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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만주(동북)의 역사

by 중은우시 2024. 12. 10.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1860년 함풍제(咸豊帝)가 죽기 한해전에 하나의 결정을 내린다: 동북(만주)개방

만주인의 "용흥지지(龍興之地)"로서, 동북은 이전 근 200년간 명목상의 '봉금령(封禁令)'을 실시하여 유민들이 그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금지했다.

이민제한을 풀어주면서, 동북의 인구는 1771년에 80만에 미치지 못하던 수준에서 1894년에 이르러 600만명으로 증가한다. 금방 동북에서 민족위기가 가중되면서, 인구는 다시 한번 폭발적인 증가를 하게 된다.

러시아와 일본 두 이웃국가는 모두 동북을 집어삼킬 야심을 드러냈고, 대청제국은 동북으로의 이민을 늘이기로 결정한다. 인민의 왕양대해로 침략자의 전진을 막아보겠다는 계획이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의 적극적인 장려하에, 1894년에서 1908년까지의 14년간 동북의 인구는 600만에서 다시 1,910만으로 늘어난다. 자연증가분을 제외하고 동북이민인구는 1,150만명에 이르러, 전체 동북인구의 60%를 차지하게 된다.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관내의 백성들이 동북으로 이민하는 제2차 이민붐이 일어난다. 9.18사번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0년, 흑룡강, 길림, 요녕등 동북삼성의 인구는 2,736만명에 이른다.

많은 인구들이 동북으로 들어가면서, 이웃나라들은 동북에 대한 야심을 실현할 수 없었다. 비록 전쟁, 동란과 함락을 거쳤지만, 동북은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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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尙書).우공(禹貢)>에서는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눈다. 오늘날의 요동반도 및 요서(遼西)의 일부지역은 각각 기주(冀州)와 유주(幽州)에 속한다. <우공>이 책으로 만들어진 전국시대는 '전국칠웅(戰國七雄)'중 하나인 연(燕)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다만 당시의 동북평원은 여하한 대형사건에도 거의 참여하지 못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도 사람들의 이 토지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동북해지외(東北海之外), 대황지중(大荒之中)", "대황지중(大荒之中), 유산명불함(有山名不咸), 유숙신씨지국(有肅愼氏之國)"이었다.

"황(荒)"은 거의 동북평원의 대명사가 된다.

대흥안령, 소흥안령과 장백산의 영향으로 오늘날의 동북평원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돌아가며, 지세도 평탄하여, 흑룡강,길림, 요녕과 내몽골등 4개의 성구를 지나며 총면적이 35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하여, 절강성의 3.5배, 광동성의 2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다만, 이 평원의 서부에는 남북방향으로 대흥안령이 남으로 요녕서부까지 뻗어 있어, 요서구릉을 이른다. 그리고 화북지구의 연산(燕山)이 북으로 뻗어나가 요서지구까지 뻗어, 요서의 깊은 곳까지 이어진다. 그리하여, 전체 동북평원은 바다, 좁고 긴 요서주랑(遼西走廊)을 통해 연운(燕雲), 화북(華北)과 연결되어 있는 외에 다른 점은 거의 독립된 지리계통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원에서 동북으로 군대든 상단이든 인원과 물자를 운송하여 동북평원으로 가려면 요서주랑이라는 통로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인 천연장벽으로 동북평원은 중국과는 떨어진 지역이 된다.

연나라가 출현하기 전에, 숙신인들은 "고시석노(楛矢石砮)"를 잘 만들었고, 동북평원의 첫 주인이 된다.

소위 "고시석노"는 돌로 만든 각종 화살병기이다. 비록 이때 숙신의 제조공법은 동시대 중원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었지만, 숙신인은 대외조공과 무역도 알았다. 주천자가 중원지역에 제후를 책봉하여 사방을 지키자, 숙신인은 이 돌화살, 석창을 가지고 주왕실에 조공을 하게 된다. 이 원시적인 석병기는 결국 대부분 주천자가 공품으로 인정해준다. 그리고 주왕실이 각 제후들에게 하사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어, 각국의 태묘내에 반드시 비치하는 신기(神器)가 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진(陳)나라의 어화원에서 '고시석노'에 맞아 다친 준조(隼鳥, 매)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국군 진민공(陳湣公)은 이 화살이 무엇인지 몰라서, 한때는 누군가 그를 암살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다행히 공자는 견식이 넓어, 차근차근 국군에게 이 화살의 내력을 알려주었고, 오해는 그렇게 풀린다.

이를 보면, 당시 중원인들은 비록 숙신인들의 노동성과를 누렸지만, 이 해외의 사람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사 숙신인의 "이웃"이라 할 수 있는 연나라도 숙신과는 서로 교차하는 부분이 아주 적었다. 사서에는 모호하게 숙신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외에, 동북평원에는 고죽(孤竹), 산융(山戎)등 유목부락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숙신을 이기지 못했고, 일찌감치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나중에 숙신은 점차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등 부락으로 변화하고, 중원의 지식인들의 그들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돼지를 잘 기르고(好養豕), 그 고기를 먹고(食其肉), 그 가죽을 입으며(衣其皮), 겨울이 되면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冬以豕膏塗身), 두께가 몇푼이 되어(厚數分),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以御風寒). 여름이 되면 웃통을 벗고 다니며(夏則裸袒), 베조각으로 앞뒤를 가린다(以尺布蔽其前後)"

이런 고착된 인상은 수당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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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평원 최초의 강력한 정권인 고구려는 한나라말기에 숙신인의 이웃인 부여인(扶餘人)에 의해 건립된다. 수백년간의 발전을 거쳐, 수나라초기에, 고구려는 이미 "승병삼십여만(勝兵三十餘萬)" "유성백칠십육(有城百七十六), 호육십구만칠천(戶六十九萬七千)"의 강력한 정권으로 성장했다.

고구려건국초기, 부족은 대량으로 요동의 산지, 구릉 사이에 모여살았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多大山深谷), 평원과 호수는 없다(無原澤), 산골짜기를 따라 살았고(隨山谷以爲居), 계곡물을 마셨다(食澗水). 좋은 밭은 없었고(無良田), 밭농사를 짓기는 하지만(雖力佃作), 사람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不足以實口腹)". 기원4세기부터, 고구려인들은 점점 자신의 조상발원지를 나와 대외확장을 시작한다. 백여년간의 군사쟁탈전을 통해, 다른 부족들 틈 사이에서 생존하던 이 부락은 최종적으로 동북평원의 주인이 된다.

동북평원의 광활한 경작치를 차지한 후, 고구려의 농업면적은 몇배 증가한다. 게다가 철기등 선진생산도구가 중원에서 유입되며, 농부산품도 일거에 많아지게 된다. 당시, 고구려는 동북평원에서 생산한 양식을 가지고 국고에 다 넣을 수가 없어서, 일반백성들의 집에 "부경(桴京)"이라는 소형창고를 만들어 양식을 보관했다. 농업생산의 대규모발전은 고구려의 여러 정치제도와 경제정칙을 한화(漢化)하도록 만들었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세금납부는 포(布), 곡(穀)을 위주로 했다. 당시의 중원왕조의 세금제도와 아주 유사했다.

그외에 부여인의 후예로 고구려는 조상이 기마수렵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농업발전이 충분한 때에도 수렵은 고구려인들이 농업생산을 보충하는 수단이 되고, 고급동물은 배를 채우는 외에 중원왕조에 대한 공물로도 쓰였다.

단순히 동북에 웅크리고 앉아서 발전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고구려는 중원을 차지하려는 야심도 있었다. 그리하여 수말당초의 혼란기에 강성한 고구려는 요서로 진격하고, 여러 장벽을 넘어 중원에서 패업을 이루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소문을 듣고, 수양제는 거병하여 세번이나 요동정벌에 나서서 고구려를 신복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수나라군대는 먼 길을 오게 되면서, 고구려의 역량을 소멸시킬 수 없을 뿐아니라, 수나라는 온 국력을 기울여 노동력을 전선에 보내는 바람에 국내의 농경이 피폐해지고, 토지는 황무지가 되어,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결국, 전쟁의 도박을 건 원정은 수나라를 고구려보다 먼저 망하게 만든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는 천하를 평정한 후, 마찬가지로 고구려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한다. 망자존대(妄自尊大)의 수양제와 비교하면 당나라를 개창한 이연, 이세민 부자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했다. 대당건립초기, 고구려는 북방의 절대역량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서쪽에 돌궐인들이 "공현백만(控弦百萬)"으로 호시탐탐 천하를 노리고 있었다.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당나라황제들은 고구려라는 예전의 적국을 번속국으로 받아들이고, 칭신을 허락하며, 상응한 경제, 기술적인 지원을 한다.

그러나, 당나라군신들이 생각지 못했던 일은 고구려인들이 겉으로는 대당에 신복하는 것같았지만, 속으로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가 제공한 선진기술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요둥지구의 산지와 구릉이 밀집된 장점을 이용하여 산성(山城)을 하나하나 쌓기 시작한다. 이들 산성은 고구려백성과 병력의 집단주거지일 뿐아니라, 고구려국내교통과 군사국방의 중요거점이었다. 이런 산성간의 교통로를 건설하면서, 고구려는 금방 산성을 거점으로 하는 교통네트워크를 건설하게 된다. 동시에, 산성간의 교통연결을 통하여, 고구려인은 요서주랑에 '천리장성'을 구축한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서진, 남하 확장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다.

고구려 환도산성 유적지

고구려와 대당간의 합의는 고구려국왕에 의해 파기된다. 신라, 백제등 국가를 압박하어 조선반도에서 확장하기 위하여, 고구려는 심지어 병력을 보내어 신라가 대당에 진공하는 통로도 막고,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당나라는 이미 당태종 이세민의 집권시기로 접어들었다. 고구려의 공공연한 도발에 당태종은 강경하게 반격한다. 이전양전(以戰養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당태종은 수나라때의 유성군(柳城郡)을 영주(營州, 지금의 요녕성 조양)도독부(都督府)로 고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이 군사요충지에 주둔시킨다. 여러 해동안 실력을 키운 후 당고종 이치시기 고구려에 내란이 일어나고, 당고종은 그 기회를 틈타 동북으로 진입하여, 조선반도의 평양을 점령하고, 고구려는 멸망한다.

3

중원왕조의 동북평원에 대한 개발은 고구려의 멸망고과 더불어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당군이 동북에서 위세를 떨칠 때, 이전의 돌궐 일릭 칸(頡利可汗)의 부족사람인 아시나 쿠틀룩(阿史那 骨篤祿)이 반란을 일으켜, 오늘날의 몽골고원일대에 다시 후돌궐칸국을 건립한다. 이는 당나라의 변경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이다. 남편에게서 대당의 지고무상의 권력을 넘겨받은 무측천은 원래 당나라에 복속한 고구려귀족과 무리들은 모조리 후돌궐과 당나라간의 전선으로 보내 변방수비를 강화한다.

동북지구에는 오랫동안 거란(契丹), 해(奚), 말갈등 여러 소수민족부락들이 살아왔으므로, 대당군대가 떠나자, 그 지역은 무법천지가 된다. 마침내 무주 만세통년원년(696년), 거란이 먼저 당에 반란을 일으켜, 병력을 보내 영주를 점령한다. 이어 해, 말갈등 부족도 속속 호응하여 영주의 난은 일촉즉발이 된다.

나중에 대당이 1년만에 혼란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영주도독부는 명존실망(名存實亡)하게 된다. 당나라는 이곳을 거점으로 동북을 개발하려던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말갈부의 걸걸중상, 대조영부자가 여기에 끼어든다. 말갈인은 숙신인의 후예이고, 고구려가 굴기했을 때 고구려에 붙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들은 고구려유민을 따라 영주로 갔고, 당나라의 통제를 받았다. 영주의 난이 발생한 후, 걸걸중상은 아들 대조영과 무리를 이끌고 원래 숙신인의 옛땅으로 되돌아가서 재기를 기다린다. 이 조치는 무측천으로 하여금 그들이 당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무측천은 즉시 거란장수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천문령(天門嶺, 지금의 장광재령)을 넘어 대조영부자를 추격하게 한다.

대조영은 말갈인이 지세를 잘 아는 유리한 요소를 활용하여, 고구려, 말갈병을 모아 이해고와 결전을 벌인다. 이해고는 패배하여 도주하고, 천문령대첩으로 대조영의 명성은 동북에 널리 떨치게 된다.

그후, 대조영은 계속 말갈의 각부락을 끌어들이고, 일부 조선반도에서 북상한 이민들도 끌어들인다. 돌궐이 남하하여, 내지와 동북간의 교통이 단절된 틈을 이용하여 과감하게 동쪽으로 진군하여 지금의 장백산 및 목단강이 만나는 지즘까지 올라가 성을 쌓고 대외확장을 하면서 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대당이 대조영의 부친 걸걸중상에게 내린 봉호 "진(震)"을 국호로 삼아,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한다. 이것이 발해국의 시초이다.

당시 여러 부족이 난립하고, 투쟁이 끊이지 않던 동북지구에서 자리잡는 것은 신생발해국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조영이 칭왕한 때부터 시작하여 발해국은 200여년간 존속하면서, 돌궐, 신라 및 당나라와 결맹을 맺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했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발해국은 당나라의 삼성육부와 유사한 관료체계를 형성했을 뿐아니라, 전국각지를 당나라의 행정구역을 본따 나누고 오경제(五京制)를 실행하여, 동북지역을 전면적이고 계획적으로 개발한다. 나중에 동북지구가 한때 안사의 난의 폭풍중심이 되기도 하였지만, 발해국은 시종 안록산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이 기간동안 왜국(지금의 일본)이 발해국을 협박하여 납공칭신하도록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발해국은 대당을 종주국으로 여기고 왜국과의 종속관계를 거부했다.

대당 보응2년(763년), 유주절도사 이회선(李懷仙)이 사조의(史朝義)를 붙잡아 죽임으로써 안사의 난이 끝난다. 아마도 발해국이 안사의 난에 휘말리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당대종은 대조영의 손자 대흠무를 발해국왕에 봉하고, 정1품검교태위의 직위를 추가하여, 발해에 대해 포상하며 발해국의 지위는 한단계 승격된다.

이때부터 발해국은 당나라를 더욱 숭상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발해국왕은 당나라의 아악(雅樂)을 받아들인 후, "발해악(渤海樂)"을 만들었다고 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 음악스타일은 바다를 건너 일본궁정의 아악으로 받아들여졌다.

발해국의 건너편에 일본인들은 당나라의 장안 및 낙양을 청사진으로 하여, "소낙양"이라는 평안경(平安京, 지금의 교토)을 만들어 동북아에 이름을 떨친다. 발해국도 이에 지지않고, 장안성의 건제를 본떠 국도 상경용천부(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에 1/2로 축소한 장안성을 만든다. 규모는 당시의 평안경보다 훨씬 컸다. 만당시인 온정균은 발해왕자의 귀국에 호송한 적이 있는데, 그가 처음 이 거대한 성을 보고 감탄하여 이런 시를 남겼다:

강리수중해(疆理雖重海), 거서본일가(車書本一家)

성훈귀구국(盛勛歸舊國), 가구재중화(佳句在中華)

정계분추창(定界分秋漲), 개범도서하(開帆到曙霞)

구월풍월호(九月風月好), 회수시천애(回首是天涯)

강역은 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문화는 한집안처럼 동일하다.

왕자께서 성취를 거두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구절은 중원에 남아 있다.

국경을 넘으니 가을에 물이 불어, 돛을 달고 해동성국에 도착했다.

광궁의 풍월은 아주 좋지만, 고개를 돌려 장안을 그리워하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

'해동성국'이라는 찬사를 듣지만, 발해국도 멸망의 운명은 벗어날 수 없었다. 926년, 거란의 기방이 남하하면서, 발해국은 거란의 수령 야율아보기의 맹공하에 멸망한다.

발해유민들이 복국할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야율아보기는 "분이치지(分而治之)"의 책략을 쓴다. 그는 발해국의 마지막 황족과 전체 백성을 거란국내의 상경(上京, 지금의 몽골자치주 파림좌기 동남부)로 옮겨 거주하게 한다. 동시에 한문화를 좋아하는 장남 야율배(耶律倍)를 발해옛땅으로 보내어 "동단국(東丹國)"을 건립하게 하여, 이 지역사람들의 발해국에 대한 기억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요태종 야율덕광은 시종 형이자 동단왕인 야율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야율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요태종은 동북지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전 발해국 상경부근에 요나라의 남경을 건설하는 것이다(지금의 요녕성 요양). 그렇게 하여 동북의 백성들을 모조리 남경을 핵심으로 하는 요동지구에 거주하게 이주시킨다. 동시에 명을 내려 원발해국의 상경을 파괴하여, 동북평원을 황야지대로 만든다.

역사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이번 조치로 인하여 당시 "요서와 내몽골로 이주한 발해족의 인구수는 94,000여호, 인구 47만여명에 이른다. 조선반도로 도망친 발해유민은 10여만명에 이른다. 그리고 원래 땅에 남아있는 사람은 노약자와 환자, 장애인든 겨우 2만여호에 불과했다."

통치자가 대량의 인구를 요서지역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에, 동북평원은 사람과 토지간의 불균형 문제가 나타난다. 요서지역은 인구가 급증하고, 토지개간이 가속화되며, 초원이 지나치게 개발되어, '평지송림(平地松林)'이 계속하여 줄어든다. 여기에 이 시기 동북지구의 기후는 건조하고 추워지기 시작한다. 동북평원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휘황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고, 문화의 퇴화로 생존환경은 더욱 악화된다.

다행히 이런 국면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말갈인의 후예인 여진족이 굴기하면서 거란인의 요나라가 금방 북방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백산흑수에서 기원한 여진족은 그후 중원으로 치고 들어와, 여러번 남하하여 송을 공격하고, 거란, 해등 동북민족의 인민들도 함께 데리고 중원을 들어와 당나랑이래 다시 한번 변방민족의 내천(內遷) 붐을 이루게 된다. 동북평원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이 내천하면서 현지의 인구는 급감한다. 이는 동북평원의 환경이 자연스럽게 재생, 회복되도록 도와주게 된다. 그리고 이후 여진족이 다시 굴기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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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 누르하치를 우두머리로 하는 여진족이 다시 굴기한다. 그리고 동북평원에서 선조를 본받아 후금정권을 건립한다.

대명제국에 있어서, 대명제국의 판도에서 동북지역은 상당히 중요했다. 명성조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래, 동북지구는 천하의 안위를 결정짓는 제약요소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만리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하고, 장성의 동쪽으로 산해관에서 요녕 금주에 이르는 고약금탕(固若金湯)의 요서주랑을 건설한다. 이때부터 한인과 소수민족은 철저히 나뉘어지고, 관내는 한인의 취락지가 되고, 관외의 광범위한 몽골초원과 동북평원은 소수민족의 취락지가 된다.

그렇기는 해도, 명나라는 여전히 동북평원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관동지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명나라는 동으로 압록강, 서로는 산해관, 남으로는 여순해구, 북으로는 개원에 이르는 개활지를 요동지휘사사(遼東指揮使司)가 통일하여 관리한다. 그리고 흑룡강과 송화강유역은 전문적으로 중앙의 명을 받는 초무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해 관외의 각 소수민족을 초무(招撫)한다.

노을간도사는 전성기에 384내 위소(衛所)를 관할했다. 서로는 알난하(斡難河)로부터 동으로는 사할린섬(庫頁島), 북으로는 외흥안령,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한다. 그러나, 이전에 소수민족이 대규모로 남천했기 때문에, 이때의 동북지역에는 땅은 넓지만 사람은 많지 않은 상태였다. 관외평원에 소수의 몽골인과 아직 규모가 크지 않은 여진족을 제외하고, 다른 직접 이용할 자원은 아주 적었다. 그리하여 명선종때, 명나라는 노아간도사의 경영과 개발을 포기한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명선종의 이 결정은 대명을 망치게 된다.

당시의 관외에 새로 굴기한 몽골 오이라트부는 이미 북원의 잔여세력중 최강의 한 갈래였다. 노아간도사가 관할하는 동북평원일대에는 몽골, 여진의 소수민족부락이 있었는데, 예센등 오이라트부가 기세를 떨치자, 이들은 신속이 집결했고, 대명의 기반을 뒤흔드는 주력이 된다. 그후 토목보의 변이 발생한다.

토목보의 변의 교훈을 받아, 명영종의 아들 명헌종 주견심은 재위기간동안 "기회를 틈타 변경을 빼앗고 약탈한(乘間竊掠邊境)" 건주여진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이는 "성화리정(成化犁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명나라는 이때 이미 동북지구에 대한 기미(羈縻)통치를 철저히 포기했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해동안의 전투와 변화로 명나라는 명목상 노아간도사와 실제 위도를 책임지는 요동도사외에 동북지구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헤 버린다.

역사는 증명한다. 이런 통제불능상태의 결과는 엄중하다는 것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칠대한(七大恨)"을 내세워 거병한 이래, 명나라는 무순에서 처음 패배하고, 사르후에서 두번째 패배하고, 요심(遼瀋)에서 세번째 패배하며, 광녕에서 네번째 패배한다. 이렇게 요녕을 빼앗겨 버리고, 요서의 대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나중에 손승종, 원숭환등 명장의 노력으로 성을 하나 되찾기는 했지만, 전체 왕조는 이미 요동전투의 진흙탕에 발이 빠져서, 멸망은 시간문제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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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후금에서 발전한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하여, 황제시대의 마지막 천하공주(天下共主)가 된다. 왕조의 변경은 정치중심의 이전을 가져왔고, 청나라는 불가피하게 발전의 괴현상에 빠진다: "거국입관(擧國入關)" 그리하여 동북평원은 다시 토지는 황무지가 되고, 인구는 부족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청나라통치자들은 자신의 용흥지지에 대하여 아주 강력한 보호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청군이 입관한 이래 조정은 관내에서 대량의 인구를 모아 요동을 개간하도록 보낸다. 순치10년(1653년), 청정부는 심지어 격려방안까지 마련한다. <요동초민개간조례(遼東招民開墾條例)>. 여기에는 백성 100명이상을 모집하는 자에게는 "문관이면 지현(知縣), 무관이면 수비(守備)의 직위를 내린다". 만일 모집능력이 강한 자여서 더 많이 모으면 100명단위로 관직을 한 단계씩 승진시킨다.

동북평원으로 가서 황무지개발에 참여한 백성들에 대하여도 청정부는 마찬가지로 상응하는 지원을 제공한다. "모집된 백성들에게 1인당 매달 양식 1두를 주고, 토지 1향당 6승의 종자를 주고, 매 백명당 소 20마리를 준다."

그러나, 관내에 전란이 평정되고, 만주팔기가 입관후에 중원지역에서 대거 권지(圈地, 토지를 빼앗는 것을 가리킴)하자, 관외로 나가려는 생각이 있고, 몸이 자유로운 평민의 숫자는 제한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요동초민개간조례>에서 규정한 장려제도는 간접적으로 청나라때 매관매직의 '선례'가 된다. 강희7년(1668년)에 이르러 이 조례는 폐지된다. 이해에 청나라조정은 의식하게 된다 동북은 만주족의 용흥지지이니, 그 순결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봉금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영원히 유민을 금지하고, 입경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기록에 따르면, <요동초민개간조례>가 폐지된이후 45년째인 강희51년(1712년) 관청에서는 여전히 십여만의 산동인을 모아서 동북으로 보내 개간둔전활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는 동북평원에 아직 농업이 지주산업이 되지 못했고, 인삼채취, 수렵등이 명나라초기 변관무역때 성행한다. 내지에서 새로 동북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인삼채취'의 붐에 참여하게 된다.

역사학자 장죽산(蔣竹山)의 <인삼제국>이라는 책에 따르면, 누르하치시대에 동북에서 생산된 야생인삼의 가격은 근당 25냥 백은이었다. 순치연간에는 인삼가격이 근당 30-60냥 백은 사이를 오갔다. 관방의 인삼판매시 거두는 세금을 보면, 청나라정부는 매년 국고수입이 250만냥이 되었다. 거대한 이익때문에 한인이건 만주족이건 동북개발시기에 모두 인삼재베와 무역에 가담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한인과 현지의 만주족사이의 경쟁과 갈등은 점차 제국이 해결해야할 난제가 된다.

건륭5년(1740년), 병부시랑 서혁덕(舒赫德)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봉천의 지방관계가 심히 중대합니다. 기인(旗人)의 인구가 날로 늘어나고, 각성의 상인들이 몰려오면서, 좋은 자와 나쁜 자들이 섞여있게 되니, 기인들의 풍속이 그 영향을 받아, 생계와 풍속이 예전같지 않아서, 적시에 정돈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게 되면 풍속이 날로 나빠져서 만회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건륭제는 금방 서혁덕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경은 만주의 뿌리가 있는 곳이어서 아주 중요하다. 그곳에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토지에 농사를 짓고 있다. 성경은 식량이 충분해서 한인들을 경작시킬 필요가 없다. 차라리 한인들에게 경작하게 하느니 기인들에게 경작케 하는 것이 좋겠다."

건륭제가 보기에 이 토지에 살고 있는 기인들은 게을러서 농사를 짓지 않고 있다. 이들은 남겨두어 나중에 팔기의 병사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한인들이 무고하게 개간하여, 만주팔기의 생산공간을 차지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륭제가 동북을 봉금하려는 것은 그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봉금령이 나온 후에도 전체 대청제국은 잔혹한 현실에 부닥쳐야 했다. 농업기술의 제고와 탄정입무(攤丁入畝)정책의 시행으로 관내의 중원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사람과 토지의 관계가 포화상태가 되었다. 역사수치를 보면, 건륭5년(1740년), 청나라의 총인구는 1.4억가량이다. 110년후인 함풍원년(1851년)에는 이 수치가 4.3억으로 늘어난다. 청나라의 인구증가는 이전의 어떤 역사시기의 증가수치보다 많다. 방대한 인구에 상대적으로 낙후한 경제구조로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의 통치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중원지구는 연이어 1855년 황하 동와상(銅瓦厢)의 제방붕괴, 1877년의 대형가뭄인 "정무기황(丁戊奇荒)"때, 산동, 산서, 섬서, 하북, 하남등지의 백성들은 청나라조정의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동북평원으로 이주한여, "틈관동(闖關東)"의 붐을 일으킨다. 틈관동은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인구이주활동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동북의 대개발을 가져온다.

다른 한편으로, 봉금령이 한때 장성내외의 인구이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동북지구는 항상 변방병력이 부족했다. 특히 아편전쟁이후, 청정부는 변방에 대한 통제력이 날로 약화되면서, 인구가 드문 동북평원은 점차 제정러시아가 남하하여 확장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상태로 된다.

결국 동북의 통치를 보위하기 위하여, 청정부는 1907년 동북삼장군을 취소하고, 봉천, 길림, 흑룡강의 삼성을 설치한다. 이때부터 "동삼성(東三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비록 청정부는 한인들이 동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나중에 바로 이 "틈관동"의 붐으로 인하여 대청제국과 중화민족이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에서 동북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토, 강역과 민족의 근본은 영원히 인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