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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정강산(井岡山)시기, 모택동과 주덕간의 갈등과 충돌이 있었던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4. 12. 29.

글: 옥미수(玉米穗)

주덕(朱德)이 군대를 이끌고 처음 정강산(井岡山)에 올랐을 때, 모택동과의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이는 많은 당사자료에서 모두 언급하거나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기술방법은 비교적 은회(隱晦, 주요부분을 가리고 명확하지 않게 하다)하고, 어떤 때는 간략하게 한두마디로 지나간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다만, 중공 초기의 고위장령인 공초(龔楚)가 쓴 <공초회억록(龔楚回憶錄)>에는 주덕과 모택동간의 충돌과 갈등의 구체적인 사건 및 그 원인을 비교적 상세하게 회고하고 기술해 놓았다. 공초는 또한 그 본인의 당시 주덕, 모택동 두 사람의 성격차이 및 능력등에 대한 생각도 적어놓았다.

공초에 다르면, 1928년 5월부터 10월까지, 주덕과 모택동간에 다음과 같이 몇 차례의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6월하순, 제28단, 제29단 2개의 단(주덕이 데리고 정강산에 오른 부대)이 신노칠계령(新老七溪嶺)에서 작전을 벌여 국민당군대 김한정(金漢鼎)부대를 격파하고 수백정의 소총과 몇 자루의 기관총을 노획한다. 당시 두 단은 노획한 무기를 자신들의 장비로 보충하고, 자신들이 쓰던 성능이 떨어지는 무기를 정강산으로 보내어, 31단(모택동의 직속부대로 원래 정강산에 있던 부대임)과 지방적위대(地方赤衛隊)의 무기로 보충하게 했다. 모택동은 이 일에 대하여 크게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주덕에게 노획한 좋은 무기를 균등하게 31단에도 나누어주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주덕은 각단이 이미 스스로 총기무기를 처리했으므로 다시 명령하여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택동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주덕을 "본위주의(本位主義)"라고 비난하게 된다.

둘째, 7월 침주(郴州)전투가 겉으로는 호남성위가 주장한 것이지만, 기실 주덕이 암중으로 정강산을 벗어나서 상남(湘南, 호남남부)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며 모택동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기획한 것이었다. 모택동이 극력 말렸지만, 주덕은 무시하고 침주공격계획을 집행한다. 당시는 국민당군의 제2차 정강산포위소탕작전이 진행중이어서, 비록 정강산이 점령당하지는 않았지만, 산아래의 각 현, 구, 향은 크게 파괴되고 손실을 입었다. 모택동은 형세가 험악한 것을 보고, 직접 31단을 이끌고 정강산을 떠나 주덕을 찾으려 한다. 계동(桂東)에서 침주공격에 실패한 주덕의 부대와 만난다. 모택동은 주덕을 단순한 군사관점만 있는 모험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셋째, 구월 십삼일, 홍군이 국민당군 유사의(劉士毅) 부대를 격패시키고 수천(遂川)을 점령한 후, 모택동은 즉시 승기를 틈타 황요(黃坳)를 공격하자고 주장한다. 주덕은 남쪽으로 발전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며칠동안 대치한다. 구월하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황요를 공격하여 정강산으로 회복시켰다. 모택동은 당시 주덕에 대해 근거지를 고려하지 않는 유구(流寇)사상을 가졌다고 비난했다.

주덕이 정강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고, 상남에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었다:

첫째, 그는 모택동은 권력욕이 나무 강하고, 독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자기 혼자 결정하고, 또한 아주 고집이 세며, 매번 주덕을 통제하려고 하며, 주덕으로 하여금 모택동을 위해 정강산을 지키도록 요구했다. 이에 주덕은 큰 불만이었다.

둘째, 정강산은 양식이 극히 부족했다. 홍군병사들은 자주 호박으로 요리를 해야 했고, 고구마와 잡쌀을 섞어서 주식으로 먹어야 했다. 생활이 극히 힘들었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정강산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는 주덕의 의사결정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 병사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주덕으로서 외부로 발전하는 것이 필요했다. 모택동이 정강산을 기지로 삼고 중심으로 삼아 서서히 외부로 물결식으로 발전하자는 계획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셋째, 모택동은 자주 호남성위 및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거나 반대했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주덕은 모택동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생각하는 개인주의사상이 있다고 봤다. 그리하여 상급에 반대까지 하는 것은 엄중한 항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덕은 그리하여 모택동과 고의로 거리를 두었다.

넷째, 홍군전적위원회(紅軍前敵委員會)는 중앙의 지시하에 성립된 것이며, 상임위원은 모택동, 주덕, 공초였다. 홍군의 일체행동의사결정 및 지방당업무와의 협조건은 마땅히 전적위원회에서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자신의 독재를 위해, 별도로 홍군당과 지방당의 연석회의를 조직하여, 전적위원회를 대체했다. 그리하여 주덕과 공초는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었고, 두 사람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주덕은 모택동과의 사이에 금이 생기게 되고, 모택동을 독재라고 욕하게 된다.

이상의 몇 가지가 바로 주덕이 모택동의 영도에 반대한 주요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