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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대청(大淸): "기실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by 중은우시 2025. 1. 20.

글: 흑조음(黑噪音)

제목만 보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말씀드리면,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려는 것이 아니라, 대청의 조정에서 국내에 선전할 때 확실히 청일전쟁(중국에서는 甲午戰爭이라 함)에 승리했고, 일본에 이겼다.

만일 1894년에서 1895년에 살았던 중국인이고, 또한 청일전쟁에 관심이 있었다면, 당신은 분명히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할 확률은 99.9%라고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보고 들을 수있는 관방매체와 선전에서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알다시피,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정부는 일본에 참패했고, 근대중국에서 처음으로 진정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이며, 청나라조정이 붕괴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어쨌든 서양열강에게 패배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전의 제자였던 동쪽이웃나라 일본에게 패배한 것은 당시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러나, 상층통치자, 엘리트들은 청일전쟁의 패배를 일반 백성들은 알지 못하게 했다. 안정을 위하여, 청나라조정은 국내에서 청일전쟁의 결과가 청정부의 승리라고 선전했고, 그리하여 일반 백성들은 계속하여, "또 이겼다"는 열광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천조상국의 아름다운 꿈을 계속 꿀 수있게 된 것이다. 서방세력과 일본이라는 가짜양귀자(洋鬼子)에 대한 원한정서는 갈수록 강렬해졌다.

사실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전쟁에서 승리했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서양에 이미 여러번 패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하여, 상층부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든지간에, 일반백성에 대한 선전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고, 계속 이겨야 했다.

만일 일반백성이 진상을 알게 되면, 사회불만이 일어나고, 그것은 정말 골치아픈 일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조정은 국면을 회복하고,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하는 방면에 더 많은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정을 '대내선전전'에 두었다.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자신감을 가지고 생활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아래는 장몽린(蔣夢麟)이 남긴 기록이다:

"새해가 되면, 일부 소상인이 마을로 와서 그림을 판다....한 해의 설날연휴동안, 새로나온 그림이 아이들의 흥미를 끌게 된다. 이 화려한 그림은 1894년(갑오년) 청일전쟁의 이야기이다. 그중 한 장의 그림에는 발해의 해전장면이 그려져 있다. 일본함대의 군함 한척이 몇 개의 화약을 가득 담은 와관(瓦罐)에 맞아 불이 나서, 군함이 침몰하고 잇었다. 그림 속에는 수백개의 똑같은 와관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이런 와관은 당시 민간에서 쓰던 요강(夜壺)이다. 밤에 소변을 볼 때 사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그림에는 한 무리의 묶여 있는 일본포로가 그려져 있다. 어떤 포로는 쇠창살 속에 갇혀 있다. 중국이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 종이 위의 승리에 대하여 우리 아이들은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중에 내가 나이가 좀 든 후에 비로소 실제로는 일본에 패배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대만을 할양하고, 우리 해군은 일본에 전멸했고, 고려(조선을 가리킴)도 일본이 빼앗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보면, "항일드라마"가 그 당시에 이미 그림이라는 형식으로 널리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외에, <해군대승도(海軍大勝圖)>. <고려월야대전우진득승전도(高麗月夜大戰牛陳得勝全圖)>는 각각 당시 청군의 "승리"에 대한 선전이었다. 이 판화는 현재 대영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19세기에 구입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그중에는 상해 구교장(舊校場)의 전형적인 연화(年畵)도 있고, 약간 석재(石齎)가 출품한 흑백판화도 있다.

일본의 국립공문서관 아주역사자료센터는 일찌기 2014년 대영도서관과 합작으로 웹사이트에 "회화중의 청일전쟁(일본에서는 日淸戰爭이라고 부름)의 금회(錦繪), 연화(年畵)와 공문서(公文西)"인터넷전람회를 거행했고, 거기에는 이런 내용의 판화가 전시된 바 있다.

이들 판화중에서, 청군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아니라, 승리후에 일본군포로를 처벌했다.

이상은 민간매체와 예술의 재창작인데, 청나라관방에서는 실질적인 선전통제작업을 진행했을까? 정말 그러했다.

전보(電報)는 그 시대에 가장 유행하던 통신수단이었다. 그리하여 전보국에 대한 정보통제가 핵심이 된다. 청일전쟁기간, 청나라조정은 전보국에 외부에 여하한 전쟁과 관련된 정보를 내보내는 것도 엄금하고, 여하한 사람도 전보 내에 전선의 전투상황에 대한 실제사정을 써넣을 수 없었다. 특히 민간이 암호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금지했다.

이를 보면, 청나라조정은 전쟁이 진행될 때, 이미 한 가지 사정을 우려하고 있었다: 만일 전쟁에서 패배하면, 소식이 민간에 전해질 것이고, 그럼 사람들의 분노, 실망과 불안정정서를 가져와서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산대첩(牙山大捷)"에 대하여 당시의 주류매체인 <신보(申報)>도 아산대첩이라고 보도했다. 왜냐하면, <신보>도 전보국을 통하지 않고 진실한 직접적인 소식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실 소위 "아산대첩"은 청군의 아산참패였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이 대내적으로만 강경하고, 심하게 제한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비전문적이고, 형편없었다.

그들은 비록 전보를 통제하고, 기밀을 유지하여,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데 뛰어났지만, 대일작전에서는 기밀누설로 엉망진창이 된다. 심지어 이홍장(李鴻章)과 총리아문(總理衙門)간의 밀전(密電)도 일본측에서는 모두 획득하여 해독한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상당히 피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일처리를 조심스럽게 하여, 청나라의 비밀문건을 해독하였지만, 자신들의 기밀유지업무는 아주 잘 처리했다. 수십년후에 일본은 당시 청나라조정의 밀전을 해독한 것을 공개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청나라가 멸망한 후였다.

다시 청나라조정의 "대내선전업무"로 돌아가보자.

당시에 판화로 선전하고, 전보를 통한 정보를 제한하였고, 주류매체도 사회의 풍향에 영합하여, 동일한 방향으로 보도하며, 청나라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의 "영원히 이긴다"는 열광적인 요구를 만족시켰다.

청일전쟁이전의 중법전쟁(中法戰爭)기간동안, <신보>는 한번 당한 바 있다. 그들은 당시 매체의 책임을 위해, 청나라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사실대로 보도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들로부터 <신보>가 신문이 마땅히 지켜야할 선을 지키지 못했다고 집단적으로 비난하면서, 프랑스인들의 편에 서서 보도함으로써, 자기국가의 위풍을 깍아내렸다고 말했다.

민중들은 청나라군대가 승리하는 판화그림이나 뉴스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을 얘기하는 매체를 싫어하고, 그들의 입을 닫게 하려고 했다. 그런 매체는 자연스럽게 "매국노"라는 악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그리하여, <신보>는 판매부수를 위하여 부득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보도방향을 바꾸어, 더 이상 사실대로 청나라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게 된다.

기실 <신보>는 청일전쟁 후반기에 신문의 진실보도책임을 견지하려는 거동을 보인 적도 있다. 외국매체의 뉴스를 번역하는 방식으로, 청군이 패배한 소식을 일부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매번 그런 뉴스를 내보낼 때마다, 민중은 "적의 기세를 조장한다"고 질책받았으며, 더구나 외국매체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민중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신보>는 정말 억울했다. 다만, 당시 보도는 약간의 자유도가 있었다. <신보>의 라이벌인 <신문보>는 상대방이 약화된 기회를 이용하여, 판매부수를 위하여 더 이상 체면불구하고, 청군이 "해상야호진(海上夜壺陣)"을 펼쳐 일본군을 희롱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낸다.

이 뉴스가 터무니없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뉴스는 <신문보>가 아주 잘 팔리게 만들었고, 당시의 인기신문이 된다.

민중은 그런 것을 보고 싶어했다. 매체를 욕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청나라말기의 기괴한 일들은 정말 적지 않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양무운동이 민중에게 자신감을 가져다 주어서, 중국이 금방 서양의 과학기술과 공업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면서 서양의 법률과 제도는 배우지 않았다. 그래도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 앞에서, 민중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외에 청나라조정은 대내선전업무를 아주 중시했다. "민란"은 그들에게 있어서 열강보다 겁냈다. 어쨌든 서양인들에게는 영토를 할양해주거나, 배상금을 주면 그만이지만, 민란으로 혼란이 일어나면 청나라조정이 끝장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