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의 사망원인

by 중은우시 2005. 10. 31.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이후, 은거하고 있던 창덕(彰德)의 고향에서 다시 나와, 섭정왕 재풍으로 하여금 양위하도록 하고, 그 스스로 청왕조의 국무총리대신이 되어 남북의화후에는 손중산을 대신하여 민국의 임시대총통을 맡았다. 1년후에는 정식 대총통이 되었고, 위안스카이의 야심이 점점 커져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황제가 되기는 하였으나, 전국에서 각계의 반대에 부딪쳤고, 나이 60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여전히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계통의 동료나 부하였던 단기서, 풍국장, 서세창이었으므로 사인에 대하여 별다른 말이 없었다. 부고장에서는 병사라고 하였으나, 보통은 화가나서 죽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첫째, 병사설

 

병사라고 얘기하는 설은 <<원씨도국기(袁氏盜國記)>>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5월 27일, 중의인 유축생, 초광우는 여러가지로 진료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6월 초4일에 이르러서는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고, 북경주재 프랑스공사관의 의사인 푸시진 박사를 불러 병세를 보게 하였으며, 요독증(尿毒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 신경쇠약병이 골수에 침입하여 회복시킬 희망이 없었다." <<원세개전전>>에서는 위안스카이가 앓은 것은 요독증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약과 서약을 섞어 먹음으로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원씨도국기>>와 <<원세개전전>>은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에 출판된 것이다. 이 설에는 믿을만한 구석이 많다. 1950년대의 유후생의 <<장건평전>>에서는 "위안스카이는 요독증을 앓았다. 섭호선이 팽창하였다, 만일 외과수술로 치료하였다면 절대 생명의 위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료에 대하여 위안스카이의 두 아들은 의견이 달랐고, 큰아들인 위안커딩(袁克定)은 서양의술을 믿어서 수술받을 것을 주장하였고, 둘째 아들인 위안커원(袁克文)은 극력 반대하여, 시기를 놓치고 결국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형세를 보아서 위안스카이가 홧병에 죽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설에서는 위안스카이가 의료상의 시기를 놓침에 따라 목숨을 잃었다는 것인데, 이에 근접하는 설중에는 위안스카이가 병이 든 후 약먹기를 거부해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설에 의하면 위안스카이가 창덕에 은거하여 있을 때, 어느 도사가 명을 보고 말하기를 "위안스카이는 58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어떻게 해야 넘길 수 있는지를 물으니, "이 일은 좀 어려운데, 용포를 입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침묵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사에게 독있는 술을 먹여서 집을 나서자 죽게 함으로써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이 때부터 딴 뜻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혁명이래로 적당한 기회를 찾아서 황제가 될 생각을 하였으며, 용포만 몸에 걸친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일은 생각했던 것처럼 풀리지 않고, 각 성에서는 반대의 소리가 높았다. 황제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 뿐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병이 깊어갔다. 혼미한 중에서도 도사를 불러 명을 구해달라고 할 뿐, 의사들이 주는 약은 먹지 않았다. 약에 독이 들어있을까 두려워해서이다. 주변에서는 그 사정을 다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고, 침으로 해결해보고자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세간에서는 첫째 아들이 침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고 알고 있으나, 그 속에 숨은 내막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원세개일사>>에서)

 

둘째, 화로 죽었다는 설.

 

통상적으로 얘기되는 것은 사천의 독군인 천환(진환, 陳宦)이 배신하고, "사천인을 대표하여, 항성(위안스카이)와 결별하고, 오늘로부터 사천성은 원씨 개인과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하였으며, 이것은 위안스카이의 목숨을 빼앗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왜 천환이 위안스카이를 배신하였고, 위안스카이로 하여금 병세가 악화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이는 천환이 원래 위안스카이의 충실한 부하였고, 황제제도의 옹호자였으며, 또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위안스카이가 천환에게 병사를 주어 사천에 들어가게 하기 전날,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삼궤구고(황제에게 올리는 예)의 예를 올렸다는 것이다.(<<조여림일생의기억>>에서). 천환은 먼저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다시 라마가 활불에게 절하는 최고의 예를 바쳤으니, 아부치고는 최고의 경지에 달했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그에 대하여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천환이 성도에 자리잡고 있는 한, 서남지방에는 아무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천환이 5월 22일 독립을 선포하였으니,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위안스카이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천환의 배반은 그로 하여금 무척 화가나도록 만들었다고 펑밍은 중국근현대사논문집에서 밝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천환의 이런 행동은 위안스카이의 다른 부하들이 따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5월 26일 섬서에서 독립을 선언한 천슈판(陳樹藩) 5월 29일 호남에서 독립을 선언한 탕샹밍(湯鄕茗)이 그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위안스카이는 이진탕(二陳湯, 진환, 진수번, 탕향명의 성을 따서 약명처럼 부른 말)을 먹고 죽었다. 이 세 사람이 독립을 선포할 것이라고는 그가 전혀 생각 못하였고, 그래서 홧병으로 죽었다(도국은 <<북양군벌통치시기사화>>)

 

셋째, 여색에 빠져 죽었다는 설

 

또 하나의 설은 당시 위안스카이의 주변에 있던 사람의 기억으로 "위안스카이의 죽음은 주로 여색을 탐해서 그런 것이다"(중국여유출판사출간의 <<인간백사통>>에서). 이 설은 위안스카이의 생활이 매우 문란하여, 원부인외에 첩이 9명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매일 녹용, 해구신등의 보약을 먹었다는 것이다. 1916년부터 몸이 점점 안좋아지기 시작하여, 요통을 항상 앓았고, 프랑스의 의사도 구하지를 못하여 요독증으로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당시의 정치환경하에서의 위안스카이의 정신, 심리에 대한 영향은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아마도 국사를 잘 모르는 아랫사람의 상상이나 추측이 널리 알려지고, 믿어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그외 놀라서 죽었다는 설

 

장병린이 위안스카이에 의하여 용천사에 연금되어 있을 때, 하루는 그가 주지스님인 종앙(宗仰)스님으로 하여금 위안스카이에게 그의 꿈을 전해달라고 하였는데, 꿈 속에서 장병린은 염라대왕이 되어, 조만간 위안스카이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였고, 지금 형구 하나를 시험하고 있는데, 위안스카이와 같은 간적은 홧불로 스스로 타서 죽도록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쇠침대 구리기둥에 구워서 죽이는 것이 좋을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종앙스님이 이 꿈을 전하였을 때, 위안스카이는 듣고는 놀라기도 하고 화가나기도 하여, 병을 얻었고, 위안스카이는 나중에 이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장태염애마인>>, 대만 중앙일보 1990. 5. 11자). 위안스카이와 같은 일대의 간웅이 이러한 꿈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황제꿈을 꾸던 위안스카이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알 수 있다.

 

위안스카이는 죽을 때, "그가 날 망쳤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어떤 사람들은 부하인 풍국장, 단기서라고 하는데, 이들은 총통직을 잇기 위하여 황제에 오르는데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혹은 천환, 탕샹밍이 처음에는 그를 쫓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버리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태자인 위안커딩이 황제위를 잇기 위하여 위안스카이를 종용해서 황제위에 오르게 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양두(楊度)등 "주안회(鑄安會)"회원들 및 그의 부하, 친구들을 지목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말에서 누구를 지적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말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그 뜻을 알기는 힘들다. 어떤 사람은 "그가 죽으면서까지 "그"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간웅이 죽으면서까지고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는 이 말로서 자기의 죄책을 덜고, 화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었고, 이와 같이 불분명한 말 한마디고 자신을 황제에 옹립하고 다시 배반했던 사람들을 질책한 것이다"(전오, <<양도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