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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毛澤東)의 유언

by 중은우시 2005. 8. 12.

모택동이 남겼다는 유명한 말은 화국봉에게 했다는, "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니辦事我放心(중국발음으로 니빤스 워팡신)"는 것이다. 모택동이 이 말을 했다는 걸 듣고는 주은래를 비롯한 혁명원로들은 모택동이 화국봉을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후 화국봉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실제의 기록은 이런 전언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모택동의 비서인 장옥봉(張玉鳳, 장옥봉은 철도부 소속으로 모택동의 전용열차 여승무원이었다가 1970년 7월경부터 모주석의 신변업무를 처리할 사람이 필요하여 장옥봉이 옮겨와서 생활비서로 근무한다.)의 회고에 의하면 1976년 4월 30일 저녁, 모택동은 뉴질랜드 총리인 멀튼을 만난 후, 화국봉을 남게 하고 최근 업무를 보고받았다. 그 때의 회고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국봉은 주석(모택동)에게 말했다. 최근에 제가 몇가지를 처리했습니다. 현재 몇개 성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미 정치국의 동지들과 연구하여 처리했고, 중앙문건을 내려보냈으며, 형세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경험이 많지 않아 일이 있으면 정치국의 동지들과 많이 상의하고, 주석께 보여드려 의견을 듣겠습니다. 주석께서 말씀하셨다. "국제상의 문제는 큰 틀이 잡혔으니, 문제가 크지 않다. 국내의 일은 주의해야한다." 당시 주석의 말씀은 이미 분명하지 않았다, 화국봉 동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위의 말씀을 다시 한번 얘기했다. 그 후 주석께서 또 한 말씀을 하셨는데, 나도 잘 못알아들었다. 주석께서는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내가 부축하고 그는 종이에 이렇게 썼다. "만만래 불요착급(慢慢來, 不要着急, 천천히 하고 조급해 하지 말라)", "조과거방침판(照過去方針辦, 과거의 방침대로 처리하라), "니판사, 아방심(니辦事, 我放心, 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 당시 주석의 이 세 마디 말씀은 화국봉동지가 보고한 몇가지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다. 후에 얘기하는 "과거의 방침대로 처리하라"는 말이 임종유언이고, "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는 것이 후계자를 정한 것이라는 말과 같은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1976년 6월 하순에는 모택동이 화국봉과 얘기하는 중에 "국내문제요주의(國內問題要注意, 국내문제에 주의하라)"라는 글을 남겼고, 이것이 생전에 글로 쓴 마지막 말이었다.

 

1976년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 세대를 정리하는 의미가 있는 해였다. 중국공산혁명의 가장 주요한 세 인물이 모두 이 해에 차례로 사망한다. 주은래(周恩來)가 1976년 1월 8일 서거하고, 7월 6일에는 주덕(朱德)이 사망하였으며, 9월 9일에는 모택동(毛澤東)이 사망하였다. 뿐만아니라 이 해 7월 28일에는 당산에서 7.8도의 당산대지진이 발생하여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택동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읽은 보고서는 바로 중공중앙의 <<당산 풍남 일대의 지진 재난구조에 관한 통보>>라는 문건이었다.

 

모택동의 뜻에 따라 후계자의 지위에 오른 화국봉은 "과거의 방침대로 처리하라"는 모주석의 친필유시를 받들어 1977년 2월 7일에는 "무릇 모주석이 결정한 정책은 우리가 모두 굳건하게 보호하고, 무릇 모주석의 지시는 우리가 시종일관되게 준수하여야 한다"는 글, 소위 "兩個凡是"의 정책을 발표한다. 결국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이런 정책을 수행하던 화국봉은 등소평등 개혁파에 의하여 쫓겨나게 된다.

 


모주석기념관을 찾은 노년의 화국봉 부부.

화국봉의 모택동과 닮은 모습으로 인해 그가 모택동의 아들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