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182-252)는 오(吳)나라의 대제(大帝)이다. 삼국시대의 오나라의 건국자이고, 229년-252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자는 중모(仲謀)이며, 오군 부춘(지금의 절강 부양) 사람이다. 동한말에 그의 형인 손책(孫策)의 뒤를 이어 강동육군에 할거했다. 건안13년(206년)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를 적벽에서 대파했다. 나중에 유비를 크게 물리쳤다. 황룡원년(229년)에 무창에서 황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오라고 하였다. 곧이어 건업으로 천도한다. 재위기간동안 부역이 무겁고 형벌이 잔혹하여 백성들이 의거를 일으키고 반항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손권은 눈빛이 매섭고, 윗몸이 길고 아래가 짧았다고 한다.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다. 도량이 넓고 성격이 밝았고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지모가 있고 결단력이 있었다. 협사를 좋아하고 기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건안 5년 손책이 부상으로 사망하자, 손권은 형의 뒤를 이었다. 당초 조조가 오나라군대의 배와 장비, 군대의 대오가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을 낳으려면 마땅히 손중모와 같아야 한다. 유경승의 아들은 개돼지일 뿐이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는 격이다. 각고의 노력을 거쳐 적벽대전후에 손권은 위촉오 삼국정립의 국면을 만든다.
손권의 후궁생활은 아주 화려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조부인(趙夫人)에 관한 거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이다. 고대에 여러가지 사건들은 지금 사람들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태평광기>>에 의하면, 진나라 대흥연간에 형양사람인
조부인은 조달(趙達)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구상이 교묘하여 천하무쌍이었다. 그녀는 또한 손가락사이에 색깔비단실로 운룡규봉(雲龍虬鳳)의 도안을 짤 수 있었다. 큰 것도 1척을 넘지 않았고, 작은 것은 겨우 1촌에 불과했다. 그래서 궁중에서 그녀를 기절(機絶,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손권은 자주 위 촉의 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고, 행군전투를 하는 중간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구해서 산천의 지세를 그리게 하여, 행군과 군사배치시 사용할 지도로 쓰려고 했다. 그래서 조달은 그의 여동생을 손권에 바쳐서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손권은 조부인에게 구주의 섬, 강, 호수, 산의 형세도를 그리게 하였다. 조부인은 “단청의 색깔을 쉽게 퇴색되어 흔적이 남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없습니다. 첩이 자수를 놓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부인은 국가의 산천을 하나의 네모난 비단위에 모두 수놓았다. 위에는 오악, 하해, 성읍과 행군포진의 도안을 수놓아서 손권에게 바쳤다. 당시 그녀를 침절(針絶)이라고 불렀다. 형극을 목각하였다는 목후도 있고, 공수반이 만든 구름다리도 있고, 나르는 연도 있지만 모두 이 그림처럼 진기하고 아름답지 못했다.
손권은 소양궁(昭陽宮)에 머물렀다. 강동의 여름은 매우 더워서, 손권은 이것 때문에 힘들어 했고, 그래서 자색비단장막을 걷어올렸다. 조부인은 이것을 본 후에, “이 자색 비단장막은 진기한 것도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손권은 조부인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조부인은 “신첩이 여러가지를 생각하여, 장막을 내리고도 맑은 바람이 통하고, 바깥을 바라보는데 장애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주위의 시녀들도 모두 시원하게 느끼고 마치 바람과 같이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손권은 아주 놀랐고, 이전에는 그런 장막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부인은 자기의 머리카락을 자른 후에, 머리카락을 더욱 가늘게 만들고, 다시 신교(神膠)를 사용하여 그것들을 붙였다. 신교는 욱이국에서 난 물건인데, 일반적으로는 활줄이 끊어졌을 때 사용하는데, 백번끊어져도 백번 붙일 수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비단처럼 만들어 몇 개월만에 완성하였다. 그 후 그것으로 장막을 만들었다. 안에서보거나 밖에서 보거나 장막은 연기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방내에서는 자연히 맑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손권이 항상 이 장막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행군때 장막으로 썼다. 장막을 펼치면 넓이가 몇장은 되었고, 접으면 베개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절(絲絶)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오나라에는 삼절(三絶)이 있었고, 사해가 넓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비교할만한 진기한 것은 없었다. 나중에 누군가 조부인을 모함하는 자가 있어, 조부인은 쫓겨나고 이전의 총애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비록 의심받아 후궁의 지위를 잃었지만, 그녀의 뛰어난 기술을 여전히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 <<습유기>>, <<태평광기>>등에는 모두 조부인의 “삼절”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러나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손권이 말년에 이르자 당년의 영웅적인 기개는 남아있지 않고, 잔인하며 살인을 좋아하며, 의심이 많은 혼미한 황제가 되었다. 후궁안에 여러 비빈들은 총애를 얻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손권의 원비(元妃) 사씨(謝氏)는 원래 회계 산음 사람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강동지역에 유명했다. 당시 중매인들이 그녀 집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러나 사씨집안에서는 모두 거절했다. 손권의 모친인 오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씨를 손권의 비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손권은 다시 고모의 손녀인 서씨(徐氏)를 부인으로 삼았는데, 서부인의 고향은 오군 부춘이었다. 그녀의 조부인 서진(徐眞)은 손권의 부친 손견과 매우 가까웠고, 손견은 자기의 여동생을 서진에게 주었다. 서부인은 먼저 같은 군의 육상(陸尙)에게 시집갔다가, 육상이 사망한 후에 손권의 비가 된 것이다. 서씨는 사씨보다 젊었고 더욱 아름다웠다. 사씨는 점점 손권의 총애를 잃었고, 오래지 않아 우울하게 죽었다.
사부인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손권의 첩이 낳은 아들 손등(孫登)을 키웠다. 사부인이 죽은 후에 손권은 서부인에게 모친의 신분으로 손등을 키우라고 하였다. 손등은 태자가 되었다. 여러 신하는 서씨를 황후로 삼으라고 청했다. 그러나, 후궁에는 보씨(步氏), 원씨(袁氏), 왕씨(王氏)가 있는데, 그녀들은 서부인보다 더욱 총애를 받았다. 손등은 어려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궁들은 다시 태자위를 놓고 명쟁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보씨는 임회 회음 사람이다. 승상 보척과 동족이다. 동한 말년, 그녀는 모친과 여강으로 이사갔고, 여강이 손권에게 격파된 후 장강을 건넜다. 아름다웠으므로 손권의 총애를 받았다. 보부인은 아들이 없었고, 딸만 둘을 낳았다. 장녀 노반은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보냈고,
원씨는 원술의 딸이다. 그녀는 성격이 가장 좋았다. 자식은 없었다. 보부인이 병으로 죽자, 손권은 원씨를 황후에 앉히려고 한다. 원씨는 자기가 아들이 없다는 것을 들어 사양한다.
왕씨는 낭야사람이다. 궁중에 들어온 후 황무연간에 총애를 받고, 아들 손화(孫和)를 낳튼다. 그녀는 보부인 다음으로 총애를 받는다. 보부인이 죽은 후 손화는 태자가 된다. 원씨는 중궁의 지위를 거절한다. 손권은 그러나 그녀를 황후로 앉히려고 한다. 여러 신하들도 어미는 그 아들을 따라서 귀해지는 것인데, 손화가 이미 태자가 되었으니, 그의 모친인 왕부인이 관례에 따라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죽은 보부인의 큰 딸인
나중에 손권은 또 한 죄인의 딸인 반씨(潘氏)를 총애한다. 반씨는 회계 구장 사람이다. 부친은 하급관리였으나 죄로 사형을 당한다. 반씨는 그녀의 언니와 함게 관노비가 되어, 직조실에서 노역을 하게 된다. 반씨는 강동의 절색이라고 할 수 있었고, 함께 구금된 수백명의 여자들이 모두 반씨는 선녀라고 한다. 왜냐하면 범인이라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 그녀를 존중해준다. 반씨의 명성은 손권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는 호기심에 사람을 보내어 반씨의 용모를 그려오게 한다.
반씨는 당시 우울함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이 말라 있었다. 화가는 반씨의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 손권에게 바쳤다. 손권은 그림에 그려진 반씨의 아름다운 용모에 감탄하며, 호박여의로 그림을 들어올리자, 호박이 부러져 버렸다. 손권은 감탄하며, “정말 신녀로다. 우울해하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녀가 기쁠 때의 모습은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명을 내려 반씨를 직조실에서 후궁으로 데려와 첩으로 삼는다. 반씨는 후궁에 들어온 후 미색으로 총애를 얻어 궁중에서는 그녀를 반부인이라 불렀다.
반부인은 손권과의 사이에 아들 손량(孫亮)을 낳는다. 적오13년 손량은 태자가 되고, 다음해에 반부인은 황후에 책봉된다. 그녀의 성격은 질투가 심하여 원부인등 많은 후궁들이 해를 입었다.
왕부인은 전공주의 모함으로 죽었고, 그녀의 아들인 손화도 이로써 손권의 총애를 잃었다. 손화와 동생 노왕 손패(孫覇)는 손권이 모두 아꼈다. 손패에게는 태자인 손화와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서로 의심했다. 손패는 암중으로 태자위를 빼앗을 궁리를 했고, 신하들과 결탁하여 손화를 몰아내고자 했다. 손권은 점차 그에게 미혹되어, 태자 손화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태자태부 오찬은 상소를 올려 노왕 손패를 변방으로 보내라고 하였으나, 손권은 그의 글에 진노한다. 손패와 가까운 대신 패축은 이 틈을 타서 오찬을 모함한다. 오찬은 화가났으나 어디 호소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대장군 육손에게 마음속의 분노를 털어놓는다. 패축은 그가 외신과 불충한 일을 도모했다고 모함했고, 오찬은 감옥에 갇혀서 죽는다. 손권은 환관을 보내어 육손을 책망하고, 육손은 나이가 들었으므로 마음 속의 우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하구에서 병으로 죽고 만다. 그의 아들인 육항은 손권에게 부친의 고충을 대신 말한다. 그제서야 손권은 패축이 얘기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로써 손패도 부친 손권의 눈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때 반부인은 후궁중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는데, 손화와 손패가 하나하나 손권의 눈에 벗어나는 것을 보고, 기회를 틈타 자기의 아들 손량이 태자의 지위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손권은 안으로는 총비 반부인에 미혹되고, 밖으로는 사랑하는 딸
적오12년 대사마 전종이 병으로 사망한다. 사십세된
반황후는 점점 총애를 믿고 교만해진다. 이전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손권은 점차 페태자 손화는 죄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8월의 어느 날, 큰 바람이 불었고, 강물이 수천리의 토지를 물에 잠그게 되었다. 평지에도 물이 8척깊이로 잠겼다. 손권의 선조 능묘에 심은 송백도 대풍에 뽑혀버렸고, 건업성의 남문 바깥으로 날아와서 떨어졌다. 손권은 놀란 나머지 풍질에 들고, 병상에 누어, 1개월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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