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성포나(盛浦那)
중국의 수천년 역사 속에서 적지 않은 도시가 한때 번성하여 도성(都城)이 되어 왕조의 성쇠를 목격했다. 어떤 곳, 예를 들어 서안(西安), 낙양(洛陽)은 지금까지도 활발하고 여전히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지방은 그다지 운이 좋지 않다. 한때 휘황했지만 점차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이제는 별볼일없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업성(鄴城)은 바로 그렇게 보는 사람들을 탄식하게 만드는 곳이다.
업성은 한때 육조(六朝)의 도성으로, 정치, 경제, 문화가 모두 정점에 달했었다. 그러나, 지금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 임장현(臨漳縣)의 한 소도시(小鎭)가 되어, 과거의 광망은 이제 그저 유적지와 역사책 속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업성은 가장 일찌기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원전658년, 제환공(齊桓公)은 중원의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장하(漳河)의 북안(北岸)에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업성의 시작이었다.
위치는 아주 좋다. 진(晋, 산서), 기(冀, 하북), 노(魯, 산동), 예(豫, 하북)의 4개 성이 교차하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업성을 "천하의 허리척추(腰脊)이고, 중원의 목구멍(噤喉)이다." 그 의미는 전략적인 위치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업성은 위(魏)나라에 귀속되고, 서문표(西門豹)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관리를 지낸다.
그는 현지에 사람을 해치는 '풍속'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하백취부(河伯娶婦)"로 매년 가난한 집안의 젊은 여자를 장하에 던져 넣어 하신(河神)에게 제사지냈다. 기실 현지관리와 무당들이 이를 기화로 돈을 벌었던 것이며, 현지 백성들의 고통은 더할 나위없이 컸다.
서문표는 이를 인정치 않았다. 그는 제사를 검사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제사를 주재하던 무당과 그녀의 수하를 강에 던져넣으면서 하신에게 물어보고 오라고 한다. 놀란 현지의 관리들은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그는 사람들을 모아 12개의 구거(溝渠)를 만들어 논에 물을 댔다. 그리하여 농업이 일거에 활성화되어, 업성은 부유해진다. 이 일은 역사상 아주 유명하고, 서문표는 지방을 잘 다스린 모범적인 관리로 명성을 얻는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업성은 위치가 좋기 때문에, 다시 인기를 얻는다. 건안5년, 즉 서기200년, 조조가 관도지전(官渡之戰)에서 원소(袁紹)를 격패시키고, 북방을 장악한다.
몇년 후, 그는 업성을 점령하고, 이곳은 자신의 본거지로 삼아, 성곽을 크게 확대한다. 동서로 7리, 남북으로 5리에 이르며 장수(漳水)에 인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에 3개의 고대(高臺)를 쌓는다. 동작대(銅雀臺), 금봉대(金鳳臺)와 빙정대(氷井臺).
이 삼대(三臺)는 군사용일 뿐아니라, 성안의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빙장대는 높이가 8장이고 140간의 방이 있었으며, 아래에는 15장깊이의 우물이 있어, 얼음과 양식을 보관할 수 있어, 매우 실용적이었다.
동작대는 가장 유명하다. 조조는 이곳에서 문화활동을 벌였다. 아들 조비, 조식, 그리고 많은 문인들, "건안칠자(建言七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때의 문학은 아주 성행했다. 조식이 쓴 <증백마왕표(贈白馬王彪)>는 아주 감동적이다. 그리고 여시인 채문희(蔡文姬)도 이곳에서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연주했고, 곡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업성은 그때 정말 문화의 중심이었다.
다시 그 이후에는 십육국(十六國)과 북조(北朝)시기이다. 업성은 이때도 매우 활발했다. 후조(後趙)의 석호(石虎)는 기원335년 도성을 이곳으로 옮기고, 적지 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서 성안이 번화해졌다.
나주엥 염위(冉魏), 전연(前燕)도 이곳을 도성으로 삼았다. 동위 천평원년, 즉 기원534년, 고환(高歡)은 도성을 낙양에서 이곳으로 옮겨온다. 그리고 업남성(鄴南城)을 건설한다. 남북으로 8리가 넘고, 동서로 6리였다. 그리하여 남북 양성의 국면을 형성하게 된다.
북제(北齊)에 이르러, 이곳은 최전성기를 이룬다. 북제때, 불교가 특히 발달했는데, 낙야으이 화상과 비구니도 따라왔다. 성안에는 4,000여개의 절이 생기고, 8만여명의 승려가 있었다. 그리고 200여개의 불경을 강의하는 곳이 생긴다.
북제황제는 불교를 매우 신봉했고, 돈을 내서 많은 사원을 짓는다. 그리고 옛궁전을 천평사(天平寺)로 고치고, 고가택자(高家宅子)는 대장엄사(大莊嚴寺)로 고쳐진다. 성밖의, 남북 향당산석굴(響堂山石窟)에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는데, 조각이 아주 정교하며 아릅다와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함과 역량을 느끼게 해준다.
업성은 문화가 강했을 뿐아니라, 도시계획도 잘 되어 있었다. 조조는 그때 중축대칭(中軸對稱)의 국면배치를 한다. 궁전은 북쪽에 두고, 관청과 귀족은 동쪽에 있었으며, 황가화원은 서쪽에 있었고, 보통백성은 남쪽에 살았다.
이런 설계는 편리하면서도 방어에 용이했다. 나중에 북제의 업남성은 성벽을 거북형(龜形)으로 바꾸어 더욱 튼튼해진다. 이런 계획은 나중에 수,당의 장안성, 낙양성 심지어 북경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일본의 나라성(奈良城)도 배워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업성이 "도성계획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춘추시대부터 북제에 이르기까지, 수백년동안 업성은 중요한 곳으로 정치, 문화, 군사에서 중심지였다.
아쉽게도 좋은 시절이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북제는 28년만에 망한다. 황제는 대부분 혼용했다 고위(高緯)는 적지 않은 충신을 죽였다. 곡률광(斛律光)과 고장공(高長恭)등. 그리하여 조정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백성들도 힘들어졌다.
기원575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기회를 잡아, 병력을 보내 북제를 친다. 577년, 북주군대가 업성으로 진입하고, 고위부자를 체포하며, 북제는 멸망한다.
북주는 업성을 상주(相州)의 치소(治所)로 격하시킨다. 더 이상 도성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북제의 궁전을 허물어버린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철저히 허물지는 않았고, 성안의 국면배치나 민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정 업성이 끝장나는 것은 몇 년이후의 혼란이었다. 580년에 이르러, 북주의 내부에 문제가 발생한다. 황제 우문윤(宇文贇)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우문천(宇文闡)이 8살의 나이로 황제에 오른다. 외척 양견(楊堅)이 그 관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그는 동작이 빨랐다. 북주의 종실을 모조리 수습했다. 그러나 노신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상주총독 위지형(尉遲迥)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는 북주의 원로이고, 집안배경이 대단했다. 모친은 우문태(宇文泰)의 누나이고, 일찌기 전쟁에서 공을 세워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양견은 그를 교체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위효관(韋孝寬)을 그의 후임자로 보낸다. 위지형은 양견의 속셈을 눈치챘고, 바로 업성에서 거병한다.
위지형의 당시 행동은 규모가 멌다. 그는 업성의 북문에서 행사를 열어 조정사자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자칭 대총관을 칭하면서 조왕(趙王) 우문초(宇文招)의 아들을 내세워 모두 함께 반항하자고 호소한다.
업성의 위치는 매우 좋고, 자원도 많다. 그는 금방 수십만의 병력을 모은다. 청주(靑州), 운주(鄖州), 익주(益州)도 모두 호응한다. 그리고 돌궐과 남쪽의 진(陳)과도 연락하여 대연맹을 구축하고자 한다.
양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위효관에게 병력을 이끌고 가서 반란을 평정하도록 지시한다. 양측은 업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위지형은 13만명을 이끌고 있었고, 그중 1만의 정예병으은 직접 지휘하여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위효관도 방법이 있었다. 전투를 절반쯤 진행한 다음 그는 부하를 시켜 주위에서 구경하는 백성들에게 쏘게 한다. 그러자 상황이 혼란에 빠진다. 위지형의 병사들의 진용도 혼란에 빠진다. 위효관은 그 틈을 타서 맹공을 벌였고, 위지형은 버티지 못하고 성안으로 물러난다. 결국 성이 함락되고, 그는 자살한다. 아들은 살해당했다.
이번 전투가 끝난 후, 양견은 악독한 결정을 내린다. 업성은 항상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여, 업성을 불질러버린다. 궁전과 사원, 성벽이 모조리 불에 탄다. 그리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45리 밖의 안양(安陽)으로 이주시키고, 장인들은 장안으로 불러 새로 성을 쌓는다.
큰 불은 몇달동안 지속되었다. 업성은 이렇게 폐허로 된다. 양견은 이곳의 이름을 영지현(靈芝縣)으로 바꾸었고, 안양이 새로운 지역중심이 된다. 그 이후 업성은 다시 옛날의 위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수나라이후, 유적지는 장하의 진흙에 묻혀버린다. 당나라 정관8년, 원래의 부지에 작은 성을 쌓고 업현(鄴縣)이라고 칭한다.
북송 희녕6년에 이르러, 업현은 임장현에 귀속된다. 업성진(鄴城鎭)은 이 지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름이 된다. 현재의 업성은 그저 유적지와 박물관만 남아 있고, 그것이 육조도성에서 폐허로 바뀐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업성이 비록 지금은 소도시이지만, 그것이 남긴 것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곳에 와서 관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적지 않은 역사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업성유적지는 임장현의 서남쪽에 있다. 개략 14평방킬로미터이다. 이는 국가급의 고고공원이고, 1988년에 중점보호단위로 지정된다.
그 안에는 업북성과 업남성이 있다. 성벽, 궁전바닥, 도로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번 걸어다녀보면 옛날의 기세를 느낄 수 있다.
2023년, 이곳은 정식으로 국가고고유적지공원이 되고, 몇 개의 전시구역으로 나뉜다. 삼대유적지구에는 금봉대, 동작대와 빙정대가 있다. 금봉대는 12미터 높이 120미터 길이, 71미터 너비이다. 올라가보면 주위의 논밭을 볼 수 있다.
동작대는 동남각(東南角)만 남았고 높이는 5미터가량이다. 빙정대는 홍수에 매몰되었고, 모형만으로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궁전구역도 있다. 2023년 천추문(千秋門) 유적지를 파낸다. 그리하여 궁성의 서문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명문(朱明門)은 업남성의 남문이고, 문앞의 광장은 이전에 큰 의식을 진행했던 곳이고, 그 옆에는 사원유적이 있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동작삼대유적지공원을 가보아야 한다. 업북성의 서북각에 있고, 임장현 삼대촌(三臺村)은 이것때문에 유명해졌다. 공원안에는 금봉대, 동작대, 빙정대가 있으며, 입장료는 40위안이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된다.
금봉대는 잘 보존되어 있고, 올라가서 풍경을 볼 수 있다. 동작대는 약간 파괴되었지만, 조조가 이곳에서 채문희를 만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재미있다.
공원에는 조조의 상이 있는데 아주 위풍당당하다. 문창각(文昌閣)은 방고(仿古)건축인데, 문창제군에게 바치는 것이다. 전군동(轉軍洞)은 조조의 비밀통로로 신비한 점이 있다.
비랑(碑廊)에는 역대문인들이 업성에 대해 쓴 시를 전시해 놓았다. 건안풍골관(建安風骨館)에는 "삼조칠자(三曹七子)"의 문학이 전시되고 있으며, 문물관에는 출토된 문화재가 있다. 삼대모형은 옛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012년, 이곳은 아시아 금려장(金旅奬)을 받았다. 가장 문화특색이 있는 관광지라는 것이다. 삼국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업성박물관도 유적지 곁, 향채영향(香菜營鄕) 현왕촌(顯王村) 북쪽에 있으며, 현성에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한나라의 건물처럼 지었고, 점유면적은 65무, 그 안은 5천평방미터가 된다.
박물관 안에는 300여건의 도기, 자기, 청동기가 있는데, 6개 룸으로 나뉘어 있다. 사전(史前)부터 북제까지 모두 볼 수 있다. 모형, 문화재. 다매체를 통해 업성이 이전에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볼 수 있다.
특히 북오장(北吳莊)에서 발굴한 불상은 아주 잘 만들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정도이다. 입장료는 60위안이고 봄여름은 9시부터 6시반까지, 가을겨울은 5시반까지이다. 시간을 들여서 살펴볼 만하다.
불상을 얘기하자면, 2012년 북오장에서 매장갱(埋藏坑)을 파서, 2,895개의 불상과 수천개의 쇄편(碎片)을 발굴했고, 이는 신중국성립이래 최다 불상발견이 된다.
대다수는 동위, 북제때의 것이고, 청석으로 조각한 것은 모양이 우아하고, 정교하게 조각했다. 그리하여 당시 업성의 불교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2019년, 이들은 북경의 국가박물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그중 뛰어난 문화재 171건을 골라서, 4부분으로 나누어 업성의 불교문화를 전시했다. 현재 이들은 모두 업성박물관에 있고, 그곳에 가면 볼 수 있다.
업성으로 와서 관광을 하려면 한단에서 "임장-삼대" 혹은 "자현-삼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도착할 수 있고, 자가운전으로 107번국도를 따라 장하공원까지 가고 다시 동쪽으로 삼대경관구로 가려면 북으로 2킬로미터 걸어가면 된다.
봄과 가을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날씨도 편안하고, 야외에서 돌아다녀도 피곤하지 않다. 유적지는 모두 노천이므로, 물과 자외선차단제가 필요하다. 박물관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규칙은 지켜야 한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업성은 육조도성에서 오늘날의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정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업성이 휘황할 때, 정치, 문화, 계획이 모두 일류였고, 이후의 전쟁과 큰 불로 그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현재 그곳에 가면, 유적지, 공원, 박물관에서 옛날의 그림자를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문화의 무게를 느껴볼 수 있다. 업성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고, 중국문화의 보배이며, 가서 살펴보면서 천천히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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