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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중국역사상 최대 분열시기

by 중은우시 2025. 1. 8.

글: 택설(宅說)

오호십육국은 중국역사상 대분열시기이다. 그렇다면, 오호십육국의 역사는 도대체 어느 시기에 발생했고, 오호십육국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오호십육국의 분열원인

오호십육국같은 대분열시기가 온 원인은 진(晋)에 있다. 삼국시대의 혼란을 겪은 후에는 다시 통일하였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원기를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동오(東吳)를 멸망시킨 후 서진(西晋)은 사치와 부패에 빠져들고,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암흑시대에 탐장왕법(貪贓枉法)하고 뇌물횡행(賂物橫行)했다. 이 당시의 외부국면은 대량의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는 오호십육국을 불러온 기반이 된다.

다음으로, 사마염이 죽은 후,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한다. 이때부터 궁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장 현저한 것은 바로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이다. 그녀가 실권을 장악하고 전체 조정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때 마침내 "팔왕지란(八王之亂)"이 발생한다.

"팔왕지란"으로 서진의 원기는 크게 상하고, 중원으로 들어온 여러 유목민족이 그 틈을 타서 거병하면서, 오호난화(五胡亂華)의 국면이 조성된다. 금군(禁軍)을 지휘하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다.

이 기간동안 근 백년의 자상잔살(自相殘殺)로 한족인구가 줄어들고, 한족통치자들은 각 소수민족을 통제하고, 내지의 노동력을 보충할 인구가 부족해진다. 그리하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주변의 유목민족들의 중원으로 이동한다.

오호(五胡)

내천(內遷)한 이후 한족의 장기적인 영향하에 이들은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과도기의 과정을 거친다. 주로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의 다섯 소수민족을 역사에서 "오호"라 부른다.

다만,"오호"라는 개념은 인식상 약간의 편차는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당사자라 할 수 있는 부견(苻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호(五胡)의 서열(次序)에 너희 강(羌)은 이름이 없다!"(<진서>에 나옴)

대량의 외래민족은 인구구성비율을 바꾸어 버렸다. 진나라는 외래민족에 대하여 과도하게 착취함으로 인하여 그들의 반항을 불러온다. 가장 먼저 서진에 반기를 든 민족은 저족(氐族)이었다. 이특유민반란(李特流民起義). 이특등이 차례로 사망한 후, 이웅(李雄)이 제후들에 의해 주군으로 옹립되고, 계속하여 유민을 이끌고 전투를 지속한다. 304년 성도(成都)를 함락시키고 '성한(成漢)'정권을 수립한다. 난세가 다시 서막을 연 것이다. 그리고 이번은 그 어느때보다 참혹했다.

십육국 전진(前秦)

같은 304년, 흉노인 유연(劉淵)은 흉노귀족들과 거병을 모의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한다. 또한 "한"의 국명을 사용하며 촉한의 후주 유선(劉禪)을 효회황제(孝懷皇帝)로 추존한다.

정권을 건립한 후 유연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아들 유총(劉聰, 흉노), 대장(大將) 석륵(石勒, 갈족), 대장 왕미(王彌, 한족)을 보내어 영토를 빼앗는다. 이 세 갈래의 호한이 섞여 있는 삼로의 병마는 중원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아간다.

서진멸망

역사는 사마씨에게 기회를 주었다. 310년, 유연이 사망한 후, 유화(劉和)가 즉위한다. 그리고 유총은 당시 대사마였는데, 황위쟁탈을 위해 1년간 되돌아간다. 그리고 황위를 차지한 후에 다시 낙양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사마가는 여전히 내분에 휩싸여 황제와 친왕들이 다시 싸우게 되었다.

유총은 그리하여 가볍게 낙양을 점령하고, 진회제(晋懷帝) 사마치(司馬熾)를 포로로 잡고, 귀족과 백성들을 도살한다. 진회제가 죽은 후, 진민제(晋愍帝) 사마업(司馬鄴)이 장안(長安)에서 즉위한다. 그후에 다시 붙잡혀 피살당한다. 서진은 이렇게 멸망하고, 흉노가 전체 중원을 지배하면서, 백년에 이르는 대동란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후 각민족은 북방에서 차례로 나라를 건립하게 되는데, 역사에서 말하는 "오호십육국"시대이다. 그리고, 서진이 멸망한 후 사마가는 건강(建康)으로 도망쳐 동진(東晋)을 세운다.

십육국이라는 명칭

313년 장궤(張軌)는 양주(凉州)를 장악한다. 역사에서는 "전량(前凉)"이라고 부른다; 315년, 拓발선비(拓拔猗)는 대국(代國)을 건립한다; 유총은 서진을 멸망시킨 후 안일하고 호화사치하며 정무를 소홀히 한다. 유찬(劉粲)이 즉위하지만 근준(靳準)에게 살해당하고 권력을 빼앗긴다. 유연의 당질(堂侄) 유요(劉曜)는 석륵과 함께 반란을 평정한다. 그리고 유요는 그동안 황제에 오르며 국호를 "조(趙)"로 바꾼다. 역사에서 "전조(前趙)"라 불리는 왕조이다.

석륵은 이를 알고 양국성(襄國城)에서 조왕(趙王)에 오르니 역사에서는 "후조(後趙)"라 부른다. 이렇게 쌍방이 결렬된다. 전조를 멸망시킨 것은 후조의 석륵이다. 후조를 멸망시킨 것은 한족 염민(冉閔)의 염위(冉魏)이다. 그리고 염위는 모용씨(慕容氏)의 손에 죽는다. 334년, 모용선비는 요동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다. 모용씨는 352년 염외를 멸망시키고 모용준(慕容俊)이 황제에 올라 전연(前燕)을 건국한다.

305년 저족인 부건(苻健)이 관중을 탈취하고 전진(前秦)을 건국한다. 몇년 후 조카 부견이 즉위한다. 부견은 왕맹(王猛)을 파견하여 전연, 대국, 전량등을 멸망시킨다. 이를 통해 오호십육국기간동안 제1차 북방통일을 완성한다. 비수전투(淝水之戰)이후 30년만에 전진은 내란으로 멸망한다. 북방은 다시 혼란기에 접어들고 각 호족이 속속 나라를 세운다. 이때 후연, 서연(西燕), 후진(後秦), 서진(西秦), 후량(後凉)이 전부 나타난다. 그리고 후진같은 국호는 강(羌)족 장수 요장(姚萇)이 건립한 것으로 그가 바로 부견을 죽였다.

그후에 남량(南凉), 서량(西凉), 북량(北凉)이 나타나 위의 전량, 후량과 합쳐서 오량(五凉)이라 부른다. 그리고 다시 남연(南燕), 북연(北燕)이 나타나 앞의 전연, 서연과 합쳐서 사연(四燕))이라 부른다. 북연은 한족이 건립했다.

부견이 피살된 후, 선비족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자립하여 서진(西秦)을 세운다. 선비탁발부는 다시 대국을 부활시킨 후, 위(魏)로 개명한다. 역사에서 북위(北魏)로 불리는 왕조이다.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拔燾)는 구지(仇池)의 항복을 받아내며 다시 북방을 통일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역사는 남북조시대에 진입한다.

"십육국"이라는 명칭은 북위의 사학자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한다. "오량, 사연, 삼진, 이조, 및 성(成), 하(夏)를 합쳐서 십육국이 된다." 서진이 멸망한 후,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는 시기까지 북방에서는 전후로 20여개 세력이 굴기한다. 단지 16국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량(五凉): 전량(前凉), 북량(北凉), 서량(西凉), 후량(後凉), 남량(南凉)

사연(四燕):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 북연(北燕)

삼진(三秦): 전진(前晋), 서진(西秦), 후진(後秦)

이조(二趙): 전조(前趙), 후조(後趙)

성(成): 성한(成漢)

하(夏): 하(夏)