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귀주장씨문화연구회(貴州章氏文化硏究會)
1. 팽성유씨(彭城劉氏). 패현유씨(沛縣劉氏)라고도 부르며, 유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한나라의 개국황제이고, 한족의 "한(漢)"자는 그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유씨는 고대 중국에서 대명이 자자했고, 모두 66명의 황제를 배출한다. 이 집안의 후손중에는 기재가 특히 많았고, 왕후장상, 문인묵객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2. 농서이씨(隴西李氏). 이 집안은 전욱(顓頊)과 고요(皋陶)의 후손으로 시작한다. 진,한때부터 이씨집안은 무장(武將)집안이었다. 진나라때의 이신(李信), 서한의 이광(李廣)같은 명장이 모두 이 집안사람이다. 수(隋)나라에 이르러 농서이씨는 이미 권세가 대단한 가족이 되고, 이씨집안의 이연(李淵)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당성세를 개창한다. 이씨집안은 이로 인하여 전성기를 맞이한다.
3. 홍농양씨(弘農楊氏). 화음양가(華陰楊家)라고도 부른다. 양씨집안은 명문집안이다. 서한에는 유명한 재상 양창(楊敞)이 있고, 그의 현손 양진(楊震)도 고위관료로 태위까지 지내며 관서부자(關西夫子)로 불렸다. 양씨집안은 한나라때 진정한 사세삼공(四世三公)이다. 양진의 후손 중에는 양견(楊堅)도 있다. 즉 수문제(隋文帝)이다. 북송의 양가장(楊家將)도 양진의 다섯째 아들 양봉(楊奉)의 후손이다. 양씨집안에는 또한 양수(楊修), 양형(楊炯), 양만리(楊萬里)같은 명인이 있다.
4. 태원왕씨(太原王氏). 이 집안의 조상은 주령왕(周靈王)의 태자(太子)이다. 그는 진(晋)의 땅으로 갔고, 그의 후손이 아주 많아서 태원의 대성이 된다. 위진시대부터 당나라때까지 아주 유명했다. 이런 말도 있었다. "천하의 왕씨는 모두 태원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왕전(王翦), 왕안석(王安石), 왕양명(王陽明), 왕세정(王世貞), 왕부지(王夫之)같은 사람들이 모두 태왕왕씨의 후손들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왕한(王瀚), 왕창령(王昌齡), 왕지환(王之渙)은 태원 토박이들이다. 왕씨집안중 일부는 산동으로 이주했는데, 역시 대단하며 낭야왕씨(瑯琊王氏)를 형성한다. 낭야왕씨는 한, 당때 104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그때의 사람들은 왕씨집안은 대대로 공후(工侯)이며, 재상도 대대로 이러진다는 말이 있었다. 저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가 바로 낭야왕씨의 사람이다.
5. 진군사씨(陳郡謝氏). 이 집안은 위진시대부터 발달했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비수지전(淝水之戰)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긴 사안(謝安)이 있고, 남조의 시인 사령운(謝靈運)도 있다. 진군사씨는 동시대의 낭야왕씨와 더불어 "왕사(王謝)"로 불렸다. 그들의 휘황한 정도는 당나라중기에 어떤 시인의 시에서도 알 수 있다: 옛날의 왕씨, 사씨집안의 저택에서 살던 제비가, 지금은 일반백성의 집으로 날아왔다(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性家)고 노래하였다.
6. 청하최씨(淸河崔氏). 이 집안은 한나라에서 수당에 이르기까지 북방의 명문가족이다. 그들은 서주시기 제(齊)나라에서 시작했고, 최씨집안에서는 재상을 지낸 사람이 27명이다. 그때의 지위는 매우 혁혁했다. 남북조와 수당때 청하최씨는 박릉최씨(博陵崔氏), 농서이씨, 범양노씨(范陽盧氏), 조군이씨(趙郡李氏), 형양정씨(滎陽鄭氏), 태원왕씨와 더불어 "칠종오성(七宗五姓)"으로 불렸다.
7. 형양정씨(滎陽鄭氏). 이 집안의 조상은 주선왕(周宣王)이 봉한 정(鄭)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나라가 망한 후, 그들은 정을 성으로 삼고, 원래의 지방인 형양의 명문집안이 된다. 남북조때, 형양정씨는 청하최씨, 범양노씨, 태원왕씨와 더불의 중국북방의 4대명문집안이었고, 당나라이후 형양정씨는 연이어 9명의 재상을 배출하였으며, 상서, 시랑, 절도사등의 직위에 오른 사람은 더욱 많았다. 그들중 어떤 사람은 조정에서 근무했고, 어떤 사람은 주군에서 가르쳤고, 어떤 사람은 변방에서 공을 세워, 사회경제문화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8. 범양노씨(范陽盧氏). 이 집안은 강성(姜姓)에서 나왔다. 역시 제나라의 후손이다. 봉지가 노읍(盧邑)이어서 노를 씨로 삼았다. 그들의 세조 노오(盧敖)는 진시황때 오경박사였다. 나중에 범양으로 이사를 왔고, 자손은 다시 탁주(涿州)로 옮겨갔다. 그들은 범양을 군망으로 삼아서 후세인들은 그들을 범양노씨로 불렀다. 한나라말기에서 당나라때까지 600년동안 정사에 기재된 노씨의 역사명인은 840여명에 달한다. 심지어 건륭제조차도 노씨집안에 "자고유연무쌍지(自古幽燕無雙地), 천하범양제일주(天下范陽第一州)"라는 싯구를 남겼다.
9. 태원온씨(太原溫氏). 이들의 조상은 희성(姬姓)에서 유래한다. 즉 주문왕(周文王)의 후손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초당의 온가삼걸(溫家三傑)로 온대아(溫大雅), 온언박(溫彦博), 온대유(溫大有)의 삼형제이다. 온씨집안의 전성기때는 당문종조차 이렇게 감탄했다: "이씨가 천하를 통치한지 200년이 되었는데, 온씨같은 대가족과 혼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황실과 혼인하고자 하는 사람들보다 많구나."
10. 난릉소씨(蘭陵蕭氏). 이 가족은 두 왕조의 천자, 9명의 재상을 배출한다. 그들은 한나라때부터 성장하였고, 시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소하(蕭何)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소망지(蕭望之)라고 한다. 오호난화때 난릉소가는 강남으로 이주하고, 금방 세력을 키운다. 나중에 남제(南齊), 남량(南梁)의 황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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