 나이 39세였다. 13년동안 유비를 피해다니다가, 8년간 유비와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국에 가서도 1년(천국시간으로는 하루?)만에 유비도 죽어서 하늘로 온다. 그는 결국 유비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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