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숭정황제 자살시에는 왜 신변에 내시 1명만 남았던가?
역대 망국의 임금중에, 명나라의 숭정제는 가장 처량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361년전의 갑신년 여름4월,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을 공격할 때, 숭정황제는 내시들로 하여금 긴급상태를 알리게 하고, 관병과 친왕을 소집하는 종을 울리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에는 조정에서 그렇게 비분강개하던 대신들이 한명도 나타나질 않았다. 이들은 이미 일찌감치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단지 내시 왕승은만이 옆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고가과인(孤家寡人:황제가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이 된 숭정제는 장공주를 칼로 죽인 후, 자금성의 매산에 있는 한그루의 괴목에 목을 메었다.
<<명사.장열제본기>>는 숭정제가 자살 전에 쓴 유조를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짐을 망쳤다." 죽기전에도 신하들 때문에 망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스스로는 잘못한 게 없다는 고집스런 성격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또한 실망의 심정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너희 신하들이여,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면서...가장 너희들이 필요할 때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구나, 헛되히 너희를 먹여살렸구나."
송나라의 최후황제인 조길은 숭정제와 비교하면 똑같이 자살은 하였지만 그러나 완전히 모습은 달랐다. 처량한 것이 아니라 비장하였다. 명나라와 이자성의 군사역량을 비교하면, 남송과 몽고를 비교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몽고는 이미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휩쓸었고, 금, 서하를 멸망시키고, 토번, 대리국을 항복시킨 다음에 좁은 땅만을 차지하고 있던 남송에 쳐내려왔다. 무력이 가장 강성하였던 몽고가 약소국인 남송을 공격하는 것이므로 요즘에 비교한다면 슈퍼파워국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것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남송은 독자적으로 몽고에 수십년간을 항전하였다. 1279년이 되어 송나라의 군신들은 밀려나서 남해 가에 있는 애산을 사수하고 있었다. 몽고의 수군이 밀려오자 송나라는 장세걸의 지휘하에 장열하기 그지없는 애산보위전을 이끌었었으나, 힘의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여 결국은 실패하였다. 승상 육수부는 8세된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역사는 "후궁과 제신들이 죽은자가 대부분이었다" "7일이 지난 후 시체가 바다에 떠올랐는데 십만여구였다"라고 전한다. 대전중에 황실과 흩어졌던 장세걸은 어린 황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함대를 이끌고 다시 바다로 나갔으나 해릉도일대의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바다에 침몰하여 죽었다.
장세걸, 육수부와 북경에서 죽음을 맞이한 문천상은 후인들에 의하여 송말삼걸(宋末三傑)로 불리운다. 송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은 물론 이 세 사람만은 아니었다. 몽고군이 담주(지금의 장사)를 공격했을 때는 악록서원(岳麓書院)의 수백명의 유생들은 전부 전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때는 어떠했는가? 황제가 자살할 때, 신변에는 반쪽의 육수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나라군대가 남하할 때 투항하는 대신들이 하나, 둘 줄을 이었다. 강남일대의 선비들이 병사를 일으킬 때도 주로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스스로 자부하는 화하문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 이 왕실을 위하여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동남문인의 영수였던 전겸익과 같은 경우에는 말로는 항상 순국하겠다고 하였는데, 나라가 망했을 때, 유여가 물에 뛰어들어 절개를 지키자고 권하자 전겸익은 물이 너무 차가우니 다음에 보자고 하였을 뿐이다. 그는 결국 청에 투항하였고, 육수부가 되지 못하였다. 오죽하면 후의 청나라 황제들조차 이렇게 투항한 대신들을 업신여겨서 한족문인들은 너무 유약하다라고 하고 그들을 <<貳臣傳>>(두 황조를 섬긴 신하)에 수록하였겠는가.
명나라의 문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죽음을 겁내고 삶을 탐하는 자가 이전의 어느 황조에 비하여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학을 제창하였고, 문인들은 어릴 때부터 충신효자의 교육을 받았었다. 절개를 지킨 사람들에게 표창하는 것에도 명나라 황제들은 가장 힘을 쏟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천상, 육수부와 같은 사람을 기르지 못했고, 오히려 홍승주, 전겸익 같은 자들만 길렀다.
명나라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관건은 통치자가 문인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문인을 독립한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았고, 노비로 대한 것이다. 명나라 왕실은 문인들의 충을 배양하였지만, 그것은 한 가문 한 성씨에 대한 작은 충성을 얘기한 것이었고, 사직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큰 충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명나라의 개국황제인 주원장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효문제, 인종, 선종과 같이 문인들에게 잘 대해준 황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 황제와 문인들의 관계는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주원장은 거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문인을 개조하고자 하였다. 문인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절개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대신들의 엉덩이를 때리고, 태학이하의 각종 관학의 관리인원들에게는 문인들의 인격을 모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 아들인 주예(영락제)에 이르러서는 더 심해져서 심지어 건문제에 충성하는 방효유의 십족을 멸하였다.
방효유의 멸족은 실제로 천하의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원칙을 선포한 것과 같다. 정통성이나 원칙에 충성하지 말고, 최종의 승리자에게 충성하라.
이와 같이 계획적으로 유가를 살해하고, 유가를 욕보이는 왕조가 이학의 지위를 아무리 높게 들어올린다고 하더라도, 문인들이 다시 공자맹자성현의 말씀을 읽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고, 단지 한 무리의 거짓말을 잘하고, 드러내기 좋아하는 문인을 길렀을 뿐이다. 하나의 국가가 지식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면 결국 구할 방법이 없다. 결국은 "도화선 아래로 왕조를 흘러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桃花扇底送南朝)(도화선은 청나라때의 공상임 쓴 명말의 소남명정권시대의 극으로 주인공인 진회하 기녀 이향군이 부군 후방역을 위해서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 피가 부채에 묻는데, 그 피모양을 따라서 도화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함). 문인들의 기개가 기녀의 그것만도 못하게 된다.
송나라는 명나라와 비교하면 상당히 문인을 존중하였다. 송나라의 개국황제인 조광윤은 명나라의 주원장과는 정반대였다. 주원장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문인들의 기개를 꺾고자 하였다면, 조광윤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문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다. 심지어 후세의 계승자에게 헌법적인 권위를 지닌 유조를 내려 언론을 이유로 문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송나라에는 선비를 300년에 걸쳐 길렀다. 비록 황조의 무력은 계속 약하였으나 문인들은 거의 조정과 마음을 같이 하였고 위기를 같이 버텨갔다.
맹자가 말한 바 있다 "나라의 백성은 국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송나라의 황제는 비록 바다로 도망쳐갔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서 보위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때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킬 때는 강산의 절반이상을 아직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지고 있었으나, 황제의 신변에는 단지 내시 1명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내시에게 문신보다 훨씬 더 잘 대해주었으므로, 최후에 같이 죽은 자가 내시라는 것도 이치에는 맞는 것이다.
도화선
秦淮無語送斜陽
家家臨水映紅粧
春風不知人事改
依舊歡歌繞畵舫
誰來歎興亡
....
白骨靑灰長艾簫
桃花扇底送南朝
진회하(남경의 유흥가)에 저녁 햇살이 소리없이 비끼우니
물가의 집집마다 화장하는 기녀들의 모습이 보이네.
봄바람이야 사람사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를 것이고.
옛과 같이 꽃으로 치장한 배위에서는 흥겨운 노래소리가 들린다.
누가 나라가 흥하고 망한 걸 가지고 탄식할 건가
''''
하얀 뼈와 푸른 뼛가루는 풀피리소리에 흩뿌려지네.
도화선의 아래로 한 왕조가 흘러가는 걸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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