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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대청해군(大淸海軍)의 발전사(發展史)

by 중은우시 2025. 3. 17.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청나라 선통원년(1909년), 일본인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청일전쟁 15년후이 그들이 동사도서(東沙島嶼)의 경쟁에서 대청제국에 패배할 줄은.

2년이전인 1907년, 일본인 니시자와 히로시(西澤吉次)가 120명의 노동자를 데리고, 중국 남해에 위치한 동사도(東沙島)에 상륙하고 명칭을 "니시자와시마(西澤島)"라고 붙인다. 일본해군의 지원하에, 일본인은 이 겨우 1.8평방킬로미터의 작은 섬 위에 방어공사 및 각종 주민시설을 건설했다. 의도는 장기적으로 동사도를 점유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청일전쟁후 다시 굴기한 대청제국의 해군이 동사도를 향해 진군해온 것이었다.

1909년 초여름, 청나라조정은 먼저 군함 비응호(飛鷹號)를 파견하여 해관순라함과 함께 동사도로 증거채집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항해도중 서사군도(西沙群島)를 순시한다. 그후, 청나라조정은 다시 군함 광해호(廣海號)를 파견하여 동사도를 압박한다. 당시 중국국내에서는 새로운 일제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중국과 일본간의 동북아에서의 대결이 날로 격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청나라조정과 남북에서 대치하여, 두개의 전선에서 작전하는 것을 막고, 대청제국이 해군을 재건한 후 신속히 발전한 점을 고려하여, 일본인은 최종적으로 이미 점유했던 동사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1909년 11월 19일, 후보지부(後補知府) 채강(蔡康)은 대청제국 군함 광해호의 호위하에 동사도에 상륙한다 .일본인이 섬의 걸었던 국기를 내린 후, 청나라해군의 황룡기가 동사도에 높이 올라간다. 그후 광해호는 21발의 예포를 쏘아 동사도가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했다.

100여년이 지났고, 대청제국은 멸망하기 2년전에 있었던 동사도를 탈환한 장거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더욱 드문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조정이 1895년에서 1911년까지 제국의 마지막에 신속히 청나라해군을 재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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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비록 청일전쟁에서 참패하고, 북양해군은 거의 전멸했지만, 대청제국은 해군을 재건하려는 웅심장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청일전쟁후, 청나라조정은 한때 총리해군아문(總理海軍衙門) 및 해군내외학당(海軍內外學堂)을 모조리 폐지하고, 북양해군의 관병을 모조리 해산시킨다. 다만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 양강총독 유곤일(劉坤一), 신강순무 도모(陶模)등 식견있는 대신들의 건의하에, 청나라조정은 제국해군을 재건한다. 1895-1899년까지 사이에, 청나라조정이 대외적으로 40여척의 군함을 구매하여 새로 아시아해군강국으로 성장한다.

1899년, 청나라조정은 북양수사(北洋水師)를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섭조규(葉祖珪, 1852-1905)로 하여금 통령(統領)의 직위를 맡게 한다; 1904년, 섭조규는 대청제국 총리남북양해군 겸 광동수사제독을 맡고, 이전에 각각 따로 싸웠던 청나라조정의 해군을 통일적으로 관리한다. 이는 청나라역사상 남북해군이 최초로 통일적으로 편제된 경우이다.

1909년에 이르러, 청나라정부는 북양, 남양, 광동, 복건의 4개 수사(水師)를 통일적으로 순양함대와 장강함대의 양대 작전계통으로 재편한다. 그리고 명장 살진빙(薩鎭氷)으로 하여금 해군제독에 임명하여 전군을 지휘하게 한다. 그 아래에서는 정벽광(程璧光)이 순양함대를 지휘하고, 심수곤(沈壽堃)이 장강함대를 지휘한다.

당시, 청나라조정의 순양함대는 모두 15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장강함대는 17척의 전함을 보유했다.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것처럼 청일전쟁이후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과는 상반되었다. 1894년이후의 아시아해역에서 대청제국의 해군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역량으로 발전한다.

다시 군함을 대규모로 구매하고, 제조하는 외에, 청나라조정은 청일전쟁으로 중단된 해군인재배양계획을 회복시켰다. 1896년, 청나라의 제4차 해군유학생이 다시 해외로 나간다. 이들은 중국의 해군강국몽을 실현하는 임무를 지고 해외에 간 것이다.

비록 재건중이지만, 일본해군 및 열강해군과는 아직 비교적 큰 차이가 있었다. 다만 멸망하기 전의 대청제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취약하지는 않았다. 멸망하기전의 십여년간 청나라는 분발도강의 용기와 결심이 있었다.

1899년, 이탈리아는 청나라에 절강의 삼문만(三門灣)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재건후의 북양수사통령 섭조규는 해기함(海圻艦)등 5척의 신형전함을 이끌고, 공개적으로 이탈리아와 절강에서 대치한다. 청나라해군은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탈리아사람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08년, 마카오에 살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이 경계를 넘어 광동 준해(浚海)로 들어간다. 여러차레 교섭을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결국 청나라조정은 '해주(海籌)', '해용(海容)'의 두척의 군함을 직접 마카오주변에 주둔시켜 포르투갈인들을 위협한다. 청나라조정의 '포함외교'에 직면하여 포르투갈인들은 부득이 마카오 경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재건후의 강대한 해군에 의존하여, 대청제국은 전혀 겁을 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탈리아, 포르투갈인들과 맞서싸운다. 그뿐아니라, 열강에 비해서는 실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대청제국의 해군은 이홍장시기의 북양해군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1902년, 대청해군은 심해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해의 각 도서를 순시하고, 깃발을 세우고 비석도 세워서 주권을 표시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1907년, 광동수사제독 이준(李準)은 해군을 이끌고 공개적으로 서사군도를 순시한다. 그리고 임도(林島, 지금의 永興島)에서 예포를 쏘고, 대청해군의 황룡기를 올린다. 그리고 석비를 세워 "광동수사제독이준순열지차(廣東水師提督李準巡閱至此)"라는 비문을 남긴다.

이준

1909년, 날로 발전하는 청나라해군은 최종적으로 무력으로 압박하여 일본인의 수중에서 동사도를 회수한다. 그후 광동수사제독 이준은 다시 관병을 이끌고 '복파(伏波)', '침항(琛航)'의 두 척의 군함을 타고 서사군도로 가서 조사한다. 그리고 서사군도의 15개 도서에 이름을 짓어 돌에 이름을 새겨, 서사군도가 중국영토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몇년후에는 멸망할 왕조가 중국이 향후 심해로 나아가고 해외원정을 하는데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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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해군을 재건하기 위하여 선통원년(1909년), 섭정왕 재풍(載灃)은 그의 동생이자, 해군을 배운 적이 없는 재순(載洵), 그리고 명장 살빙진등 두 사람을 주판해군대신(籌辦海軍大臣)으로 삼고, 1909년 8월, 1910년 7월, 재순과 살빙진은 두 차례에 걸쳐 대표단을 이끌고 출국하여 해군을 고찰한다.

당시 재순은 가는 나라마다 몇 척의 군함을 계약한다. 이때의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국가의 돈으로 '천녀산화(天女散花, 선녀가 꽃을 뿌리다)'한다고 풍자했다. 다만, 사실상, 재순과 살빙진은 나름대로의 고려가 있었다. 한편으로, 외국의 선진군함을 구매함으로써 청나라의 해군력을 강화시킬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청나라가 미래 스스로 군함을 건조하는데 참고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고찰할 때, 재순등은 '신품종'을 도입한다. 바로 해병대이다. 귀국후, 재순과 살빙진은 산동 연대(煙臺)에 중국최초의 해병대 전신인 해군경위대(海軍警衛隊)를 조직한다.

환고자제(紈絝子弟)라고 비난받았지만, 중국해군건설사에서는 청나라황족인 재순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재순은 기개가 있었고, 14년항전기간동안 재순은 만주국의 관직을 끝까지 거절하고, 일본인을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1949년, 재순은 천진에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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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광반조의 마지막 불꽃 속에서 1911년 4월, 대청제국해군의 "해기호" 순양함은 중국군함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항행을 시작한다.

1911년 4월, "해기호"는 청나라정부의 명령을 받아, 순양함대 통령 정벽광의 지휘하에, 먼저 영국으로 가서 영국국왕 조지5세의 등극식의 함대해상교열식에 참가한다. 그후, '해기호'는 1911년 7월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행진하는 해기호 병사들. 1911년 8월.

해기호가 미국을 방문하는 기간동안 마침 쿠바와 멕시코에서 대규모의 중국인배척운동이 벌어진다. 정벽광은 그 소식을 듣고 군함을 몰고 쿠바로 간다. 쿠바 대통령은 해기함의 위세에 겁을 먹고, 정벽광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쿠바군민은 절대로 화교를 차별대우하지 않겠다." 해기호는 그후 쿠바에서 정박하며 수리한 후, 멕시코로 가서 멕시코의 중국인배척사건을 추궁할 예정이었다.

당시, 멕시코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대규모살해사건이 벌어졌고, 토레온에서는 303명의 중국인이 살해당한다. 이전에 멕시코정부는 중국인의 피살사건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대청제국의 군함이 온다는 말을 듣고, 해기함이 오기도 전에 멕시코정부는 직접 청나라정부에 사과한다. 그리고 피해입은 중국교민의 생명과 재산손실을 보상하겠다고 약속한다. 멕시코정부의 사죄를 받은 후, 해기함 관병들은 멕시코로 가서 '포함외교'를 하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이는 중국근대사상 보기 드문 정치외교적 승리였다.

이러한 정치외교적 승리의 기초는 바로 청일전쟁이후 뿌리내린 대청제국에서 새로 발전한 강대한 해군력이었다.

그 후, 해기호가 국내로 돌아오는 도중에 국내에서는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1912년 5월 상해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는 이미 멸망했고, 중국은 이미 민국시대에 접어들었다.

해기호는 직접 대청제국의 황가해군에서 민국함대로 편입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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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기함이 세계여행을 하는 기간, 청일전쟁후 새로 발전하기 시작한 대청해군은 이때 장강의 수면을 따라 신해혁명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해군통제(海軍統制, 총사령관에 해당함)이자 명장인 살빙진은 대청제군의 해군정예를 모두 거느리고 장강의 수면을 사이에 두고, 요새를 방어했다. 청일전쟁후에 재건된 이 제국해군은 이때 인심이 이미 바뀌었다. 전체 해군부대에 혁명사상이 유행했고, 결국 40여년간 청나라신하로 있던 살빙진은 "병이 들어 치료해야한다"는 이유를 핑계를 대고, 양쪽의 그 어느 곳도 돕지 않고 함대를 떠난다. 이후의 일은 대청해군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남겨둔다.

결국, 1911년 11월, 국내의 대청해군은 집단적으로 신해혁명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포구를 돌려 남하한 북양군을 향했다. 그리하여 혁명군은 장강과 한강(漢江)의 수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1912년 1월, 이미 민국해군부대로 변신하고 북상하여 산동연대, 요동화원구로 진격한다. 그리고 북경에 이웃한 하북 진황도에서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겨우 목숨만 붙어 있던 청왕조를 크게 뒤흔든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조정은 퇴위를 선포한다. 이제 청나라해군은 종결되었고, 새로 일어난 민국해군은 특수한 방식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민국이 성립된 후, 국내의 공인된 해군원로인 살빙진은 오랫동안 민국의 해군총장을 맡아달라고 요청받는다. 1927년 북벌전쟁후, 67세의 살빙진은 최종적으로 해군을 떠나, 복건의 고향으로 가서 자선활동에 종사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자금을 모아 병원을 설립한다. 그후로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대청제국이 민국에 남긴 해군자산은 민국의 난세로 인해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내의 분열국면과 선박의 노후화로 게속 위축된다. 비록 그러했지만, 1894년이후 청나라조정에서 구매하거나 건조한 군함은 시종 민국해군의 주력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구매한 영풍호(永豊號)는 일찌기 손중산이 일으킨 호국토원운동(護國討袁運動)에 참가한 바 있다. 그후 영풍호는 다시 '동정평반(東征平叛)', '순중산몽난(孫中山蒙難)', '중산함사건(中山艦事件)'등 중대한 역사사건을 겪는다. 1925년 손중산이 사망한 후, 영풍호는 중산함으로 개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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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순국은 대청제국해군의 마지막 귀속처가 된다.

1937년 항전이 전면발발하고, 중국해군은 겨우 66척의 군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절대다수는 청나라에서 남긴 것이었다. 당시 민국해군의 총배수량은 6.8만톤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일본해군은 각종 군함 308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총톤수는 120여톤에 달했다. 그리고 함재기와 육상기반 비행기 100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역량이 크게 차이나는 국면하에서 청나라에서 남긴 군함은 최종적으로 비장한 방식으로 항전때 나라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1937년말, 일본이 장강을 따라 침범하는 것을 방어하는 강음보위전에서 청나라가 남긴 해기호, 해용호, 건안호, 건위호등 여러 전함이 일본군함과 싸우다가 피해가 심각한 상황하에서 국군장교는 장강에 스스로 침몰시켜, 일본군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삼았다.

그외에 1937년 9월 25일, 청나라에서 남긴 민국의 건강호(建康號)는 최종적으로 강음보위전에서 일본군의 비행기폭격에 침몰한다. 응서호(應瑞號)도 1937년, 일본군과의 전투중 안휘 마안산 채석기에서 일본비행기의 폭격에 침몰한다. 그외에 조화호(肇和號)는 광동 호문항전때, 일본군 석장호(夕張號)와 교전을 벌이고, 일본군 비행기폭격에 침몰한다; 1937년 12월 12일, 동안호(同安號)는 청도의 항로를 봉쇄하고, 일본군의 진공을 막기 위해, 국군관병들에 의해 비장하게 청도소항에 침몰시킨다.

청나라에서 남긴 군함중 가장 비장한 것은 중산함이라고 할 것이다.

1935년, 해군명장 살진빙의 질손(侄孫)인 살사준(薩師俊)은 중산함의 제13대 함장이 된다. 1938년, 무한회전이 발발한 후, 살사준은 중산함의 관병을 이끌고 무한으로 간다. 그리고 중산함의 대포 3개를 해체하여 무한외곽의 방공화력을 증강시키도록 돕는다.

1938년 6월에서 10월까지, 중산함은 금구에서 가어, 신제의 강일대의 경계를 책임졌고, 일본군의 공격을 용감하게 막았다. 1938년 10월 24일, 중산함은 일본군비행기의 미친듯한 폭격하에, 키와 보일러가 완전히 파괴된다. 그리하여 전체 함선이 통제를 잃는다. 몇분내에 물이 1미터가량 찼고, 그후 중산함은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장강을 표류하게 된다.

그렇지만, 함장 살사준은 여전히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후, 일본군 비행기가 다시 중산함의 함수를 공격했고, 살사준은 두 다리가 잘려, 엄청난 피를 흘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극심한 고통을 참으면서, 관병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포격했다.

관병들은 함장 살사준이 이미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작은 배로 강안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려 했다. 그러나, 살사준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배를 떠나 치료받아도 된다. 그러나 나는 함장이다. 마땅히 배와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절대로 배를 한발짝도 떠날 수 없다!"

당시, 중산함의 지휘실은 이미 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군함도 침몰직전이었다. 그후 부함장 여숙분(呂叔奮)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 강제로 살사준과 부상관병을 작은 배로 옮기도록 명령한다. 작은 배가 중산함을 떠날 때, 중산함의 함수가 높이 치켜들렸고, 영웅이 머리를 치켜들고 가슴을 펴는 것처럼 보였다. 그후 큰 소리를 내며 배는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작은 배로 옮겨진 살사준과 24명의 부상병은 일본군 비행기의 기총소사로 결국 모조리 희생당한다. 시신은 모두 장강에 빠졌고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무한회전 이전에, 살사준은 부대의 관병들에게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나의 임무이다. 생사를 걸고 지키겠다. 순국하기를 원한다!"

해군명문집안 출신의 중산함 함장은 결국 생명과 열혈을 장강에 뿌리고 죽었다.

중산함의 파괴는 결국 청나라에서 민국해군이 된 전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제 대청제국해군은 신해혁명이후 나라를 지키는 항전과정에서 모조리 희생당했다.

중국해군의 국보급 인물로, 청나라의 함풍, 동치, 광서, 선통 4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민국시대까지 거치고 신중국성립까지 목격한 살빙진은 1952년까지 살았고, 향년 93세였다.

사망하기 한 해전인 1951년, 중국인민지원군이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이미 92세인 살빙진은 기쁜 나머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북양해군으로 조선에서 참패를 겪었던 해군노장이고, 나중에 청나라 해군총사령관(해군통제)을 지냈으며, 민국의 해군총사령관(해군총장)을 지낸 노인은 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 이런 시를 남긴다(* 다만, 아래 시는 살빙진의 것이 아니고, 살빙진이 지은 시는 다른 것이라는 설이 있다):

오십칠재유여몽(五十七載猶如夢)

거국논망연한성(擧國溣亡緣漢城)

용유천수물자기(龍遊淺水勿自棄)

종유양미토기천(終有揚眉吐氣天)

57년이 마치 꿈과 같이 흘렀다.

온나라가 망한 것은 한성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용이 얕은 물에서 놀더라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

언젠가는 눈썹을 날리며 기세를 떨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