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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채원배(蔡元培)의 세번의 결혼

by 중은우시 2005. 12. 22.

채원배는 북경대학총장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는 중국근대의 저명한 교육가, 사상가이며 일생을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모택동은 그를 "학계태두, 인세해모(學界泰斗, 人世楷模)"(학문계에서는 태산, 북두와 같은 존재이며, 인간세상에서는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한 바 있다. 그는 일생에 3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이 세번의 결혼은 공교롭게도 채원배의 사상의 변화를 반영하고, 또한 중국근대사의 변천을 얘기하는 것이다.

 

첫번째 결혼 : 부모의 명에 따름, 성격불화

결혼식 : 사전에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함.

 

1889년, 채원배는 첫번째 부인인 왕소(王昭)를 맞이한다. 채원배의 첫번째 혼인은 완전히 부모의 명에 따른 것이었고, 결혼식도 구식이었다. 이 때 채원배는 혼례전에 왕소를 한번 본 적도 없었다. 왕소에게는 결벽증이 있었고, 돈을 매우 아껴쓰는 편이었다. 그러나 채원배는 성격이 호방하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으며, 남성우월주의가 있었다. 항상 왕소에게 모든 면에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따르라고 하다보니, 결혼후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잦았다.

 

1900년이 되어서, 서방의 신사상을 받아들인 채원배는 여권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고, 그는 <<부처공약(夫妻公約)>>을 써서, 처인 왕소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였다. 이것은 결혼 10여년동안 부부간에 서로 이해하고 감정의 갈라진 틈을 메워간 결과였다. 안타깝게도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여, 이 해에 왕소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두번째 결혼 : 한폭의 그림이 맺어준 인연.

결혼식 : 연설회로 화촉동방을 대신함.

 

왕소가 죽은 후 채원배는 만으로 33세였다. 이미 강소, 절강지역의 지식계에서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에게 중매를 서는 사람들로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채원배는 중매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아예 글로 써서 벽에 붙여놓았다. 그가 제출한 것은 다섯가지 조건이었다. 첫째. 전족하지 않은 여성일 것, 둘째, 글을 알 것, 셋째, 남자는 첩을 두지 않고, 둘째 부인을 두지 않는다. 넷째, 남편이 먼저 죽으면 처는 개가할 수 있다. 다섯째, 의견이 안맞으면 이혼할 수 있다. 이 소식이 나가자 중매서려고 했던 사람들이 조용해 졌다고 한다.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인가. 채원배가 항주에서 학교를 운영할 때, 하루는 친구집에서 한폭의 그림을 보게 되는데, 그림도 잘 그렸고, 글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누가 그린 것인지를 물어봤더니, 강서의 유명한 선비인 황이헌(黃爾軒)의 딸인 황세진(黃世振), 일명 중옥(仲玉)이라고 하였다. 황중옥은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글도 알고, 특히 서화에 정통하였으며, 부모를 공경하였다. 이런 여러조건은 채원배가 생각하던 것과 들어맞았다. 이에 친구에게 청하여 중간에 중매를 서도록 부탁하여 1902년 구정에 채원배는 항주에서 일생에서 두번째의 혼례를 거행한다. 이번 혼인은 중서합작방식이었다. 채원배는 붉은 휘장으로 공자라는 글을 써서 삼성화를 거는 전통을 바꾸었고, 연설회의 형식으로 화촉동방을 대체하였다.

 

1907년 이미 불혹(40)에 접어든 채원배는 4년간 해외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독일에서 4년간 있으면서 그는 <<중국윤리학사>>를 저술한다. 채원배의 애초의 남성우월주의는 점점 변하여 부녀평등권을 주장하는 투사로 바뀌었다. 그의 두번째 부인인 황중옥이 여기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1920년말, 채원배는 북경대에서 유럽으로 시찰을 나가게 되는데, 이 기간에 황중옥이 죽는다.

 

세번째 결혼 : 나이차이가 24살인 스승과 제자의 사랑

결혼식 : 소주 유원에서 결혼사진을 찍다.

 

채원배가 54살때, 북경대 총장직을 맡고 있던 그는 재혼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조건을 내세운다. 첫째, 스스로 상당한 문화적인 소양을 갖출 것. 둘째,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을 것. 셋째, 영어를 할 줄 알고, 연구조교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 때 주준(周峻)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의 생활에 들어오게 된다. 주준은 채원배가 상해에 설립한 애국여학교의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채원배에 대하여 계속 존경과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33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채원배와 주준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4살이었다. 1923년 7월 10일, 채원배와 주준은 소주의 유원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결혼후 10일째 되는 날, 채원배와 주준은 자녀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공부하러 간다. 주준은 서양미술과정을 배워서, <<채원배반신상>>을 만든다. 채원배는 거기에 글을 써서 "그대가 가장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고, 마음을 가져갔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쓴다. 1940년 3월 5일 주준의 50회생일을 이틀 앞두고, 채원배는 홍콩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