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좌종당(左宗棠)이 신강(新疆)을 수복한 후, 군기대신(軍機大臣)의 직위를 수행하기 위해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특별히 산서(山西)로 가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이름은 교치용(喬致庸)이고, 교가대원(喬家大院)의 주인이며 상인이다.
좌종당이 섬감총독(陝甘總督)을 맡고 있을 대, 교씨집안의 자금지원을 받은 바 있다. 그가 교가대원에 도착한 후, 교치용일가에 대련(對聯)을 써준다: "손인욕이복천리(損人欲以復天理), 축도덕이능문장(蓄道德而能文章)" 횡액에는 "이화(履和)"라는 두 글자를 썼다. 그 뜻은 "이중도화(履中蹈和)"이다. 이 대련은 대원의 문앞에 새겨서 걸려 있다.
기현(祁縣)의 가장 기세있는 건축물은 바로 교씨집안사람들이 만든 봉폐식 성보대원이다. 대원은 동향이고, 사방이 도로에 연접해 있으며, 담방은 10여미터 높이이고, 위에는 여장(女墻)식의 타구(垛口)가 있어, 마치 군사요새같다.
집안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만, 집안을 지키기는 어렵다. 기세가 엄청난 교가대원은 가문의 영광을 지키고 있으며, 비바람에 흔들리면서 이백년간 버텨왔고, 거부가족이 과안운연(過眼雲煙)으로 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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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살기로 운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씨집안이 성공한 비결이다.
교씨가문의 조상은 가난뱅이였고, 길거리에서 구걸을 할 정도였다. 한동안 교씨집안에서는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보본당(報本堂)에 거지의 바구니와 타구곤(打狗棍)을 놓아두고, 자손후대들에게 죽 한그릇, 밥 한 그릇도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웠다.
이런 말이 있다.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 교치용의 할아버지인 교귀발(喬貴發)은 운명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청나라 강희(康熙)연간, 교귀발은 기현 교가보(喬家堡)에서 태어난다. 그는 교씨집안의 제1대 창업자로서, 가장 먼저 가난의 속박을 벗어났다.
후인의 구술에 따르면, 교귀발은 젊었을 때 글자를 전혀 몰랐고, 매우 가난했다. 한번은 마을에서 조카 한명이 결혼을 하는데, 그는 엉덩이를 드러내고 주방에 가서 도와주었다. 경사를 더욱 시끌벅적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고, 사람들 앞에서 교귀발을 모욕했다. 가난하다고 조롱하면서 너는 오나 마나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은 체면이 중요하다. 이 사건은 교귀발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예 기현을 떠나버린다.
당시 "주서구(走西口)"의 붐이 있었다. 북방 각성의 주민들이 장성이북으로 나가서 생계를 도모했으며, 중원지방과 몽골초원간의 통로를 개척했다. 기현은 태악산의 북록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고이래로 사통팔달이었다. 그중 길 하나는 북경으로 가는 천섬(川陝)의 관도(官道)였고, 또 하나는 홍구(洪口)를 지나 태행산을 넘는 남북고역도(南北古驛道)이다. 그리하여, 교귀발은 주서구의 이민붐을 따라 고향을 떠나 새외(塞外)로 나갔다.
교귀발은 혼자서 북상한다. 처음에는 그저 일꾼에 불과했다. 몽골초원의 살랍제청(薩拉齊廳, 지금의 몽골 토목특우기)에서 낙타를 끌었고, 또 한 가계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먹고 쓰는 것을 아껴서 약간의 돈을 모았고, 두부를 만드는 장사를 시작한다.
진상(晋商, 산서상인)의 유전자는 이 가난한 소상인에게서 점점 맹아를 싹틔운다.
산서는 내륙에 위차하고 있으며, 산이 많고 경작지는 적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지로 나가서 살길을 찾는다. 산서상인은 명나라정부가 실행한 "개중법(開中法, 명나라때 소금과 차등을 변경까지 운송하는 업무를 상인에게 위탁한 제도)"으로 부를 축적하는 비법을 장악한다. 그들은 식량물자를 변방의 양식창고까지 운송하면서, 식염을 판매하는 허가증인 염인(鹽引)을 받는다. 그리고 전국각지에 소금을 판매하면서 계속 발전한다.
청나라때 진상은 전성기에 도달한다. 심지어 무역으로 유라시아각국과 접촉한다. 그리하여 실력이 가장 강대한 상방(商幇)중 하나가 된다. 진상은 후기에 주로 부남편(府南縣)을 위주로 했다. 즉, 태원부(太原府) 이남의 몇개 현, 기현, 태곡(太谷)과 평요(平遙)등을 포함한다. 기현사람들은 남북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데 능했다.
두부가판대를 펼친 교귀발은 원래 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사머리가 있었다. 약간의 돈을 모으자, 같은 산서고향사람인 진씨(秦氏)와 함께 빠오터우(包頭)로 가서 창업한다.
빠오터우는 "포극도(包克圖)"라고도 부르며, 몽골어로 "사슴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투(河套)지구에 속하며, 남으로는 황하가 흘러, 토지가 비옥했고 수량이 풍부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계지(黑界地)"로 지정해서, 한족이 들어가 살 수 없게 했다. 나중에 개방했고, 주서구의 중요 상업도시로 성장한다. 다만 이 새로 개발하는 도시에는 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부족했다.
교, 진 두 사람은 빠오터우의 개방과 더불어 이곳에 초료포(草料鋪)를 열어, 오고가는 상인들을 접대하며, 그 기회에 식품도 판매한다. 그들은 초기에 빠오터우로 왔고, 장사재주도 있어서, 사업은 갈수록 번성한다. 그리하여 다른 소상인들도 속속 그들을 따라한다.
이들은 교귀발의 장사를 질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변방소도시에는 점포가 많아지면서 악성경쟁이 발생한다.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교귀발은 이 업종으로는 이점이 없다고 여겨 과감하게 "매수초(買樹梢, 싹이 날 때 미리 사는 선물거래를 가리킴)"의 사업을 시작한다.
리스크를 안고 이익을 취한다. 이는 교씨집안이 성공한 또 다른 비결이다.
소위 "매수초"는 선물거래와 유사하다. 봄에 나무에 푸른 잎만 보인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과실이 열리지만 얼마나 열릴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만일 봄에 어떤 가격으로 "나무"를 사놓으면 가을에 과실이 많이 열리면 큰 돈을 벌고, 그렇지 않으면 손실을 입는다.
교귀발은 "매수초"의 방식으로 식량거래를 진행했다.
그는 농민이 가을, 겨울에 양식을 팔아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며, 봄, 여름에는 손에 쥔 돈이 부족하여 생활하기 힘들다는 점을 발견한다. 교귀발은 좀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경작하며, 아직 추수는 하지 않았을 때, 농민들의 급히 돈이 필요한 심리를 이용하여, 먼저 그들에게 안정된 곡물가격을 정하고, 동시에 그 곡물가격과 주문수량을 지급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돈을 먼저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가을이 되어 시장의 곡물가격이 얼마가 되든지간에 이 가격과 수량으로 양식을 구매한다. 농민은 이렇게 미리 돈을 받는 것을 좋아했고, 속속 교귀발과 계약한다.
교귀발은 계산이 빨랐다. 전해에 곡물가격이 폭락했을 때 사업을 했다. 봄여름에 미리 정한 곡물가격으로 돈을 주고, 가을이 되면 가격이 아무리 오르더라도, 그는 원래 상의한 가격으로 농민에게서 곡물을 사들여 쌓아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곡물이 부족해질 때 팔아서 큰 돈을 번다.
빠오터우에서 여러 해동안 장사를 하면서, 교귀발은 "광성공(廣盛公)"이라는 상호를 쓴다. 나중에는 "복성공(復盛公)"으로 바꾼다. 교귀발의 사업이 점점 성장하면서, 빠오터우라는 도시도 점점 번화해진다. 그리하여 항간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먼저 복성공이 있고, 나중에 빠오터우성이 있게 되었다." 나중에 복자호(復字號)는 빠오터우에서 가장 큰 사업체가 된다 19개의 점포, 500여명의 직원이 일했다. 경영범위는 차, 비단, 약재, 전당포, 가죽과 식량등 모든 것을 취급했다.
교귀발은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상인이 된다. 이때 그의 나이는 오십이 되었고, 금의환향한다. 그리고 교가보의 십자로 동북쪽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다. 이것이 교가대원의 원형이다.
반평생 가는하게 지낸 교귀발은 항상 자손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나는 원래 가난뱅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온갖 차별을 당했다. 너희는 부자라고 하여 불인(不仁)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 상도(商道)는 바로 인도(人道)이다. 주서구한 교귀발은 본분을 잊지 않았고, 반평생 고생하여, 마침내 교씨집안의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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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귀발의 손자 교치용은 가경23년(1818년)에 태어났다. 이때 교씨집안은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교귀발의 세 아들은 교전덕(喬全德), 교전의(喬全義), 교전미(喬全美)인데,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잘 경영했다. 삼형제가 경영할 때, 교씨집안은 약 백만냥의 재산을 갖게 된다. 이와 상반되게 당초 교귀발과 동업했던 진씨집안의 자제들은 돈을 마구 쓰면서,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계집질하느라 재산을 모조리 탕진한다. "복성공"의 지분은 이제 교씨집안이 모두 소유하게 된다.
교씨삼형제는 중러변경의 캬흐타(恰克圖)의 차 거래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남에서 북으로의 차로(茶路)를 개척한다. 당시 남방의 차는 주로 양로(兩路)를 거쳤다: 하나는 서쪽으로 신강(新疆), 캬흐타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장가구(張家口)에서 동북(東北)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무수한 사람들의 생계와 관련되었다.
그리하여 교씨집안에서는 10만냥 백은을 투자하여 기현에 "대덕성(大德誠)", "대덕흥(大德興)"의 두 차장(茶莊)을 열어, 산서의 여러 차상인들과 공동으로 차로의 안전을 보장했다. 차상인은 복건 무이산(武夷山)에서 출발하여, 파양호(鄱陽湖)를 지나, 장강(長江), 한수(漢水)를 거쳐 예서산로(豫西山路)를 넘고, 황하를 건너 상당(上黨), 분하(汾河)를 지나, 장성을 넘어 몽골로 들어간다. 만리차로를 거쳐, 캬흐타까지 운송하여 무여글 한다. 교씨집안의 차로사업은 날로 흥성해진다.
셋째인 교전미는 "재중당(在中堂)"이라는 당명으로 현제중 가장 총명하고 능력있었다. 그는 교씨집안의 대부분 사업을 관장한다. 자손들이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는 "오부준(五不準)"의 가규(家規)를 정한다: 아편을 피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첩을 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도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계집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 주정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교전미는 바로 교치용의 부친이다.
교씨집안을 최전성기로 이끈 사람은 교씨의 3대 교치용이다. 그는 원래 상업보다 공부에 뜻이 있었다. 말년에까지도 그의 책상에는 항상 유가의 경전들이 놓여 있었다.
교치용은 교씨집안의 삼당(三堂)의 삼대중 나이가 비교적 어린 편이었다. 가족중 같은 배분의 형, 누나들은 그보다 20여세가 많았다. 그의 아명은 "량아(亮兒)"였고,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셔서 형수가 그를 키웠다. 어렸을 때, 교치용은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머리를 쳐박고 공부했다. 그리고 수재(秀才)까지 된다. 완전히 서생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은 사서오경을 읽던 이 젊은이가 교씨집안의 지위를 철저히 바꿔놓게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기현의 이 교가대원은 전국의 금융계통을 조종하게 된다.
교씨집안의 사업은 원래 교치용의 형인 교치광(喬致廣)이 계승했다. 그러나, 교치광은 경영을 잘 못했고, 경쟁상대방과의 상전(商戰)에서 함정에 걸려 교씨집안을 경제위기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본인은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
교치용은 당시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득이 자신이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씨와 관련있는 상인들과 연합하여, 상대방이 교씨집안을 상대했던 방법을 그대로 써서 완승을 거두고, 교씨집안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발전한다.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과거시험공부를 하던 서생은 산서상계의 거인이 된다. 교치용은 원래 과거를 통해 집안을 빛내고자 했지만, 가족의 위기 속에 가업을 계승하고, 교씨집안을 산서에서 가장 높은 명성을 지닌 상업가족이 되도록 성장시킨다.
3
부친, 조부와 마찬가지로, 교치용은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다.
1세기전에, 중국의 금융중심은 산서였다. 교씨집안은 원래 양유(糧油), 사차(絲茶)등의 사업에 능했다. 그런데 교치용은 평요의 첫번째 표호(票號) 일승창(日昇昌)에서 아이디어를 받아 눈을 전망이 좋은 표호로 돌려 "대덕통(大德通)", "대덕항(大德恒)"이라는 두 개의 표호를 연다. 그리고 신속히 전국 20여개 도시에 분호(分號)를 내고, 회통천하(匯通天下)의 대표호로 발전시킨다.
표호는 진상을 대표로 하는 고대 상방이 개설한 금융기구이다. 청나라 도광에서 광서연간에 성행했다. 주로 송금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예금, 대출까지 했다. 일부분은 현대의 은행과 비슷한 기능이다. 상업발전과 더불어, 상인들이 외지에서 구매하는 상품수량이 확대되고, 움직이는 금은현금이 점차 증가한다. 표호는 송금등 업무를 통해 상업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금융역량이 된다.
교치용이 집안을 운영할 때, 교씨집안의 대덕통, 대덕항 표호는 대강남북에 모두 퍼져 있으면서, 신용이 탁월하고, 관리가 엄격하여, 예금이 끊이지 않았다. 전성기에 대덕통의 고본(股本, 주식)과 예금총액은 7,8백만냥이상이었다. 자본의 20여배에 달했고, 4년에 교치용의 이익은 20여만냥에 이른다. 이 2개의 표호는 1951년에 문을 닫는다.
교씨집안은 표호의 이윤을 가지고 한때 부가적국(富可敵國). 부로 나라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청패류초(淸稗類鈔)>의 통계에 따르면, 교씨집안의 재산은 4,5백만냥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토지, 주택, 점포등 부동산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청나라때, 현령의 연봉이 수십냥이고, 양렴은까지 합치면 수백냥이었다. 그러나 교씨집안의 장궤(掌櫃)는 1년이 1000냥백은의 수입을 얻었다.
함풍,동치연간, 청나라조정은 태평군(太平軍), 염균(捻軍)을 진압하는데 대량의 군수물자가 필요했고, 각지의 부유한 상인들에게 기부출연을 독려했다. 교씨집안도 여러 차례 돈을 냈다. 교치용은 이로 인하여 2품관직과 정대화령(頂戴花翎)을 받는다. 1900년, 경자국난때 서태후, 광서제가 북경을 떠나 기현을 지나간다. 그때 교씨집안사람들로부터 융중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교씨집안의 표호에서 은30만냥백은을 내놓아, 서안으로 피난가는데 쓰도록 했다. 서태후는 교씨집안에 구룡등(九龍燈)등 진귀한 보물을 하사했고, 지금도 교가대원에 걸려 있다.
교치용은 상업재능이 남들보다 뛰어났고, 일생동안 많은 성취를 얻는다. 그러나 그는 자녀를 교육할 때,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信)"이며, 그 다음이 "의(義)"이고, 세번째가 바로 "리(利)"라고 가르친다.
신용을 중시하는데 교치용은 조그만치도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
한번은 빠오터우의 복자호 산하의 유방(油坊)에서 점원이 호마유(胡麻油)에 가짜를 섞어서 팔다가 교치용에게 발각된다. 호마유는 추위를 견디는 호마(胡麻, 참깨)를 원료로 하여, 서부지역, 북부의 춥고 건조한 지역에서 항상 먹는 식용유이다. 역사도 길고 백성들의 생활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교치용은 대노하여, 그 가짜를 섞은 점원을 질책한다: 너는 우리 집안의 간판을 부숴버리려고 하느냐. 우리의 밥그릇을 깨버리려고 하느냐? 이어서 그는 급히 사람을 시켜 사방에서 팔았던 가짜 호마유를 회수하고, 돈을 전액 돌려준다. 교치용을 사과하면서 공개적으로 표시한다. 교씨집안의 조훈은 "신의리"라고 돈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을 해칠 수는 없다고.
관료의 길을 버리고 상인의 길로 들어선 교치용은 일생동안 "역유역상(亦儒亦商)"했다. 그는 <주자치가격언(朱子治家格言)>을 교씨집안의 문 위에 써놓았다. 일단 집안의 후손중 잘못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바닥에 꿇어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해야 했다. 진상의 각 대가족중에서 교씨집안은 집안의 가풍이 가장 엄격했다.
교치용은 자손들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했고, 직접 대련을 써서, 내원의 문에 새겨놓았다. "구명구리막구인(求名求利莫求人), 수구기(須求己); 석의석복비석재(惜衣惜福非惜財), 연석복(緣惜福)" 이는 명리를 얻으려면 반드시 스스로 근면하게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돈을 벌면 족한 줄 알고 복인 줄 알아라는 것이다.
그외에 교치용은 부친의 "오부준"에 하나의 조항을 추가한다. "하인들을 학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교씨집안은 하인들에게 아주 관대했다.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학대하지 않고, 그들도 충분히 먹고, 따뜻하게 입고, 존중받게 해주었다. 급여도 많이 주었을 뿐아니라, 국수, 고기, 땔감, 석탄등 일용품도 나누어 주었다. 심지어 나이든 종에게는 섬양비(贍養費)를 지급했다.
교씨집안은 여종을 들일 때, 젊고 예쁜 아가씨는 부르지 않았고, 열심히 일하면서 능력있는 여자로 골랐다. 가장 좋은 것은 경험많은 중년부녀였다. 자손들에게 첩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여색에 빠지는 것도 금지했다. 교치용은 89살까지 살았는데, 6명의 부인을 두었다. 모두 전처가 사망한 후 후처를 들인 것이고, 첩을 들이지 않는 원칙은 끝까지 지켰다.
기현에서 교치용은 명성이 좋았고, 존경을 받았다.
광서3년(1877년), 산서에 큰 가뭄이 든다. 심지어, "광서삼년(光緖三年), 인사일반(人死一半)"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하에서 많은 부호들은 스스로도 지키기 어려웠다. 그러나 교치용은 큰 돈을 내놓아 이재민들을 구제했고, 집안 하인들을 시켜 길거리에서 죽을 나눠주도록 했다. 동시에 가족들에게 "고기를 먹지 못하고, 거친 옷을 입도록"했다. 그렇게 아낀 돈을 이재민을 구제하는데 썼다. 그가 앞장서자 기현의 각 부호집안은 속속 따라하고, 기현은 유랑하는 이재민이 가장 적은 현이 되었다.
광서26년(1900년), 국가에 재난이 많이 닥치고, 기현에도 기근이 발생한다. 교치용은 다시 한번 집안의 비용지출을 줄이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풀었다. 그리하여 교가보의 사람들은 식구수대로 식량을 나눠받았고, 외지에서 오는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죽을 나눠주었다.
이후의 여러 차례의 사건으로 교씨집안은 날로 쇠퇴한다. 그러나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일부 원인은 아마도 그들이 널리 선행을 베풀고, 하인들에게 잘 대해주고, 고향사람들을 적지 않게 도와주었다는 것일 것이다. 나중에 현지인들이 "억고사감(憶苦思甜)"에 참가했을 대 교씨집안은 크게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말을 적지 않게 해주었다.
민간의 말에 따르면, 교치용은 "명이 질기다"
모질의 나이에 교치용은 여섯명의 부인이 모두 그보다 먼저 죽는다. 몇몇 아들중에서 오직 그를 대신하여 집안을 관리하던 셋째아들 교경엄(喬景儼)만이 임종했다. 그러나, 말년의 교치용은 여전히 자손들에게 글을 읽도록 엄격하게 독촉했고, 사람됨은 더욱 호방하고 거리낌없었다. 그의 묘표(墓表)에는 그가 나이들었을 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흰 머리카락이 창처럼 날카로웠고, 먹고 씹는 것이 호방했다.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 목소리를 높여 얘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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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치용 장사술은 후손들에게 천만의 재산을 남기고, 또한 이 가족이 나중에 닥칠 위기를 암시했다. 시대는 그들의 재산을 보장해주지 못했고, 재산은 대야 속의 물과 같이 언제든지 쏟아질 수 있었다.
교씨집안의 장사술은 이말치부(以末致富), 이본수지(以本守之)이다. 위에 의지하는 것은 관청이다.
교씨집안이 성공한 후, 그들은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관청에 잘 보였다. 동치, 광서연간 섬감의 지방고위관료, 산서순무, 도원등은 거의 모두 교씨집안과 경제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의 교씨집안에 대한 태도는 필요하면 쓰고, 필요없으면 버린다는 것이었다.
청나라말기, 경자배상금으로 재정곤란에 처했을 때, 조정은 잠시 산서표호의 공금송금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남방에서 조정의 공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민간의 표호를 다시 개방시켜 공금을 송금한다. 국가의 위기가 지나가자, 조정은 다시 금지한다. 동시에, 청나라조정은 전쟁배상금을 상환하기 위하여, 여러번 산서표호에 돈을 빌려갔다가 갚았다.
산서표호는 청나라조정에 의존하여 신속히 발전한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다중의 위기 속에서 신속히 붕괴한다.
1913년, 산서의 표호들이 속속 문을 닫는다. 교씨집안의 대덕항, 대덕통 두 개의 표호는 시대의 변화속에서 힘들게 살아남았지만, 쇠락한다. 송금업무를 은행이 대체하면서, 표효의 예금도 대폭 감소하고, 결국 역사무대에서 퇴출된다.
정치폭풍도 교씨일족을 석권한다. 이전에 교치용의 장남 교경대(喬景岱)와 차남 교경의(喬景儀)는 비명에 죽는다.
교경대는 교씨집안의 빠오터우에서의 호마유 사업을 계승했는데, 지역을 독패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다가 경쟁상대방에 의해 "패반(覇盤)"으로 고발되어, 악성독점행위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다행히 친척이 서태후의 심복태감에게 뇌물을 주어, 대사면이라는 명목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만 그후에 사업에는 간여하지 못한다. 호경대는 이로 인하여 중병을 얻어 결국 우울하게 사망한다. 교씨집안의 경자배 인물중에서 오직 그만이 정7품의이라는 하급관직을 얻어 묘비에 "경"자를 쓰지 않게 된다.
교경의는 교씨일족중에서 실권없는 관직(虛銜)이 가장 높은 자손중 하나이고, 청나라조정의 왕공독무(독무는 총독, 순무)와 교류가 빈번했지만, 최후가 좋지는 않았다. 교경의가 빠오터우에서 교씨집안의 사업을 관장할 때, 몽골귀족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결국 죽고 만다. 어떤 사람은 그가 암살당하여 목이 잘렸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추격을 받았지만, 말을 타고 밤중에 기현으로 도망쳐와서 그후로 이름을 바꾸고 조용히 살아서, 언제 죽었는지도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백발인이 흑발인을 보낸 것은 교치용의 말년에 가장 비통한 기억이다.
교치용의 손자대에 이르러 사상이 선진적인 "양소야(洋少爺)" 교영하(喬映霞)가 출현한다.
교영하는 중국 수천년만의 대변국시기에 태어났고, 사상에서 각파의 영향을 받는다. 젊었을 때는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를 추종했고, 나중에는 손문(孫文)을 존경한다. 그후에는 서방문명으로 눈길을 돌려 기독교에 귀의하고 집안의 돈으로 혁명당을 지원한다.
신해혁명후, 교영하는 교가대원의 장문인이 된다. 그는 앞장서서 변발을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그의 주재하에 교씨집안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를 따라간다. 빠오터우의 "복"자호의 사업은 한때 부흥의 조짐이 나타난다. 교영하는 기현 제3구의 구장에 임명되어 고향사람들을 이끌고 아편재배를 금지한다. 그러나 아편싹을 제거하다가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난다. 이를 보면 그는 일처리에서 결단력이 있고 과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교영하는 사랑꾼이었다. 교영하의 본부인이 사망한 후, 그는 천진(天津)에서 여자대학생 유국수(劉菊秀)를 만난다. 두 사람은 금방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결혼후 교영하는 유국수와 나이차이가 많았고, 성격도 맞지 않아서, 결국 몇년만에 혼인은 파경에 이른다.
교영하는 이 일로 정신이상이 생겨 물러나게 된다. 1956년에 북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81세였다.
교영하가 병을 얻은 후, 교씨집안을 이끈 사람은 교경엄의 아들인 교영규(喬映奎)였다. 항일전쟁때, 교씨집안의 전당포, 점포등은 모두 일본군에 몰수되어, 큰 손실을 입는다. 그리하여 더 이상 대부호의 기세는 사라진다. 항일무장을 지원하기 위해, 교영규는 암중으로 모은 무기와 총탄을 중국군대에 보낸다.
교가대원의 견고한 높은 벽은 마치 교씨집안 조상대대로 내려온 튼튼한 팔뚝처럼 전체 가족을 보호한다. 일본군이 기현에서 살인방화를 벌일 때, 다행히 현지 천주교성당의 이탈리아 신부가 교가대원의 입구에 이탈리아국기를 걸어준 덕분에 교가대원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의 소문에 따르면, 이탈리아신부가 도와준 것은 예전에 교치용이 의화단의 난때 7명의 태원에서 황급히 도망쳐온 이탈리아수녀를 숨겨주고, 큰 수레로 그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이탈리아인은 그 은정을 잊지 않았고, 국기를 걸어놓아 교가대원을 보호해준 것이다.
교영규가 죽은 후, 교씨집안의 백년기업은 점점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항전승리후, 교씨집안의 각 점포는 속속 재개업했지만, 이미 명존실망(名存實亡)했다. 1953년까지 참담하게 경영하다가, 상대적으로 체면을 지키는 방식으로 경영을 끝낸다. 그후 교씨일족은 교가대원에서 나가고, 교가대원은 정부에서 접수한다.
교씨집안 사람들이 떠난 후, 교가대원은 전후로 병원과 양식창고로 쓰인다. 나중에는 진중지위(晋中地委)의 당교(黨校)로 쓰인다. 어떤 사람이 이 건축물을 파괴하자고 했을 때, 당시 건물을 지키던 원성서(原成瑞)는 대문을 걸어잠그고, 십여미터의 담장은 외부의 소란을 막아주었고, 몇대의 교씨집안사람들이 만든 대원은 비바람을 거치면서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담장이 높은 대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청전석와(靑塼石瓦)는 묵묵히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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