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태종의 이름은 홍타이시(皇太極)이며, 1592년 11월에 누르하치의 8째아들로 태어나서 1626년에 황제에 오르고, 1643년 9월에 사망하였다.
청태종은 황위를 노리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불리한 점이 많았다. (1) 모친이 홍타이시 11세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모친은 정식으로 대푸진(황후)가 아니었다. 홍타이시의 모친은 청태종즉위후 황후로 추봉되었다. (2) 홍타이시에게는 동모형제가 없었다. 자신을 도와줄 형제가 없는 것이다. (3) 외가는 누르하치와는 불공대천의 원수였다. 예허부족은 9부를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치러 왔고, 이 때 예허의 패륵이자 청태종의 외숙이 되는 부자이는 누르하치 부하의 손에 살해된다. (4) 홍타이시는 16 아들중 8번째로 아래도 위도 아니었다. 이런 여러가지 불리한 점에도 불구하고 청태종은 당시 자식들중 유일하게 글을 알았고, 무공도 뛰어났으며 특히 모략에 뛰어났다. 청태종이 황제에 오르는데, 경쟁자가 될만한 사람은 당시에 다음과 같았다.
첫째, 누르하치의 동생으로 후금을 일으키는데 일등공신인 슈얼하치(舒爾哈赤).
슈얼하치는 1611년에 돌연 사망하는데, 명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누르하치가 동생인 슈얼하치의 병력이 점점 강해지자 이를 시기하여 계책을 써서 죽였다고 되어 있다. 다만 슈얼하치의 자손들은 청나라에서 계속하여 팔기(八旗)중의 상남기(镶南旗)를 맡아서 계속 영화를 누리게 된다. 누르하치가 아낀 4패륵중의 하나인 아민(阿敏), 아민의 사후 그를 잇는 지얼하랑(濟爾哈朗)이 그의 아들들이다.
둘째, 누르하치의 장자로 태자에 오른 츄잉(저[衣+者]英).
저영은 1608년 누르하치에 의하여 저군(儲君, 차기 임금)에 오른다. 다만, 츄잉은 용감하긴 하였으나 당시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었으며, 마음이 좁아 결국 4패륵(貝勒) 5대신(大臣)에 의하려 고립된 후, 1613년 3월 26일에 높은 담장안에 유폐되고, 1615년에 누르하치의 명에 의해 죽는다. 당시 나이 36세였다.
셋째, 누르하치의 둘째아들이자 츄잉이 태자에서 폐위된 후 장자의 역할을 하게 된 따이샨(代善). 따이샨은 츄잉이 쫓겨난 후, 장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전투에서 공도 많았다. 그리고, 8기중 2개인 양홍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넷째, 누르하치의 어린 아들로 가장 아꼈다는 뚜얼곤(多爾袞). 누르하치는 만년에 대비 아바하이(阿巴亥)를 아꼈는데, 아바하이의 아들로 아지거(阿濟格), 뚜얼곤, 뚜어뚜오(多鐸)가 있었다. 후에 누르하치는 아지거에게 상백기를, 양황기는 뚜얼곤과 뚜어뚜오에게 넘겨주었다.
누르하치는 후계자를 명시적으로 지명하지 않으면서 "8왕이 공동으로 새 칸을 옹립하고, 폐위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르하치 사후에도 이러한 명에 따라 그의 사후 시체가 식기도 전에 칸의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8기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였다. 당시의 8기와 관련한 상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누르하치는 초기에 만주족의 조직을 4기로 나누었는데, 황기(黃旗)는 누르하치가 직접 통할하고, 남기(藍旗)는 동생인 슈얼하치가, 백기(白旗)는 첫째아들인 츄잉이, 홍기(紅旗)는 둘째아들인 따이샨이 맡았었다. 이후 츄잉이 쫓겨난 후 8기로 확대개편하면서, 양황기(정황기와 상황기)는 누르하치가, 양홍기(정홍기와 상홍기)는 따이샨이, 정남기는 망구타이(莽古爾泰, 누르하치의 다섯째 아들), 상남기는 아민(슈얼하치의 아들), 정백기는 홍타이시(누르하치의 8째 아들), 상백기는 누르하치가 직접 관할하다가 아지거(阿濟格)에게 넘겨주었다. 양황기는 뚜얼곤과 뚜어뚜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당시 뚜얼곤이 15살, 뚜어뚜오는 13살에 불과하여 실질적으로 양황기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8기의 서열은 다음 순서이다. 정황, 상황, 정홍, 상홍, 정남, 상남, 정백, 상백.
4대패륵은 당시 1패륵 따이샨, 2패륵 아민, 3패륵 망구타이, 4패륵 홍타이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중요한 인물이라면 뚜얼곤과 뚜어뚜오 그리고 그 생모인 아바하이였다.
4대패륵중 아민은 누르하치의 직계가 아니라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얼하치의 아들이었으므로, 대통을 잇는 것은 힘들었다. 이후에도 아민은 스스로 독립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계속하여 청에서 독립한 별도의 왕국을 만들고자 애를 썼으나 결국 청태종에게 살해당하며, 그의 자리는 동생인 지얼하랑이 잇게 된다.
망구타이는 누르하치의 5째 아들로서 용감하기는 하나 지혜가 없고, 성격이 거칠었을 뿐아니라 군사력도 다른 패륵에 미치지 못하였다. 뿐만아니라, 망구타이의 생모는 죄를 받아 죽음을 당하였는데, 망구타이가 스스로 생모를 죽였다. 이런 점에서 망구타이는 한 기를 이끌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한 나라를 이끄는 군주가 되기는 힘들었다.
뚜얼곤과 뚜어뚜오는 아직 어려서 당시에는 황위계승전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따이샨과 홍타이시의 대결구도였는데, 모든 면에서 따이샨이 유리하였다. 따이샨은 성격도 부드러워 모든 사람의 환심을 얻고 있었고, 전투에서도 공을 많이 세웠으며, 권력도 강하였다. 일찌기 누르하치는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어린 아들과 아바하이는 따이샨이 거둬서 길러달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따이샨은 몇번에 걸처 신망을 잃으면서 누르하치가 사망할 때에는 이미 저울추가 홍타이시에게 기울어져 버린다.
첫째, 따이샨의 둘째아들인 슈어투오(碩托)가 명나라에 투항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를 추궁해보니, 따이샨이 후처를 들인 후 후처의 말만 듣고 전처소생을 박대하여, 슈어투오가 명나라에 투항하려고까지 한 것으로 밝혀진다.
둘째, 따이샨이 자기 집을 지었는데, 누르하치의 궁보다도 넓고 화려하게 지어서 말썽이 된 적이 있다.
셋째, 아바하이는 어린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장자인 따이샨과 넷째인 홍타이시에게 음식을 보내는 등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홍타이시는 일체 거절하였으나, 따이샨은 아바하이로부터 음식등을 대접받고, 저녁에 아바하이가 따이샨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발각되었다. 이 일이 누르하치에게 알려지면서 따이샨과 아바하이는 징계를 받게 되나, 집안의 추한 일이라 크게 떠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따이샨의 명성은 많이 손상을 입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누르하치의 사망시에는 이미 홍타이시를 후계자로 하는데 대하여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이루어진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따이샨의 아들인 위에투오(岳托)와 사하린(薩哈璘)이 따이샨에게 "4패륵(홍타이시)의 재능과 덕이 가장 뛰어나고, 선제의 뜻에도 가장 합당하여 모든 사람들이 승복할만하니, 빠른 시일내에 그를 옹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따이샨도 "그게 바로 내 뜻이다. 너희가 한 말에 누가 협력하지 않으며, 누가 반대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다음날 홍타이시를 칸의 지위에 추대한다.
홍타이시는 잠재적인 경쟁자로 8기중 3기를 가진 뚜얼곤 형제를 염려하였음인지, 누르하치의 유명이라고 하면서 뚜얼곤형제의 생모인 아바하이를 순장시킨다.
다만, 홍타이시는 칸의 지위에 오르면서도 4대패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칸의 자리에 앉는다. 이후에도 4대패륵이 군사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처리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4명의 칸이 있고, 칸 중의 우두머리가 홍타이시인 격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아민은 독립하려는 꿈을 계속 가지고 활동하다가 1630년 영평전에서 패배한 후 도망하여 유폐되고, 망구타이는 홍타이시앞에서 칼을 뽑았다가 그 죄를 받으면서, 따이샨도 스스로 황제옆에 앉지 않고 아래자리에 앉겠다고 하면서, 홍타이시의 단독정권이 확립되었다.
홍타이시가 칸의 지위에 오른 이후 8기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양홍기는 여전히 따이샨이 맡는데, 정홍기는 따이샨 본인이, 상홍기는 따이샨의 아들인 위에투오가 맡는다. 정남기와 상남기는 망구타이와 아민이 그대로 맡는데, 아민의 자리는 나중에 그 동생인 지얼하랑이 맡게 된다.
양백기와 양황기는 조정을 거치는데, 우선 명칭을 서로 바꾼 다음에(즉, 기존의 양백기가 양황기로, 양황기가 양백기로), 양황기는 홍타이시의 직할로 둔다. 정백기는 뚜어뚜오에게 맡기고, 상백기는 뚜얼곤에게 맡긴다. 아지거는 기주의 지위에서 해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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