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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의 집권후의 5차에 걸친 내각변동

by 중은우시 2006. 12. 7.

원세개가 신해혁명의 과실을 빼앗아 권력을 장악한 이후, 몇년간의 풍파속에 5차례에 걸친 내각이 탄생하였다.

 

1. 당소의(唐紹儀) 내각

 

당소의는 청나라 말기에 원세개의 신임을 깊이 받던 관료이다. 이 때 그는 원세개를 위하여 힘을 보태어 주었었다. "조화남북"을 내세웠고, 그는 혁명에 동조하여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1912년 3월, 원세개는 그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는데, 남경에서 조직한 제1차 내각이다.

 

당소의내각의 주요부서는 원세개가 직접 장악하였다. 예를 들어, 외교총장 육정상(陸征祥), 내무총장 조병균(趙秉鈞), 육군총장 단기서(段祺瑞), 해군총장 유관웅(劉冠雄)은 모두 원세개의 심복들이었다. 재정총장 웅희령(熊希齡)은 공화당 사람이었고, 교통총장은 당소의가 겸임했다. 동맹회의 송교인(宋敎仁), 채원배(蔡元培), 왕총혜(王寵惠), 진기미(陳其美)는 그저 농림, 교육, 사법, 공상의 네개 부서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당소의를 포함해서 동맹회가 내각의 10명중 5명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소의내각은 "동맹회중심내각" 또는 "당송내각(唐宋內閣)"으로 불린다.

 

4월, 당소의내각은 중화민국임시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이전한다. 당소의는 사사건건 대총통이 명령을 발포할 때는 반드시 국무원의 부서를 거쳐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원세개는 이에 대하여 불만이었다. 6월에, 원세개는 당소의내각이 원세개 직계가 아닌 왕지상(王芝祥)을 직예총독으로 임명한 일을 계기로 북양장령들에게 전통을 돌려 반대를 표명하게 하였고, 내각의 부서를 거치지 않고, 왕지상을 남경으로 보내어 군대에서 분리시켰다. "책임내각제"는 파괴되었고, 당소의는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된다. 7월, 송교인등 4명의 동맹회원은 원세개의 독단전행에 반발하여 연명으로 사직한다.

 

2. 육정상(陸征祥) 내각

 

당소의가 물러난 후, 원세개는 무당파의 원 외교총장 육정상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

 

1912년 7월, 육정상은 참의원회의에 참석하여, 정견을 발표하는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참의원에 소란이 인다. 그가 제안한 6명의 내각구성원에 대하여 모두 부결당한다. 원세개는 참의원에 압력을 가하여, 나중에 군대와 경찰의 감시하에 육정상이 2차로 제출한 내각구성원명단에 대하여 표결을 진행하고, 5명을 핍박에 의하여 통과시킨다. 재정총장 주학희(周學熙), 사법총장 허세영(許世英), 교육총장 범원렴(范源濂), 농림총장 진진선(陳振先), 교통총장 주계령(朱啓鈴), 공상총장 유규일(劉揆一, 8월에 보임)이고, 기타 외교, 내무, 육군, 해군의 4부는 예전과 같았다.

 

8월, 참의원은 육정상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한다. 육정상은 이때부터 병을 핑계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하여, 원세개의 또 다른 심복인 내무총장 조병균이 대리한다.

 

3. 조병균(趙秉鈞) 내각

 

황흥의 소통하에, 1912년 9월, 참의원은 조병균을 내각총리로 하는 안을 통과시킨다. 내각은 실제로 원세개의 어용기구였다. 황흥은 조병균 및 기타 6명의 내각구성원들을 국민당에 가입시킨다. 그리하여 조병균 내각을 "국민당내각"이라고도 부른다.

 

1912년 12월 - 1913년 2월, 제1기 국회선거가 전국에서 진행된다. 국민당은 중,참의원 양원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다. 송교인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정치가들은 합법적인 의회정치투쟁을 통하여 정권을 다시 장악하고자 하여, 장강유역의 장사, 무한, 남경, 상해등지에서 연설을 하고 정견을 발표하며, 진정한 국민당내각을 구성하고자 애쓴다. 3월, 국회가 소집되기 전날, 송교인은 북상하여 조각하려는 때에 원세개, 조병균이 사주한 흉도에 의하여 상해의 기차역에서 피살된다.

 

1913년 5월, 조병균은 "송교인사건"에 연루되어, 병을 핑계로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의 직위를 사직한다. 원세개는 허락하지 않고, 그저 그에게 "조리"하라는 거짓 명분을 주어 육군총장 단기서로 하여금 국무총리직을 잠시 대리하게 한다.

 

4. 웅희령(熊希齡) 내각

 

"송교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원세개는 적극적으로 혁명역량을 진압하려고 준비한다. 내전경비를 모으기 위하여 원세개는 조병균, 주학희등을 전권대표로 하여, 국회의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의 5개국 은행단과 <<선후차관계약>>을 체결한다. 이런 조치는 국민당원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친다. 5월말, 원세개는 민주당, 통일당, 공화당을 교사하여 진보당을 구성하고, 국민당에 대항하고, 군대를 남으로 내려보내 반혁명내전을 일으킨다. 혁명파들은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되며, "제2차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원세개가 무력으로 "제2차혁명"을 진압한다. 그러나, 북경은 여전히 국민당이 다수인 국회가 남아 있다. 국회선거를 통해 정식 대총통에 오를 필요가 있었던 원세개는 의원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발표한다. 국민당의원과 진보당의원이 합하여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한다.

 

원세개는 진보당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1913년 7월, 진보당의 웅희령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 진보당인들은 "제1류의 인재와 제1류의 경험"을 가지고 "명류내각(名流內閣)"을 구성한다. 9월에 내각이 구성된다. 사법, 교육, 교통, 농공상의 각총장직은 진보당 사람인 양계초(梁啓超), 왕대섭(汪大燮), 주자제(周自齊), 장건(張騫)등이 각각 담당한다. 재정부는 여전히 웅희령이 겸임하고, 외교, 내무, 해군, 육군의 중요부서도 여전히 손보기(孫寶琦), 주계령, 유관웅, 단기서와 같은 원세개의 적계 군벌, 관료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 원세개는 국회에 압력을 가하여, 1913년 10월 정식 총통에 당선된다. 그 후에 그는 정당과 국회를 없애버리기 위하여,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한다.

 

웅희령내각은 국회해산과 국민당해산에 부서하고, 정치문화교육등의 명령을 내린 후에는 더 이상 원세개에 의하여 이용될 가치가 없었다. 1914년 2월, 각종 여론을 통하여 웅희령내각이 더 이상 운영되기 어렵게 만들어 그를 사직하도록 하고, 손보기로 하여금 국무총리를 대행하게 한다.

 

5. 단기서(段祺瑞) 내각

 

1914년 3월, 원세개가 조종한 약법회의는 소위 <<중화민국헌법>>을 통하여 책임내각제를 총통제(대통령제)로 변경시키고, 국무원을 정사당(政事堂)으로 개칭한다. 그리고 서세창(徐世昌)으로 하여금 그 수뇌가 되도록 한다. 원세개가 권력을 독점한 후, 역사의 흐름을 거슬려 황제에 오르는 해프닝을 연출한다. 그리고 1916년 1월 1일에 정식 등극한다. 손중산을 위시한 혁명당인들과 양계초를 위시한 진보당인들은 "호국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적으로 매국을 반대하고 황제복벽을 반대하는 기운이 전국을 뒤덮는다. 이로써 원씨집단은 붕괴를 맞이한다.

 

원세개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어려운 상황하에서 1916년 3월 어쩔 수 없이 황제제도를 포기하고, 4월에 책임내각제를 회복시킨다. 국면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서세창을 사직시키고, 단기서를 국무경에 임명한다. 각부의 국무위원은 외교부장 육정상, 내무총장 왕읍당(王揖唐), 재정총장 손보기, 해군총장, 유관웅, 사법총장 장종상(章宗祥), 교육총장 장국금(張國금), 농상총장 김방평(金邦平), 교통총장 조여림(曹汝霖), 참모총장 왕사진(王士珍), 육군총장은 단기서가 겸임하였다. 정사당도 국무원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원세개는 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여원홍, 풍국장이 대총통을 맡는다. 이 때도 단기서는 계속 국무총리를 맡는다. 1918년 9월, 서세창이 총통으로 선임된 후에 비로소 사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