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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동정(東征), 서정(西征), 남정(南征), 북벌(北伐): 왜 북쪽을 칠 때만 북벌이라고 하는가?

by 중은우시 2024. 11. 27.

글: 목목설사(木沐說史)

역사서를 읽어보면 별처럼 많은 시사가부도 있고, 패주권신의 속고속이기도 있고, 도검이 서로 부딛치는 남정북벌(南征北伐)도 있다.

만일 영화드라마 혹은 소설을 자주 본 사람이라면 조금 이상한 규율을 발견했을 것이다. 역사상 유독 북으로 진군할 때만 '북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매번 북벌은 희생이 매우 컸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전쟁의 "정(征)"과 "벌(伐)"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전쟁은 대체로 5천년전에 일어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간의 탁록지전(涿鹿之戰)이다.

비록, 거기에는 믿기 힘든 신화전설이 너무나 많이 들어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축록지전의 이야기에서 조상들이 용감하게 불공정에 도전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상주(商周)전쟁이 끝나고, 주천자(周天子)의 통치하에 중국은 "예악제(禮樂制)"의 평화시기로 들어가게 된다.

주천자는 지고무상의 권리와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만일 분봉받은 제후의 행위가 부당하면, 주천자는 병력을 이글고 "정토(征討)"했다.

여기의 "정토"는 출사유명(出師有名, 명분있는 전쟁)을 대표하고, '이상대하(以上對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혹은 윗나라가 아랫나라를 대하는)'의 절대적인 압제이다.

제후를 정토할 때, 마구잡이로 살육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만일 제후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굴복하면, 주천자는 하층민중들을 해치지 않는다.

점점, "정"자는 지방반란을 제압하는 단어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북벌" 두 글자가 출현한 시기는 비교적 늦다. 가장 먼저 보이는 북벌은 진나라로 소급된다. 전국시대 말기, 진군은 진시황의 통치하에, 육국을 통일하여 중국역사상 첫번째 봉건통일왕조를 건립한다.

천하통일후, 빈번하게 남하하던 흉노(匈奴)는 진나라의 안위에 영향을 주는 주요 위험요소였다.

그때, 흉노가 거주하던 곳은 몽골일대이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의 영향을 받아 경작을 할 수가 없고, 대다수가 유목으로 살아갔다.

여름은 괜찮지만, 겨울이 되면, 북방흉노는 살 길을 찾아 남하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된다.

흉토를 치기 위하여, 진나라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진시황은 역사상 최초로 북벌을 감행한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전에 진시황은 삼십만대군을 출동시켜 내몽골 하투(河套)일대로 나아가 흉노를 공격한다.

나중에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온 나라의 힘을 끌어모아 만리장성을 쌓는다.

다만, 장성을 건설하느라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했고, 민중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다. 결국 진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후, "북벌" 두 글자는 북방을 향해 출병하는 것에 대한 전유명사(專有名詞)가 된다.

여기에 흉노는 대부분 흉포하고 용맹하다. 매번 발생하는 전쟁은 참혹한 죽기살기식이되어, 사상자가 매우 많이 나온다.

"벌(伐)"자가 "한명의 사람과 하나의 창(一人一戈)"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살륙을 의미한다. 그래서 매번 북벌은 참혹한 댓가를 치른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대왕조에서 정서장군(征西將軍), 정남장군(征南將軍)은 많지만, 북벌대장군(北伐大將軍)은 보기 힘든 이유이다.

만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황제는 가볍게 북벌을 일으키지 않는다.

매번 북벌할 때마다 흉다길소(凶多吉少)하다. 북벌에 참여한 명장들도 많은 경우 북방에서 사망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북벌이 이렇게 흉험한데, 그렇다면 북벌에 성공한 사람은 있을까.

북벌의 공(功)과 과(過)

비록 북벌이 매우 흉험하지만, 역사상 많은 명장들은 성공을 거두었다. 북방이 감히 대응도 하지 못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칭신하게 만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8세에 출정하여, 22세에 "봉랑거서(封狼居胥)"된 소년영웅 곽거병(霍去病)이다.

한나라는 문경지치를 지내면서, 한무제 유철이 즉위했을 때, 국력이 전성기에 달한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더욱 적극적으로 북벌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매번 큰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명성을 사방에 떨친다.

최종적으로 흉노가 고개를 숙이고 칭신하게 만들었고, 마지막에는 흉노가 대막의 북쪽으로 도망치면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는 천년동안 전해지게 되는 비단길을 개척할 수 있었고, 중국의 문화상품수출의 기반을 닦는다.

그러나, 연이은 전투로 동한말기에 이르러 강성했던 한나라도 전쟁의 소모를 버티지 못한다.

결국 쌍방외교는 화친을 위주로 하게 되고, 전쟁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어진다.

삼국시기에 이르러 북벌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천하는 삼족정립이 이루어지고, 그중 촉한은 유황숙으로 인하여 '정통'으로 인정된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육출기산(六出祁山)하면서 조조를 북벌하는 국면이 나타난다.

주목할 점은 당시 조조는 북방오랑캐가 아니었다. 오히려 '협천자이령제후'하고 있었고, 조조는 한나라의 명실상부한 승상이었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북으로 진군하는 것은 '북정(北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촉한은 자신의 출병이 정당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억지로 "북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시에 동오도 북쪽의 조위에 출병할 때 역시 "북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때 이후, 북벌은 더 이상 북방의 오랑캐와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전용명사가 아니라, 파생적으로 북쪽의 적군을 향해 공격하는 것을 북벌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남북조시기에 대량의 북벌전쟁이 발생한다. 다만 대부분은 지방군벌간의 전쟁이다. 그래서 '북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약간 견강부회적인 측면이 있었다.

수나라, 당나라시기에 이르러 중원대지는 다시 통일되고, 북방외적은 흉노에서 돌궐로 바뀐다.

당나라때, 국력이 강성했던 당나라는 돌궐로 하여금 다시 남하하지 못하게 만들고 매년 진공을 하고, 당나라는 한때 당시 최강국이 된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원은 다시 혼란상태로 접어든다. 오대십국.

당시 중원은 여러 나라로 나뉘게 되고, 이재민이 천지에 가득했다. 남북조시대에 비견할 만했다.

이때, 북방소수민족도 숨쉴 시간을 가지고, 그들은 맹렬하게 발전한다. 그리하여 다시 북방강국으로 성장한다.

이 현상은 북송시기에 더욱 엄중해진다.

북송이 막 건립되었을 때, 북방의 거란은 국력이 매우 강했고, 연운십육주를 점거한다. 즉 현재의 하북, 산서일대이다.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도 밀집되어 있다.

그래서 북송시기 비록 여러번 북벌을 했지만, 항상 패전이 많았고, 승리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손실이 매우 컸다.

거란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북송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현재의 동북지구로 가서 이제 막 굴기하기 시작한 금나라와 결맹을 맺는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해상지맹(海上之盟)"이다.

송금양국의 결맹은 매우 순조로웠고, 금나라도 매우 노력하여, 거란은 양국의 협공하에 금방 멸망한다.

그러나, 거란멸망후, 금나라는 송나라가 유악함을 보고 금군을 남하시켜 두 황제를 포로로 잡는 정강지치(靖康之治)가 발생한다.

남송이 임안 즉, 현재의 항주로 도망친 후, 정강지치를 갚기 위하여 한 무리의 뜻있는 인사들이 출현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악비의 북벌이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칭송한다.

비록 남송시기 북벌의 횟수는 매우 많았지만, 황제가 유약하고, 간신이 농간을 부려, 매번 북벌은 의화(議和)로 끝난다. 악비가 죽은 후 남송은 곤경에 빠진다.

다만 그러나 송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금나라가 아니라 다른 왕조이다.

북벌의 고(苦)와 난(難)

당시 송, 금이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을 때, 북방에 진정한 강적이 나타난다. 몽골.

몽골족은 징기스칸의 통치하에 남정북벌을 통해 전체 아시아지역을 빠르게 정복하고 그 영토는 유럽에까지 뻗어간다.

원나라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소수민족이 통치한 왕조이다.

그러나, 수토불복으로, 혹은 천재지변으로, 원나라는 중원대지에서 통치한 기간이 백년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거지에게 전복된다.

그렇다. 그 거지는 바로 대명자자한 대명황제 주원장이다.

원나라말기 매년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한차례 또 한차례의 농민반란이 발생한다.

주원장은 이들 중 대표적이다. 그는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면서 싸워 고향 봉양에서 시작하여 응천부를 점령한다. 광적량(廣積糧), 완칭왕(緩稱王)을 통하여,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진우량과 장사성을 격패시킨 후 북벌의 길을 나선다.

주원장의 명령하에 명군은 계속 북상하였으며, 원나라군대는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결국 북방초원으로 물러간다.

주체가 등극한 후, 명나라의 수도는 북경으로 이전된다. 그리고 북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북방의 강적이 침입하는 빈도와 강도를 약화시켰다.

청나라때도 같은 반란군인 홍수전이 '북벌'을 시도한 바 있고, 거의 천진을 점령할 뻔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일군대로 적진 깊숙이 쳐들어간 것이어서 청군에 모조리 소탕당하고 만다. 그래서 '북벌'이라는 두 글자를 붙이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북벌원군'은 아마도 중국고대사상 마지막으로 일어난 진정한 의미의 북벌일 것이다.

2천여년의 역사에서 '북벌'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은 그렇게 몇차례뿐이다. 그리고 매번 댓가는 엉청났다.

진나라는 북벌을 감소시키기 위해, 부득이 전국의 힘을 모아 장성을 쌓았고, 이는 북방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한나라는 비록 강성했지만, 흉노북벌을 강행하다가 국력을 소진하여, 결국은 쇠퇴하고 만다.

이를 보면, 북벌은 매번 댓가가 엄청났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많은 정도로 북방유목민족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중원의 보병이 상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방은 산이 많고, 생존환경이 열악하다. 그리하여 대군이 장기간 주둔하며 작전하기에 적합치 않다.

그리고, 북방에는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없어, 토지는 넓지만 사람은 적다. 그리하여 성을 건설하기 힘들다. 설사 병력을 출동시켜 점령하더라도, 병력을 남겨서 지키기가 힘들다.

이렇게 되다보니 중국의 북벌은 매번 징계, 제재가 위주였고, 영토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출병은 거의 없었다.

유목민족은 사해를 집으로 여기며, '가국(家國)'정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그들을 정복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여러 요소가 중첩되면서, '북벌'이 효과적인 전과를 내기 어려워진다.

이는 왜 북방으로 출병하는 것에는 "북벌"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북정"이라고 하지 않았는지를 말해준다. 즉 정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