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강안(푸캉안, 1754-1796)은 건륭황제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았던 신하인데, 야사와 전설에는 그가 건륭황제의 사생아라는 얘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복강안은 푸차(富察)씨로서 상황기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건륭제의 정실황후의 본가인 외척으로서 당시 최고의 명문귀족이었다. (1) 고조부는 하스툰(哈什屯)으로 순치제 때의 의정대신이었다. (2) 증조부는 미스한(米思翰)으로 강희제 때 내무부총관, 호부상서, 의정대신을 역임하였다. (3) 조부 리롱바오(李榮保)는 차하얼총관을 역임했다. (4) 백부 마치(馬齊)는 병부상서, 좌도어사, 의정대신, 무영전대학사를 지냈다. (5) 백부 마우(馬武)는 내무부총관, 상백기몽고도통, 영시위내대신을 지냈다. (6) 고모인 부찰씨는 건륭제가 보친왕(寶親王)이던 옹정 5년(1727년)에 건륭제의 정실부인으로 시집가서 후에 효현황후에 오른다. (7) 부친인 푸항(傅恒)은 호부상서, 군기대신, 보화전대학사를 지냈고, 동화문내의 집까지 하사받는다. 23년간이나 재상의 지위에 평화롭게 머무른다. 건륭 34년 (1769년)에 푸항은 군대를 이끌고 버마를 공격하던중 병을 얻어 귀환하고 오래지 않아 사망하게 된다. 이 때, 건륭황제는 푸항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平生忠勇家聲繼 汝子吾兒定數培" (그대는 평생을 충성과 용기로써 집안의 명성을 이었네. 그대의 아들은 내 아들과 똑같이 키워주겠네)
복강안은 건륭제때 시위를 거쳐, 호부상서, 군기대신에 이르렀다. 그의 무술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고, 여러차례 농민반란을 진압하여 청나라를 위하여 적지않은 공을 세웠다. 후에 패자(貝子, 패자는 황제의 아들에게 부여하는 공적인 직위로 친왕, 군왕, 패륵, 패자의 순서로 직위가 높다)에 봉하고, 사망후에는 군왕(郡王)에 봉한다. 관직은 19세때 일등시위로서 정서대장군 원푸를 따라 대금천정벌에 나서고, 이후 길림장군, 성경장군, 성도장군, 사천총독, 섬감총독, 운귀총독, 민절총독, 양광총독, 무영전대학사(청나라에는 재상을 두지 않았으므로 대학사, 군기대신이 재상에 해당한다)등의 요직을 맡는다.
그의 일생을 보면 전투에서 백전백승을 거둔 뛰어난 무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륭37년에는 2번에 걸처 대소금천을 공략하고, 건륭 49년에는 감숙성의 이슬람교도의 반란을 진압하고, 건륭52년에는 대만의 임상문의 반란을 진압하며, 건륭56년에는 네팔에 참입한 궈얼카족의 침입을 격퇴한다. 이 4번의 전쟁에 복강안은 전부 참여하여 중대한 승리를 거둔다. 이 때 건륭제는 복강안을 왕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푸차씨 일가가 너무 흥성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왕으로 봉하지는 않고, 3개의 6품관직을 주면서 복강안 집안 사람중에 아무에게나 주도록 한 바 있다. 건륭 60년에는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여기서 승리하자 건륭제는 복강안을 패자에 봉한다. 이후 가경 원년(건륭제는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었음)에 전투중에 병으로 사망하는데, 건륭제는 매우 비통해하며 군왕에 봉하게 된다.
푸항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복령안(福靈安, 푸링안)으로 정백기만주부도통에 올랐다. 둘째는 복융안(福隆安, 푸륭안)으로 병부상서, 공부상서에 올랐으며 공(公)의 작위를 받았다. 셋째가 복강안이고, 넷째는 복장안(福長安, 푸창안)으로 호부상서에 오르며 후(侯)의 작위를 받았다. 그런데, 건륭황제는 푸항의 네 아들중 복강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에게는 모두 공주를 시집보내서 부마가 되게 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아꼈던 복강안에게는 공주를 시집보내지 않았다.
복강안에 대한 건륭황제의 총애는 남다른 바가 있었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복강안이 건륭제의 사생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하였다.
첫째, 건륭황제는 복강안이 1754년에 태어나자 어릴 때부터 황궁으로 데려와서 친히 기르며, 그를 친아들과 똑같이 대해 주었다.
둘째, 건륭황제는 복강안을 생전에 패자에 봉하고, 죽은 후에는 가용군왕(嘉勇郡王)에 봉하였다. 청나라를 통틀어 황제와 동성인 아이신줴뤄씨 이외에 이성(異姓)으로 군왕에 봉해진 것은 복강안이 유일하다(청나라 건국초기에 투항한 한족 장군들에게 왕의 작위를 부여한 경우는 있었으나, 이는 건국초기와 중원진입초기이고 그 이후에는 사례가 없었다).
셋째, 건륭황제가 푸항의 나머지 세 아들에게는 공주를 주어 부마를 삼으면서, 가장 아꼈던 복강안에게는 공주를 주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당시에서부터 복강안이 건륭제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많이 돌았다. 푸항의 부인은 당시에 유명한 만주족 미녀였다고 한다. 푸항의 누나가 황후이므로 푸항은 부인과 함께 궁중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이 때 건륭제의 눈에 띄어, 건륭제와 푸항의 부인간에 관계를 갖게 되고, 복강안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복강안이 건륭제의 사생아인지에 관하여, 이를 입증할 자료는 현재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건륭제의 복강안에 대한 총애는 통상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인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직접 증거가 없으므로(직접증거가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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